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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칼럼

오늘의 난국,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정신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국내적인 면을 보면, 정치적으로는 정치인들이 극도로 국민의 불신을 사고 있고,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리더십도 위기를 맞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먹고 살기가 어렵다. 장사가 안 된다. 먹거리(신성장동력)가 없다.’고 야단들이고, 사회적으로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안전사고가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고, 이념간 갈등도 심각하다. 국제적인 면을 보면, 주변 4대 강대국들은 계속해서 팽창주의를 추구해 국제정세를 어렵게 만들고 있고, 북한은 협박과 공갈로 도발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방책은 없을까? 바로 우리 민족 역사에서‘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정신에서 그 길을 찾아야 한다. 그 정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 이순신 장군은 부정과 부패에 맞서 싸웠다

 이순신 장군은 불의와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성품으로 많은 중상모략을 받았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이순신은 1576년 2월 32세의 늦은 나이로 무과 병과에 급제하였으나 10달이 넘도록 변변한 보직을 받지 못하고 있다가 그해 12월에 가서야 겨우 함경도 삼수 고을의 동구비보 권관(종9품)으로 부임했다. 그곳에서 3년 동안 근무를 마치고 1579년 2월 훈련원 봉사(종8품)로 부임해 군의 인사행정을 담당할 때, 그의 직속상관인 병조정랑(정5품: 현재 국방부 인사과장급) 서익(徐益)이 자신의 지인을 참관(정7품)으로 특진시키라고 지시를 했다. 그때 이순신은“아래 있는 사람을 순서를 바꿔서 승진시키면 반드시 그 자리에 승진해야 할 사람이 못하게 되어 공정하지 못할뿐더러, 특정인을 위해 임의로 법규를 고칠 수도 없는 것이므로 옳지 않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사건으로 이순신은 8개월 만에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되었고, 나중에 또 더 큰 불이익을 받게 되는데, 1580년 7월 이순신이 만호(종4품)로 승진하여 전라도 고흥에 있는 발포만호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로 사람을 보내 만호영의 객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이순신은“이 오동나무는 나라의 땅 위에 있으니 나라의 물건입니다. 사사로운 용도로 쓸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 후 몇몇 상관들로부터 많은 오해와 미움을 사기도 했으나 그런대로 어려움을 잘 극복해 나가고 있었는데, 훈련원 봉사 시절에 밉보였던 서익이 군기경차관(검열관)으로 발포에 내려왔다. 그는 이순신의 군기 관리가 소홀했다고 상부에 악의로 보고를 해서 만호가 된 지 18개월 만에 관직생활에서 첫 번째의 파직을 당했다.

