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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이사람 - 새누리당 중앙당 박판석 부대변인

30년 정치인생, 더 큰 역할을 위해 발로 뛰는 숨은 조력자, 박근혜 대통령과의 인연

[인터넷 대한뉴스] 글 조선영

 

 

 

역사를 보면 지도자보다 책사나 참모가 더 중요하고 큰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국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책사로 인정받는 자는 유비의 책사 제갈공명이다.

제갈공명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파악하거나 추측하는 능력, 무엇보다 유비가 필요로 하는 것을 잘 알고 보필해 그가 없었다면 유비는 황제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제갈공명처럼 여러 정치인들을 보좌를 하며 직접 발로 뛰는 큰 역할을 하는 새누리당 중앙당 박판석 부대변인의 30년 정치인생을 들어보자.

 

언제 정치를 시작하셨나요

 

고향은 전남 화순인데 대학 때 유신과 3선 개헌을 반대하는 데모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야권에서 정치를 시작했는데, 군대제대 후 1979년에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하시고 김대중 대통령의 사조직 민주헌정연구회와 연청이 구성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정치인생을 시작했습니다.

 

5.18민주화 운동에 직접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1980년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김대중 대통령이 내란 음모죄로 수배가 되자 저도 체포가 되었는데, 수감 43일 동안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 어느 누구도 발설하지 않자 한 명만 대면 봐주겠다고 회유했지만 끝까지 버티자 구둣발이 바로 입으로 오더군요. 이때 보안사 분실에서 당한 고문으로 30대에 틀니를 하게 됐는데, 당시는 오직 민주화를 위해 데모를 했고 우리나라가 민주화되고 나니 나라에서 5.18민주 유공자로 인정을 해주더군요.

 

1992년 지방선거시 화순지역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셨는데

 

1987년 대통령직선제가 확정되고 야권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김대중과 동교동계가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는데, 1988년 국회의원 선거 때 평민당 공천에서 탈락했고 1992년 국회의원선거엔 무소속으로 출마했지요.

당시 전라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민주당 우세였으나 광양과 나주 그리고 제가 출마한 화순이 무소속후보들에게 우세하게 되자 당시 대통령후보인 김대중 선생이 민주당 유세를 돕기 위해 오셨습니다. 합동연설회 당시 저를 보고 사람들이 제2의 김대중이라고 부르곤 했었죠.

그런데 유세를 도와주러 오신 김대중 선생께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홍기윤 후보가 미워도 민주당을 봐서 찍고 민주당이 미워도 12월 대통령 선거를 위해 찍어라. 무소속후보는 당선이 돼도 낙선을 해도 입당을 받지 않을 것이다. 홍기윤 후보를 꼭 당선시켜라’는 지원유세로 인해 결국 제가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1992년 선거 실패 후 잠시 정치계를 떠나셨는데 어떻게 다시 정치를 하게 되셨는지요?

처가가 나주에서 과수원을 했는데 신세도 많이 지고 해서 정치를 잠시 쉬며 일을 하고 있었는데, 박찬종 의원이 자신을 좀 도와줄 수 있냐며 전화가 왔었어요. 처음엔 거절했지만 두 번째는 직접 찾아와 부탁해 지난 선거 때 저를 거부했던 민주당에 대한 실망이 가득했던 저는 무소속의 박찬종 의원 밑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새 정치를 시도하면서 광주, 전남조직을 총괄하며 정치계 세대교체운동을 시작했지요.

1995년 서울시장선거에서 서울시장후보였던 무소속 박찬종의원이 초반 우세했지만 저는 충청권의 표를 더 모아야 한다고 김종필과의 연대를 주장했는데, 다른 보좌진의 반대로 결렬되고, 결국 조순 후보가 제 예상대로 김종필과의 연대로 충청권의 표를 쓸어가며 12만표 차이로 제1대 서울시장이 되셨죠.

1997년 15대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경선 때는 이회창 후보를 위한 경선이 되자 제가 박찬종 의원에게 탈당을 권고하고, 이회창 후보대신 이인제 후보를 지지하게 했죠. 이것이 당시 김대중 후보의 15대 대통령 당선에 일조를 하게 되어 친정 민주당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런데 소속이 민주당이셨는데 현재 18대 박근혜 대통령과 인연이 되신 계기는

 

2006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시절 ‘5.18민주화운동기념행사’에 오셨는데 제가 5.18민주화운동 화순군지역 상임고문으로 있었죠. 그때 저는 한나라당 당직자가 모시는 것보다 우리 행사에 오신 손님은 우리가 모셔야 예의라고 생각해 민주의 문 방명록부터 자리에 모시는 것까지 제가 안내를 했죠.

그 후 3년간 행사에 참석하실 때마다 제가 안내를 도와드렸는데 3번째 참석 때 처음 제게 말을 건네셨죠. 명함을 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그랬습니다. ‘대표님, 저는 민주당 사람입니다. 저는 5.18민주화운동의 회원으로서 도리를 다하는 것이니 제 명함은 받지 않으시는 게 큰일 하실 때 걸림돌이 되지 않으실 겁니다’ 했죠.

