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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칼럼]국가의 품격 높이려면, 갑을 관계부터 정리해야 한다

   
▲ 김주남
국가브랜드진흥원장(현)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현)
KOTRA 상임이사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어릴 적 할머니의 말 한 마디에 미래의 진로가 결정되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죽어서 하늘나라 가는 사람의 옷을 보렴. 주머니가 없지 않니? 하느님에게 가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가져갈 수가 없단다.”이 말은 욕심쟁이에서 베푸는 소년으로 생각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성직자로서 누구에게 봉사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귀감이 되었다. 이는 한국 방문시 보여준 꾸밈없는 서민적 행보에서 잘 알려졌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에게는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국가는 더 더욱 그렇다.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현장인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기념관에 가면 철학자 조지산타나야의 명언이 크게 각인되어 있다.‘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반드시 잘못을 반복하는 죄를 저지른다(Those who do not remember the past are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 전 인류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대표적인 직언이다.

  그러면 최근 우리의 상황은 어떨까? 과거의 잘못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일까? 과거 외국인에게 비춰졌던 한국의 모습을 소개한다. 영국의 왕립지리학회 최초 여성회원이었던 이사벨라 비숍 여사는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생생한 여행기록을 남기고 있다. 1894년부터 무려 네 차례나 조선을 방문하고는『한국과 그 이웃 나라』라는 책에 생생한 느낌을 남겨 놓았다. 비숍 여사는 조선의 뛰어난 자연경관에 매료되었음을 전하면서도 첫 번째 인상으로 서울 도성 안의 가난에 찌든 백성과 놀고먹는 양반계급을 소개하고 있다. 비숍 여사는 세계 많은 나라를 여행해 보았지만 조선의 양반처럼 말 위에서 고삐마저 잡지 않고 하인에게 시키는 나라는 없었다고 지적한다. 요즈음 사회적 이슈로 지적되고 있는 갑질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 볼 때다.

  선진국 관점에서 보면 우리 정부의 행정편의주의는 시민을 을로 보는 제도에서 비롯된다. 선진국에 비해 규제를 하는 창구도 많고 시민은 규제에 직접 노출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보면, 선진국 어디에서도 주민등록등초본이나 가족관계증명서, 인감증명 등을 요구하는 나라는 없다. 이런 서류를 발급해주는 주민센터나 구청이 없으니 당연히 이런 일을 하는 공무원도 없고 시민들이 내는 세금도 이런 곳에 사용하지 않는다. 유럽이나 미국에 주재할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사회보장센터에 가서 사회보장번호를 받는 일이다. 납세와 사회보장혜택을 받기 위해서 필요하지만 아무도 보여 달라고 할 수 없고 보여 줘서도 안 된다. 생년월일 같은 신상정보도 표시되지 않지만, 이 번호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다. 자동차면허국에 가서 이 번호와 나를 입증하는 서류(여권이나 한국 면허증의 공증)만 있으면 그 나라의 운전면허증을 발급해 준다. 운전을 못하는 사람은 ID로 사용할 수 있는 별도의 면허증을 발급해준다. 은행에 가서 운전면허증과 사회보장번호를 알려주면 계좌를 열 수 있고, 주소지가 있고 최소한의 신용만 있으면 신용카드와 마이너스 통장이 발급되고 신용이 쌓이면 대출도 가능해진다.

  선진국에서는 일반 시민이 직접 공공 부문의 규제에 노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납세자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반드시 회계사를 통해야 하고, 송사가 있으면 반드시 변호사를 활용해야 하며, 건물을 수리하거나 신축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건축사를 써야 하는 등 전문가를 활용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공무원은 이들 전문가들과 접촉해야 하기 때문에 자질도 향상되고 부조리의 발생 요인도 줄어들게 된다. 일반시민은 행정공무원들보다 당연히 법률지식이 부족하니 대항력도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행정 편의주의라는 레드 테이프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최근 IT 강국이라는 한국에서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공인인증서를 만들어서 IT의 세계화를 가로막는 사태가 발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숍 여사가 과거 양반질을 지적하였다면, 선진국에서 한국에 온 현대판 주재원들이 지적하는 사항에는 언제나 시민의 안전을 경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첫째로 꼽는다. 시민 중심의 교통문화와 질서는 국가 품격의 기본이다. 명품 도시에 가 보면 보행자에 대한 배려가 최우선이다. 인도 위로 자동차를 운행하고 있는 도시를 선진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인도와 건물 사이로 주차공간을 만들어 두고, 차량이 도로에서 인도로 주행하고 있다. 오토바이가 건널목과 인도를 질주하고 있지만 을의 관계에 익숙해 있는 일반시민들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어린이가 안전하게 보행할 수 있는지를 자문해 본다면 정답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음주운전 사고가 줄어들지 않고 있는 현상도 국가 품격을 현격하게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음주운전을 하다가 경찰에 적발되면 인생이 끝장난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음주운전 적발시에는 수갑만 아니라 발에도 족쇄를 채워서 연행하고, 재판을 진행하게 되면 변호사 비용과 보석금 등으로 수천만원을 기본 경비로 지출해야 한다. 자기 관리를 못하는 저급 인물로 분류되어 회사와 사회로부터의 따가운 냉대도 각오해야 한다.

  한편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적당한 갑질, 적당한 을질에 대한 호혜협력의 질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서 부패를 양산하는 나쁜 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나라에는 수천억 원대가 넘는 대형 비리사건이 자주 발생해서인지 웬만한 부패는 생계형 비리라는 용어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선진국의 경우는 조그만 비리부터 엄벌에 처하는 경향이 높다. 아무리 큰 부패라도 조그만 도둑질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도‘바늘도둑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미국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과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발표한‘2014년 세계 경제자유지수’보고서에서 한국을“지난 20년간 한국의 경제자유지수는 거의 정체상태를 보였는데, 그 이유는 자유무역, 투자자유화 등 시장개방 측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얻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패 문제, 공공지출관리 등이 점수를 갉아먹고 있다”고 지적했듯이 부패는 이제 국가 품격을 떨어뜨리는 최대의 적이다.

  최근 문화 부문에서 한류의 급성장으로 한국에 대한 국가 브랜드 인식이 높아지는 것과는 반대다. 양반과 하인의 시대에 존재했던 갑과 을의 관계가 현대에 와서는 형태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의 비리 유착관계로 다양해졌고, 비 온 뒤 독버섯처럼 확산되고 있다면 국가 품격을 올리기는 요원할 뿐이다. 과거의 잘못을 고치려고 생각을 바꾸지 않는 한, 선진국의 길은 멀어질 수밖에 없고 비굴한 을의 존재는 계속 확산되어 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제 새로운 역사를 쓰려면 우리 주변의 조그만 갑질과 차별적인 관행을 없애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남녀 차별, 이문화에 대한 배려, 사회 약자에 대한 배려 문제는 기본이고, 행정 편의주의에서 시민 편의주의라는 큰 틀을 마련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품격을 세계 속에서 높이는 진정한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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