 관직에서 파직되어 불우한 처지에 놓인 이순신에게 류성룡은 당시 이조판서로 있는 이율곡을 한번 만나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이순신은“나와 율곡이 같은 집안이라 서로 만나보는 것도 좋지만 그가 인사 책임자인 전상(銓相: 이조판서를 뜻함)의 자리에 있는 동안은 옳지 못한 일이오.”라며 첫마디에 거절했다. 그러고는 끝내 만나지 않았다. 이처럼 이순신은 무슨 일을 하든지 다가올 미래의 유불리(有不利)를 좌고우면하지 않았고, 스스로 바르다고 생각한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 나갔다. 설령 그 길이 힘들더라도 헛된 안일을 구하고자 불의와 타협한 일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일본 해군 소장 가와다 이사오는 자신이 쓴『포탄을 뚫고』라는 책에서“이순신 장군은 당시의 조선에서 유일하게 청렴한 장군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둘째, 이순신 장군은 오직 나라를 위한 충정(忠情)과 신념에 목숨을 걸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4개월 전인 1591년 2월 13일 47세의 나이로 전라좌수사(정3품)에 부임해서 1년 이상 철저하게 전쟁 준비를 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육전에서의 거듭된 패배와는 달리, 이순신 장군은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한산도대첩 등 수많은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어 제해권을 장악하고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1593년 8월 15일 이순신 장군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관할하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고, 이후 4년여 동안은 명나라와 왜국과의 강화교섭으로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강화교섭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재침을 대비하여 군비 확장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삼도의 수군 병력은 날로 증가하였고 백성들도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1597년 정유년을 전후해 이순신 장군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가 두 곳에서 있었다. 하나는 원균과 조정 내의 일부 서인 세력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다시 일으켰을 때 미리 이순신을 제거하지않고서는 제해권을 장악할 수 없다고 판단한 왜군이었다. 원균 일파의 음모는 일단 논외로 하고, 왜군의 음모를 살펴보면 4년여에 걸친 명나라와의 강화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제2차 침략(정유재란)을 일으키려 작심했다. 당시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하인 가나메 도키스라(要時羅)를 내세워 조선 조정을 흔드는 이간책을 세웠는데, 그 내용을 보면“고니시는 가토를 매우 미워해 그를 죽이려고 한다. 가토가 머지않아 부대를 이끌고 부산포로 쳐들어 올 텐데 조선에서는 통제사를 시켜 수군을 이끌고 나가 싸우게 하면 쉽게 그를 잡아 목을 벨 수 있을 것이다.”라는 솔깃한 정보였다. 조정에서는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고, 그렇지 않아도 줄곧 이순신 장군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미워했던 선조는 마침내 이순신 장군에게 출전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반드시 적의 간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출전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은 왕명을 따를 경우 적의 간특한 꾀에 말려들어 조선 수군의 패망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피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수군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왕명을 거역한 죄로 자신이 사형을 당하고 말 것인가의 기로에서 고민을 했던 것이고, 마침내 그는 조선의 장래를 위해 군사를 움직이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1597년 1월 27일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었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옥에 갇혀 있을 때 옥리가 장군의 조카인 이분에게“뇌물을 쓰면 나갈 수 있다.”며 은밀하게 말해주자, 이 말을 전해들은 장군은 오히려 조카에게“죽게 되면 죽는 것이지, 어찌 도리를 어기면서 살기를 도모하겠는가!”라며 타일렀다. 이때 장군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우의정 정탁(鄭琢)은 목숨을 건 상소문(신구차:伸救箚)을 올렸고, 조정에서도 몇몇 중신들이 간언을 해서 장군은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옥에 갇힌 지 28일 만인 4월 1일에야 풀려나 도원수 권율의 막하에서 관직생활 두 번째의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에 목숨을 걸고 왕명을 거역한 것도, 또 죽기보다 더 치욕스러운 백의종군을 하게 된 것도 결국은 나라를 구하기 위한 하늘이 예비한 의로운 고난의 길이였던 것이다.

 

셋째, 이순신 장군은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에 맞서 싸웠다

 1597년 정유년 초 왜군은 14만여 명의 병력으로 제2차 침략을 일으켰으나 이순신 장군은 파직되어 옥에 갇혀 있었고, 새로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조정의 출전명령에 쫓겨 아무런 작전계획도 없이 부산포로 진격했다가 그해 7월 16일 칠천량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이순신 장군이 5~6년 동안 양성해 놓은 조선수군을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전멸시키고 말았다. 자신도 허겁지겁 피신했으나 왜군 병사의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고, 조선수군의 전함도 도주한 12척을 제외하고는 모두 격침되었으며, 수많은 병사들도 모두 전사하는 등 대참패를 당하여 남해상의 제해권도 상실되었다. 선조는 하는 수 없이 그해 8월 3일 백의종군 중에 있던 이순신 장군을 다시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였으나, 부임할 곳도 이미 적에게 빼앗겨 없어진 상태였고, 군사도 무기도 전선도 모두 불타 없어진 뒤였다. 그래도 장군은 원망하거나 선조의 교서를 거부하지 않고, 남해지방 수백 리 길을 돌아다니면서 패잔병을 모으고 흩어진 무기를 찾아내 군사 120명과 전선 12척, 말 4마리 분량의 무기를 수습해서 전열을 재정비해 나갔다.

 그런데 선조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 지 열이틀 만에 다시 교서를 내려“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에 합류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아직도 신에게는 12척의 전선이 있사옵니다(今臣戰船 尙有
十二). 죽을힘을 다해 싸우면 아직도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신이 죽지 않았으니(舜臣不死)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비장한 장계를 올려 수군 폐지론을 막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밀려드는 적의 대선단과의 사생결단을 하기 위해서 장소를 모색한 결과, 수적인 열세를 최대한 보완할 수 있는 지형적인 이점을 고려하여 울돌목(명량)으로 정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엄청난 열세와 직전 칠천량해전에서의 참패한 경험 등으로 장병들은 모두 겁에 질려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결전을 앞두고 장병들의 공포와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장수들을 모아놓고 준엄한 훈시로 필승의 각오를 다졌다.“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必死卽生),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生卽死)고 했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1,000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장수들은 오늘 살려는 생각을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긴다면 군율대로 시행해서 용서치 않을 것이다.”