그러자 박 후보께서 본인 명함을 주시는데 저도 받지 않았죠. 이 또한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저는 박 후보께서 워낙 크고 생각이 깊으신 분이라 당시 명함교환을 거절했을 때 5.18행사에 오실 때마다 당신을 정성으로 모신 저를 생각하셨다면 무시한다거나 버릇없다고 하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돌고 돌아들어온 민주당에서 2004년 국회의원선거에서 저를 무소속으로도 출마할 수 없게 공천 마지막에 탈락시켜 이미 마음이 떠난 친정이었지만 명함을 받고 제가 자리를 옮겼다면 회유, 아부 등의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었고, 박 후보께도 혹 누가 될 수도 있었기에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라도 오해가 있으시다면 박대통령께 사과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언제 한나라당에 입당하셨고 역할은 어떤 것이었는지요

 

2010년 홍사덕 의원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 민주당이 친노 열린우리당과 통합되면서 이념적으로 많은 갈등을 하던 터라 그분의 도움 요청을 받아들이고 한나라당에 입당하게 되었죠. 그러나 물과 기름이라는 느낌 속에 이재오 의원의 은평을 보궐선거 출마를 돕게 되었는데, 선거 때 제 지론은 ‘표는 사무실에 있지 않고 밖에 있다’로 당사 사무실보다는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 설득했죠.

이재오 의원이 당선되고 그 날 축하자리에서 저를 찾아 전화하셨길래 제 일이 끝났으니 집으로 내려가는 중이라고 했지요. 그후에도 그분이 특임장관시절 도움이 필요하실 때마다 저는 힘껏 도와드렸습니다. 그리고 2012년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셨는데 제 조언을 들으시고 이재오의원은 경선출마의 마찰 속에도 탈당하지 않고 박근혜 후보를 위해 백의종군하시는 결정을 하셨지요.

그 후 저는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국민대통합 기획본부특보를 맡아 5.18 민주화운동 박근혜 후보지지 선언을 이뤘습니다. 당시 회원 천여 명을 만나 설득해 이름공개 57명, 비공개 210여명 등 260여 명의 지지자 서명을 받았지요. 선언문이 나가기 전까지 이름공개 지지자의 수가 좀 줄긴 했지만, 5.18민주화운동 박근혜 후보 지지선언을 방해하려는 회원들을 따돌리고 선언문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민주당도 받아내지 못한 지지선언을 박근혜 후보가 유일하게 성공하며 진정한 국민대통합을 이루었다는 여론으로 한나라당 홈페이지가 마비될 정도의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지금 새누리당에서의 역할과 당부의 말이 있으시다면

 

현재 당에서는 민주당이나 좌파, 데모하는 사람들의 전략과 전술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에 따른 어려운 부분들에 대한 뒷받침을 합니다. 야당에서 복지정책의 후퇴라고 정부를 비판할 때 김대중 정부의 18%, 노무현 정부의 12%의 낮은 공약 성공률을 제시하며 기사를 띄워 여론을 잠재우고, 세월호 수습 등 정부에 많은 의견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념이 중도성향인 사람으로 국민대통합의 인사를 부탁드리고 싶고, 국가는 정의로워야 되고 사회는 공정해야 되고 국민은 행복해야 되기 때문에 집권당이나 야당이나 협력 속에 견제가 이루어져 진정으로 국민들을 위하는 상생정치를 하기 바랍니다.

 

기자뒷말

 

5.18민주화운동 때 고문으로 30대에 틀니를 했다며 틀니를 두고 훈장이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는 모습에 오히려 기자는 마음이 무거웠다. 이렇게 웃으며 옛날이야기를 할 때까지는 얼마나 많이 힘들고 지쳤을까…. 1996년 일본외무외상의 독도관련망언 때 이를 규탄하기 위해 직접 사비를 들여 일본에 들어가 일본 황실 앞에서 할복을 하려 했다고한다.

하지만 우리 대사관 직원이 할복을 할 경우 국가간에 서로 마찰이 생길 수 있고 일본은 할복만큼이나 삭발도 중요하니 삭발을 해도 충분히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권해 3월 1일 오전 10시 일본 외무성 정문 옆에서삭발식을 했고, 귀국해서 광화문 파출소 앞 노상에서 13일의 단식을 이어가 큰일을 치를 뻔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보다는 나라사랑이 더 큰 분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는 나라 잃은 설움을 겪은 대변인의 부모님께서 나라가 없는 국민은 국민도 아니라며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라면서 내 나라 내 민족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고도 덧붙였다. 또 아직 부대변인 자신의 뜻을 이룰 기회를 얻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뜻을 이룬다면 소신을 가지고 어떤 곳이든 필요한 곳에서 또 다른 길을 만들어 후배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하는 본이 되는 사람이고 싶다고 했다.

뒤에서 말로만 하는 정치인도 있고, 또 눈도장을 찍기 위해 약삭빠르게 행동하는 정치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박판석 부대변인은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는 열심히 발로 뛰며 앞장서 솔선수범하고 책임을 다하고 난 뒤에 대가를 바라며 기다리기보다는 책임을 다한 사람의 도리, 자신만이 느끼는 성취감을 선물이라 말하는 박판석 부대변인이 진정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아~따, 내 일 다 했으면 집에 가야지 뭣 하러 거기 있당가. 그 사람이 내가 필요하면 또 부르것재~’ 하는 사투리 섞인 투박하고 구수한 말투가 잊히지 않는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4년 7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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