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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비 보수공사 완료



용산구가 최근 ‘심원정 왜명강화지처비(이하 강화비)’ 보수공사를 완료했다. 비석을 들어 올려 화강석 지대석을 놓고 주위에 울타리를 두른 것. 주민들이 강화비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문구로 안내판도 세웠다.


강화비는 조선시대 비석으로 약 1.7m 크기다. 지금으로부터 425년 전, 즉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당시 명군과 왜군 사이에 있었던 화의(和議) 결정을 담았다.  주변 설명 없이 ‘심원정 왜명강화지처(心遠亭 倭明講和之處)’란 아홉 글자만 음각돼 있지만, 그 의미는 상당하다. 16세기 말 동아시아를 뒤흔든 국제전쟁사를 여기서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1592년 봄, 왜군은 전쟁 개시  한 달 만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용산 등을 본거지 삼아 작전을 벌였다. 하지만 평양성 전투와 행주대첩에서 패한 뒤 한양 이북에 있던 왜군은 모두 용산 일대로 퇴각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는 각각 현재의 원효로4가, 갈월동 일대에 주둔한 채 한양의 혹한기를 보냈고 결국 후방 철수를 위해 명을 상대로 화의를 요청했다.


1593년 3월부터 화의 논의가 본격화됐고 명나라 유격장군 심유경과 고니시의 강화회담이 이어졌다. 당시 회담 장소가 용산강 일대였고 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정자 아래 강화비가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단 심원정은 임난 이후 건립된바 비석 역시 조선시대 후기 어느 시점엔가 만들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사료 부족으로 인해 더 정확한 고증은 어렵다. 비석이 지정문화재가 아닌 향토문화재로 관리되는 이유다.


유성룡이 쓴 ‘징비록’에 따르면 조선 조정은 퇴각하는 적을 섬멸코자 했으나 명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했다. 조선이 빠진 채 애매하게 진행된 화친은 결국 4년 뒤 정유재란으로 이어졌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1598년에 가서야 전쟁은 모두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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