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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죽암그룹 창업자 우석 김세기

죽을 때까지 일해라! 일손을 놓는 것은 죽는 것이나 다름없다

죽암그룹의 창업자 우석 김세기 선생(1920년~2003년)은 고흥에 있을 때면 거의 집에서 저녁을 들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한숨 자고 밤 11시~12시면 일어나 맑은 정신에 붓을 들고 새벽 4시까지 공부를 했다. 다시 한숨 자고 아침 식사 후면 자전거를 타고 간척지를 돌았다. 얼마나 자전거를 많이 탔던지 1년이면 자전거 2~3대가 다 닳아 새로 사야 했다. 말씀대로 돌아가실 때까지 일했다. 그날도 농지를 돌아보다 자전거와 같이 넘어진 것이 이 세상과 이별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석 김세기 기념관에 있는 자전거를 보자 그 분의 체취를 느끼고 싶어 크락션을 누르니 빠앙~하는 소리가 그의 향취를 느끼게 한다.

   
▲ 김세기 선생의 끈기와 땀으로 이루어진 200만평 간척지의 전경과 고흥주민이 세워준 공덕비

죽암농장에 있는 김세기 기념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어머님 돌아가신 1주기를 앞두고 쓴 글이다.‘성리학 대학자의 따님이자, 선비인 남편의 아내로 갑자기 곤궁해진 살림을 맡아, 낮이면 남의 밭을 메고 밤이면 바느질품을 판 어머님의 수고로 우리 가족은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봄이 되면 쑥 뜯어 된장 무쳐 먹고 물을 마시며 배를 채우셨고 가을이면 콩잎을 뜯어 국을 끓여 배를 채웠지요. 오호 통재라 어머님 얼마나 울으셨는지요. 얼마나 배를 주리셨는지요…. 영영 못 올 곳으로 가신지 어언 일주기가 되었기에 어머님 영위 앞에 무릎을 꿇고 통곡하옵니다.’폭이 족히 2m는 됨직한 한지에 구구절절이 베인 어머님에 대한 효와 그리움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었다. 올해 들어 새로 단장한 기념관에는 간척지 개간에 대한 역사와 일기장과 붓글씨 그리고 의복 및 생필품이 같이 진열되어 주경야독하던 그 분의 일생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우석 김세기 선생
1920년생 경상남도 산청이 고향이다. 의성 김씨 문전공 동강 14대 손으로 아내 배을식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평생을 고군분투했다. 내 집 식구뿐만이 아니라 마을을 그리고 국가를 생각했다. 일제시대 일본인이 수없이 막으려다 실패하고, 많은 이들이 손댔다가 실패한 간척지 개간 사업을 이루었다. 고흥 간척지사업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이것이다 싶었던 그는 물불 안 가리고 모든 자금을 쏟아 부었으나 빚만 늘자 1차 실패하고, 인천으로 가서 5년간 토목사업으로 번 엄청난 자금을 다시 간척지에 투자해 10년 만에 개간에 성공한다. 그간 집안 식구들의 만류에 주변 사업가들도 하던 사업 그냥 하면 대재벌이 될 텐데 왜 그러냐며 극구 말렸지만, 그 누구도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심지어 심한 태풍으로 그간 일구어 놓은 것이 다 휩쓸려 다시 물바다가 되고 기계가 갯벌에 빠져 꼼짝 못할 때도 그는 낙담하지 않고 그만의 방법을 동원해 기계를 건져냈다. 절대적으로 식량이 부족하던 때라 200만평의 농지를 만들고도 성에 안 찬 그는 삼천리강산 전국 가로수를 유실수로 심어 지나가다 배고픈 이들이 마음껏 따먹을 수 있게 하는 꿈도 꾸었었다. 매일 밤 붓글씨 써가며 사서삼경을 공부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란 그의 자녀들은 장남 종욱은 고려대 지질학과, 종동은 고려대 역사학과, 종신은 연세대 전기공학과, 큰딸 현숙은 성균관대 도서관학과(대학원 이화여대 역사교육과)를 나왔다. 일기장의 한 대목이다.

‘인생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일까? 물질적으로 잘 사는 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우선 인생관이 없고, 철학이 없고, 문학이 없고, 인생윤리학이 없고, 도덕이 없어서 문제이다. 돈, 돈 번다고 무슨 짓이라도 한다면 생활이 윤택해지는 길은 될지언정 사람답게 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주영 회장과의 일화
이제는 고인이 된 두 분이지만 그 분들의 향기는 아직도 대한민국에 여전하다. 정주영 회장이 서산간척지를 만들 때의 일이다. 온갖 현대화된 건설장비를 써도 거센 물살에 제방설치물들이 바로 쓸려가 버려 물길을 막을 수 없었던 정 회장이 고흥의 소식을 듣고 그의 경험과 지혜를 듣고자 찾아온 것이다. 죽암간척지 둑을 만들 때 돈은 없고 제방을 쌓아야 했던 김세기 선생은 그 누구도 그간 하지 않았던, 참나무로 리어카 80개를 맞추었다. 그 리어카 위에 장정 6명이 붙어 돌을 올린 후 리어카 채로 바다에 던져 둑방 기초작업에 성공했다. 둑을 막으려 많은 궁리를 했던 김 선생은 예전 우리 선조들이 둑을 만들 때 배에 돌을 싣고 가 구멍을 내서 물에 빠트린 방법을 이야기하자 그 말을 들은 정회장이 폐유조선을 가라앉혀 물길을 막아 서산간척지를 개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두 분의 성격이 맞아 가까워지며 현대건설의 일류 엘리트들이 죽암간척지에 와서 김 선생에게 배우고 갔다.