 다음 날 9월 16일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13척(새로 1척을 건조) 대 왜선 330여 척! 이순신 장군은 13척의 전선으로 좁은 울돌목을 통과해 들어온 왜선 133척과 전투를 개시했다. 전투 초기에는 장군의 대장선이 홀로 맨 앞으로 나아가 적선 133척과 맞서 싸우는 등 자신이 말한 사즉생(死卽生)의 모범을 보임으로서, 도저히 싸울 수 없다고 모두가 포기한 전쟁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어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순신 장군도‘이 승리는 천행(天幸)이었다’고 일기에 적고 있으며, 통제사로 복직한 지 40여 일 만에 이룬 위업이었다. 명량해전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세계 해전사에서 길이 남을 대기록이 되었다. 40년 동안 이순신 연구에 매진해 온 김종대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명량해전은 이순신 장군의 내면을 가장 잘 보여준 전투로서, 오직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견위치명(見危致命)의 정신이 발현된 전투였다고 말하고 있다.

 

넷째, 이순신 장군은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했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로서 이전의 전투와는 성격이 다른 전투였다. 왜군은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조선에서 철수하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노량해전은 퇴각하는 왜군의 퇴로만 열어주면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될 전투였다. 만일 이순신 장군이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계산했다면 목숨을 건 전투를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명나라 장수 진린 도독은 왜군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주자고 이순신 장군을 회유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이 땅을 침략하여 무고한 수많은 백성들을 죽이고 능욕한 적들의‘적선은 단 한 척도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片帆不返).’며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1598년 11월 18일 왜군들이 철수를 하기 위해 모두 노량 앞바다로 집결하자, 그날 밤 이순신 장군은 조·명 연합함대를 이끌고 노량 앞바다로 진격해 갔다. 자정 무렵 이순신 장군은 홀로 갑판 위로 올라가“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此讐若除 死則無憾). 원컨대 하늘이시어, 천인공노할 죄를 지은 적들을 꼭 무찌르게 해주옵소서!”라고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11월 19일의 결전에서 조·명 연합수군은 크게 승리하였으나 장군은 적이 쏜 총탄에 맞아 54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장군이 남긴 마지막 말은“전투가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였다. 이 전투에서 적선은 총 500여 척 중에서 겨우 50여 척만 도주해 갔다.

 이와 같이 이순신 장군은 일생을 통하여 철저하게 비정치적인 참군인의 삶을 살았다. 장군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직 나라와 백성뿐이었다. 임금이나 대신들이 가진 정치권력에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적의 간계에 속아서 내린 왕의 출전명령을 거부한 일,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왕과 지배층이 수군을 몰살시킨 후에 뻔뻔스럽게 재임명 교서를 내릴 때 이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일, 왕명을 어겨서 죽음 직전까지 갔던 경험이 있었음에도 수군 폐지론이 나왔을 때 비장한 각오로 임금에게 다시 장계를 올린 일, 명량대첩에 따른 아무런 포상을 받지 못해도 서운함을 나타내지 않은 일, 명나라 진린 도독의 유혹을 물리치고 노량해전에 출전하여 대승을 거둔 일 등에서 장군의 올곧은 충심을 알 수 있다.

 장군은 평소에도“대장부로 태어나서 나라에 쓰이면 죽을 힘을 다해 충성할 것이요, 쓰이지 못하면 농
사짓고 살아도 족한 것이니, 권세 있는 자에게 아첨하여 영화를 누리는 것은 내가 가장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고 자주 말했다. 장군은 실로 우리 민족 역사에서 너무나 위대한 위인이었다. 명재상 류성룡이『징비록』에서 말한 것처럼‘하늘이 도와서’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영웅을 낸 것이다.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이순신을 발탁한 류성룡의 혜안과 충정도 역시 위대하였다.

 1905년 러·일 전쟁 때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크게 무찔러 세계적인 명장의 반열에 오른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자신을 이순신과 비교한 기자에게 화를 내면서,“나를 넬슨과 비교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교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라고 했다. 그리고 이순신을‘군신(軍神)’이라고 칭송하면서“만약 이순신 장군이 나의 함대를 갖고 있었다면 세계 해상을 지배했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영국의 해군 중장 G. A. 발라드는“위대한 해상 지휘관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할 만한 이순신 장군을 존재하게 한것은 신의 섭리였다.”고 했다. 따라서 이제 우리도 이와 같은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정신을 계승해서 오늘의 난국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정신은 우리 민족 기상의 영원한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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