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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 Sound, Feel!

심장을 두드리는 북소리, 이것이 최강 파워

[인터넷 대한뉴스]글 조애경 기자 | 자료협조 할리데이비슨 코리아

 

 

 

전 세계에 두터운 마니아층을 확보한 모터사이클 브랜드 ‘할리데이비슨’. 명실공히 대형 고급 모터사이클의 대명사가 된 할리데이비슨은 충성스런 고객들로 유명하다. 고객들은 로고를 문신으로 새기고, 전 세계 마케터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순 추천고객지수(NPS: Net Promoter Score: 자신이 쓰는 제품이나 브랜드를 타인에게 추천하고자 하는 의향을 나타내는 지수)는 80%를 웃돈다. 단순히 질주 본능에 충실한 이들이 많다고 하기에는 이러한 저력을 기대하기 어려울 터. 과연 할리데이비슨에는 어떤 매력이 있기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열광할까?

 


# Start!


V형 트윈엔진에서 나오는 진동과 말발굽 엔진 배기음으로 심장을 뛰게 하는 할리데이비슨. 그 시작은 1903년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허름한 목조건물에서였다. 현대 모터사이클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동력 자전거를 만든 창시자 ‘윌리엄 할리(William Harley)’와 ‘아더 데이비슨(Arthur Davidson)’은 자신들의 성을 따 ‘할리데이비슨(Harley-Davids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더 데이비슨의 형제인 윌리엄 데이비슨(William Harley)과 월터 데이비슨(Walter Davidson)이 회사에 합류한 것은 창립 직후의 일이다.


그런데 왜 회사 이름을 ‘데이비슨할리’라고 하지 않고 ‘할리데이비슨’이라고 했을까? 이는 할리데이비슨 최초의 엔지니어이자 할리데이비슨 최초의 모터사이클을 도안하고 디자인한 ‘윌리엄 할리’를 추대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윌리엄 할리는 할리데이비슨 모터컴퍼니 초창기의 모터사이클 개발을 진두지휘해, 설립한 지 채 20년도 되지 않은 1920년에 할리데이비슨을 세계 최대의 모터사이클 제조업체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윌리엄 할리는 1943년에 사망하기까지 할리데이비슨 모터컴퍼니의 최고 엔지니어로서 활약했으며, 1998년에는 아더 데이비슨 형제들과 함께 ‘모터사이클 명예의 전당(Motorcycle Hall of Fame)’에 추대되었다.


1920년대에 이미 67개국에 2,000여 개의 딜러를 가지고 있던 할리데이비슨 모터컴퍼니는 이후 양차 세계대전에 자사의 군용 모터사이클을 납품해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특히 2차 세계대전 때 공급한 WLA모델은 총 9만 대가 생산되면서 할리데이비슨 모터컴퍼니는 창사 이래 최대의 전성기를 누린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연간 2만2,000여 대의 모터사이클과 1만6,000여 대의 사이드카를 판매하며 할리데이비슨은 발전을 거듭했다. 


# 위기에서 태어난 또 하나의 가족


할리데이비슨 모터컴퍼니는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 영국 경쟁 업체들이 저렴한 가격대로 우수한 성능의 바이크를 생산하면서 첫 위기에 직면했다. 그리고 1960년대 미국 모터사이클 시장에 일본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진출함에 따라 직면한 위기는 심화됐다. 결국 1969년, 미국의 레저용품 회사인 AMF가 할리데이비슨 모터컴퍼니를 전격 인수했으며, 한 때 미국 내에서 90%까지 치솟았던 할리데이비슨의 시장 점유율은 25%까지 감소했다.


1981년, AMF의 단기적인 경영 방침에 불만을 품은 13명의 임원이 담합하여 할리데이비슨 모터 컴퍼니를 다시 사들여 독립하는데 성공했다. 회사를 되찾게 된 할리데이비슨은 이를 기념하여 같은 해 ‘The Eagle Soars Alone (독수리는 홀로 비상한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펜실베이니아에서 위스콘신까지 장거리 랠리를 기획하기도 했다. 가슴을 뛰게 하는 프레이즈와 남자다운 이미지에 대한 고객 반응은 뜨거웠다. 이때부터 할리데이비슨 모터 컴퍼니의 재도약이 시작됐다.


특히 할리데이비슨 오너들은 H.O.G.(Harley Owners Group - 할리데이비슨을 소유하고 같은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결성하여 할리데이비슨 브랜드를 보호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임원진들은 자신들이 직접 몸에 문신을 새기고 할리데이비슨 고유의 가죽 의상을 입고 H.O.G.랠리라는 모터사이클 축제에 참여했다. 모터사이클 라이딩, 파티, 게임 등 다양한 행사를 하는 H.O.G.랠리는 미국 전역의 모든 멤버들을 하나로 연결해주었으며, 랠리가 열리는 지역을 유명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92년에는 유럽에서 랠리를 갖는 등 전 세계적으로 750여 개의 지부가 생겨났고 2011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130개국 1,420 지부에 속해 있는 H.O.G. 멤버는 100만 명이 넘는다. 

 

# 새로운 도약, 새로운 전성기


할리데이비슨 모터 컴퍼니는 1986년부터 2006년까지 21년 연속 최대 매출 기록을 경신했고, 지난 10년간 평균 17.4%의 높은 순익증가율을 기록했다. 급기야 2000년에 일본 혼다와 야마하를 제치고 세계 1위 모터사이클 제조업체 자리에 올랐다. 특히 2004년에 할리데이비슨은 전 세계에 총 31만 7,000여 대의 모터사이클을 판매했고, 2005년 3월에는 뉴욕 주식시장에서 매출이 무려 33배가 넘는 세계최대 자동차제조사인 GM을 주식시가총액에서 앞지르기도 했다.


흔히 할리데이비슨의 매력은 ‘Look’, ‘Sound’, ‘Feel’ 세 단어로 요약된다. 전통적인 프레임에 최신기술을 덧입힌 디자인(Look), 라이더의 가슴을 울리는 말발굽 엔진 소리(Sound), 마치 말을 타듯 리듬감 있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독특한 진동감(Feel)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매력은 2000년 이후 아시아 시장의 성장과 여성 라이더의 증가에 맞추어 범위를 확대했다. 본체 높이를 낮추고 조작법을 간단하게 바꾸는 시도로 여성 라이더도 아우르는 할리데이비슨 파워를 뽐낸 것. 수많은 모터사이클 기업이 경쟁과 불황을 이기지 못했지만 할리데이비슨은 때마다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지혜를 발휘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2003년 창립 100주년을 맞이해 할리데이비슨은 1년 동안 이벤트를 했다. 이 이벤트는 2002년 7월에 시작해 2003년 8월에 마무리될 정도의 대규모 이벤트로 오픈 로드 투어 (Open Road Tour), 라이드 홈 (The Ride Home), 더 파티 (The Party) 등 세 개의 주요 행사로 구성됐다. 행사에는 수많은 라이더들이 참석해 할리데이비슨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표현했다. 수만 명의 할리데이비슨 라이더들이 참가해 할리데이비슨의 105번째 생일을 축하한 2008년에는 할리데이비슨 모터컴퍼니 100여 년의 역사를 담은 ‘할리데이비슨 박물관’이 오픈했다. 총 12만 평 부지의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할리데이비슨 박물관은 할리데이비슨과 관련된 다양한 역사를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2009년 취임한 새로운 CEO 키스 반델(Keith E. Wandell)을 필두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할리데이비슨 모터컴퍼니. 시시각각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이 때 전 세계 라이더들의 촉각은 오직 할리를 향하고 있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1년 12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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