모함을 받았지만 전화위복이 되다.
고흥주민들의 숙원사업이었던 간척지 매립을 막대한 자금과 노력을 들여 어렵게 성공한 후 주변 이웃들에게는 100~300원의 싼값에 분양해 그 일대 주민들을 부농으로 만들었다. 김세기 선생의 가까이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40년을 모신 송하국 씨는 그리움에 눈이 젖고 목소리가 잠기며 말했다. “회장님은 남하고 많이 다르셨습니다. 열심히 살면 그 대가는 반드시 온다고 항상 말씀하셨죠. 여러 가지 많은 일 중 몇 가지를 말씀드리면, 간척지사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자 그것을 빼앗으려던 작자가 당시 고흥 국회의원인 신형식 의원에게 투서를 했습니다.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에 와서 사기를 치고 지역에 엄청난 해악을 끼칠 것이니 수사를 하여 구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신 의원이 고흥경찰서에 직접 전화하여 수사를 지시하였고 고흥경찰서 수사과장이 직접 수사를 하며 회장님 수첩을 압수하여 내용을 검토 했습니다. 수첩에는 공자, 맹자, 논어 등 사서삼경에 나오는 명언과 또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공부를 더 해야 할 문구로 가득 차 있었고 당신의 생각과 뜻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수첩을 다 읽은 수사과장은 회장님을 신념과 철학이 있고 오히려 애국자며 존경할 분으로 신 의원님이 도와주시는 것이, 고흥과 국가에 도움이 된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일로 신 의원님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습니다. 또 거의 자전거를 타시지만 가끔 일이 있을 때면 자가용도 이용하셨죠. 차를 깨끗이 닦아 모시고 가는데 막 논에서 나오시는 진흙투성이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어디 가시는 길이냐며 차에 태우셨죠. 제가 지저분해진 차를 보며 뭐라고 하니 회장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자네, 차가 중요한가 사람이 중요한가’라고 하셨어요.

주민이 세워 준 공덕비
2002년 4월 마을주민들은 김세기 선생의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벽해(碧海)가 상전(桑田)으로 변한다는 것은 천재지변으로나 이루어진 변동이요 인력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 사전에도 덧없는 일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요 근래에 이곳 고흥군 강동면 죽암항 푸른 물결이 넘실대던 바다 천여ha가 상전으로 조성된 기적이 이룩되었다…. 이것으로 인하여 죽암간척지 주변 수백호 주민은 이곳 개답(開沓)을 영농(營農)함으로써 소득이 증대되고 생활이 향상되니 어찌 우석 김세기 선생의 공덕을 잊을 수 있으랴! 이 지역에 기여한 공이 지대하도다. 이에 주민 스스로의 발의로 성금을 모아 이곳을 기적으로 만든 선생의 공덕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이 공덕비를 세우다.’

   
 

취재후기
김세기 기념관의 물건 하나하나에서는 정취가 묻어나 마치 내 부모님의 손길을 느끼는 듯했다. 가난하고 헐벗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했던 그 분의 큰 사랑이 느껴져서일까? 1900년 대 어려웠던 시절 우리 어른들의 어떤 마음가짐과 노력이 지금과 같은 경제성장을 이루었는지 너무 자랑스러워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매일 밤 당신 자신을 돌아보며 잘못한 일이 없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3번을 돌이켜보셨다는 말씀은 꼭 배워 실천하고 싶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여러 언론매체의 인터뷰 요청을 받을 때면 본인은 한 일도 별로 없는데 송구하다는 장남 김종욱 회장은, 그럴 때마다 아버님이 더 그립고 어머니 같은 누님, 그리고 잘 따라주는 여러 형제들이 고맙다며 아버님 어머님을 그리는 글을 지었다.


부모님께 바치는 글

2014년 추석을 앞두고 햅쌀을 거두며 부모님이 더욱 그리워 제 마음을 올립니다.

김종욱 올림


자연의 고마움과 위대함을 알아

순리대로 사신 아버지

주경야독하시며 공부하신대로 실천하신 아버지

사서삼경의 좋은 글귀를 매일 밤 적으시며

그에 비추어 당신의 행적을 돌아보고

잘잘못을 가리며

철저히 옛 성현들의 말씀에 따르셨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정말

축복이고 감사합니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잘 몰랐습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가족회의를 여셨지만

아버지의 뜻을 굽히시지도 않았고

다른 가족의 의견을

듣지도 않으셔 원망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자리가 너무 그립습니다.

결과보다는 노력하는 과정을

중히 여기는 아버지께서는

제가 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생각하는 힘과

소신대로 말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셨던 것입니다.

‘니 돈벌어서 뭐할끼고’하시며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정직하게 돈을 벌어야 함과

더불어 사는 삶을 일깨워주셨던

아버지 존경합니다.

의성인 문정공 동강 김우용 14대 손으로

선비집안의 예를 잊지 않아

지극정성으로 부모님을 모셨으며,

형제간에 우애 있으라는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부모님은 항상 저희들 곁에 계실 줄 알았는데...

너무나도 그리워 가슴으로 부모님을 그려봅니다.

하늘에서 저의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면

다음 생에도 꼭 당신의 자식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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