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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소식 - 연길소식

연길의 명물 연길교

[인터넷 대한뉴스]

 

하남다리 즉 연길교는 지난 2010년 3월에 건설하기 시작해서 그해 12월에 개통됐다. 길이가 210m, 너비가 51m인 하남다리의 투자금액은 1억(인민페)원이다. 하남다리가 개통되던 날 연길시민들은 너나없이 기쁨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그만치 하남다리는 연길을 대표하는 상징물이자 조선족자치주의 경제 및 사회발전의 척도로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안주해왔기 때문이었다. 하남다리는 선통원년 즉 1902년 2월에 처음으로 건설됐다. 변무공정국(务工程局)에서 감독하고 건설한 이 다리를 연평교라고 불렀다.

연평교는 나무로 건설했는데 길이가 240m, 너비가 6m이었다. 지금의 다리보다 길이가 약 30m가 짧았다. 연평교를 건설하게 된 직접적 원인은 다음과 같다. 1900년대 초에 연길을 비롯한 룡정, 화룡 등 529개의 조선족마을에 7만여 명의 인구가 있었다.

당시에 연길시 푸르하통 하남안에는 조선족들이 개간한 논이 무연하게 펼쳐졌지만, 튼튼한 다리가 없어 수확물은 하북으로 운반하는데 몹시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다리를 놓을 필요성이 간절했으며, 1900년 7월에 짜리러시아군이 훈춘을 거쳐 연길로 들어올 때 소영에 주둔해 있던 청군과 백성들이 푸르하통하에 다리가 없어 제때에 철수를 하지 못한데서 많은 군인들과 백성들이 죽었다. 그래서 푸르하통하에 다리를 놓은 것이다.

 

1934년 여름에 나무로 만든 연평교가 홍수에 떠밀려갔다. 그리하여 연길 위만당국에서는 1935년에 연평교가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 다리를 놓았다. 다리의 길이는 여전히 240m였는데 너비는 12.9m로 늘어났다. 다리의 이름은 강평교였다. 그때 연집강에도 다리를 놓았는데 바로 공원다리다. 강평교는 그 설계와 시공을 모두 일본인들이 했다.

감독관은 모래에 흙이 들어가지 않나 혹은 원자재 배분이 틀리지 않나 속도가 느리지 않나 살폈다. 감독관은 장갑을 끼고 모래를 만져보다가 모래에 흙이 있으면 채찍으로 로동자들을 마구 때렸다. 어찌나 혹독하게 감독하고 때렸는지 로동자들은 이를 갈았다.

어느 날 감독관이 홀로 나왔을 때를 기다려 로동자들이 삽으로 감독관의 목을 찍었다. 그리고는 감쪽같이 기둥에 처넣고 시멘트를 부어넣었다. 그 기둥이 북쪽으로 세 번째 기둥이라고 한다.

 

강평교의 투자는 당시의 돈으로 17만원이 들어갔는데 연길시의 조벙어리가 8만원을 의연했다. 조벙어리는 말이 느릿느릿하고 꺽꺽거린다고 조벙어리라고 불리게 됐다. 조벙어리는 이름이 조광자(赵广滋)인데 남방에서 비단 500필을 들여와 팔아서 돈을 벌었다.

그 돈을 밑천으로 복장판매를 하고 콩기름 가공공장을 앉혔으며, 후에는 부동산을 개발하여 연길시의 갑부로 성장했다. 그래서 강평교를 건설할 때 흔연히 8만원을 의연했다. 강평교의 투자액은 당시의 돈으로 17만 2,000원이 들었다. 1945년, 시운(時運)이 기운 것을 눈치 챈 간도공서의 일본인들이 달아나기전에 한몫을 챙기려고 조벙어리를 간도공서로 불러들였다.

 

1986년도에 연길시의 인구가 급증하자 정부에서는 새로 다리를 앉히려고 했다. 그런데 다리가 어찌나 튼튼한지 알 수 없어 강평교 기둥 옆에 기둥을 더 세우고 다리를 확장했다. 다리의 길이는 240m로 변함이 없었으나, 너비는 22m로 넓어졌다. 다리의 명칭은 연길대교였다.

24년 뒤에 오늘날의 연길교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길이가 270m, 너비가 51m로 폭이 크게 늘어났다. 연길교는 양쪽에 각기 6개의 차도가 있고 인행도가 따로 있다. 다리는 두 마리의 기러기가 날아가는 듯 그 모습이 아름다워 연길의 자랑으로 되고 있다.

 

보다시피 푸르하통하에 놓인 연길교를 하남다리라고 명명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연길시민들은 옛날부터 습관적으로 연길교를 하남다리라고 불렀다. 연길시 북쪽에 시민들이 많이 사는 까닭에 다리가 남쪽에 있다고 해서 하남다리라고 부른 것이다. 하남다리는 그 넓이가 인구의 증장과 함께 넓어졌다. 도시 인구가 5만 이하일 때는 9m, 10만이 될 때는 12.9m, 20만을 넘으니 22m, 거의 50만에 육박하니 51m로 넓어졌다.

 

1949년 10월 16일, 이날은 하남다리(강평교)가 세워진 후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통과한 날이다. 연길시안의 5,000여 명 사람들이 연변의 여러 민족을 대표하여 중국인 민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국위원회 제1차 회의와 공화국창건의식에 참가하고 돌아온 주덕해를 옹위하여󰡒만세!󰡓를 외치면서 하남다리를 건넜다. 주덕해는 당시 연변지방위원회 서기 겸 연변전원공서 서기였다.

 

2000년대 후 부터는 개혁개방의 물결이 하남다리를 아예 밀어버렸다. 하남다리가 웅장하게 거듭났다. 하남다리위에서 자전거가 사라졌다. 인행도에서도 사람의 그림자를 별로 볼 수 없다. 하남다리를 포함하여 연길시안의 다리들에는 차량봇물이 터졌다. 그래서 다리들이 륙속 건설되었는데 푸르하통하 연길구간에만 8개의 다리가 건설됐다. 하남다리를 알면 연길을 알 수 있고 자치주의 발전을 알 수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중국 사회발전의 척도로도 된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4년 5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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