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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대한뉴스 인연실화-사)한국역술인협회 지창용 전 회장의 예언으로 맺어진 이팔호 경찰청장과 본지 김원모 발행인과의 인연

대한뉴스 인연실화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길잡이가 될 김원모 발행인의 인연들을 소개한다.

“사람들은 때가 되면 모두 빈손으로 떠난다.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부지런하고 정직하게 다음 생을 떠올리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편안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받을까 보다 내가 어떻게 도와 줄까를 생각하며 사는 게 행복하다. 시간이 가면서 누구에게 보고싶은 사람, 그리운 사람으로 남는 것 또한 인생의 보너스가 아닐까.”
- 인연 실화 ‘ 가난과 외로움이 나의 재산이었다’ 본문 중에서 대한뉴스 발행인 김원모


)한국역술인협회 지창용 전 회장은 당시 이팔호 경찰청 과장에게 팔호! 나는 얼마 못 살 것 같으니 나 대신 김원모 아우와 상의하게라고 당부했고 당시 경찰청 기자였던 김원모 발행인(이하 김 기자)에게 아우! 이팔호 이 친구는 경찰총수의 사주를 가지고 태어났으나 혼자서는 어려우니 자네가 나 대신 길잡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이렇게 시작된 두사람의 인연이 몇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호형호제하며 서로 귀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팔호 청장은 국가 치안총수인 제10대 경찰청장을 역임했으며 예리한 판단력과 빈틈없는 추진력을 갖춘 정통적인 수사· 형사통으로 알려졌다. 조직에서는 공정한 인사와 원만하고 합리적인 성격으로 직원들의 두터운 신망을 받은 반면 개인적으로는 상대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거나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다.

1968년 순경으로 투신해 1970년 간부후보 19기로 33년 만에 경찰총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며 퇴임 후에는 국회의원 공천 제의를 받았으나 '경찰로서 치안총수까지 하고 내 할 일 다 했으면 됐지 무슨 욕심을 부리나' 며 자리를 마다한 요즘 세상에 흔치 않은 사람이다.

그가 청장으로 부임한 충남지방경찰청을 비롯해 부산지방경찰청, 서울지방경찰청이 전국경찰평가에서 1위부터 상위권의 순위를 차지하여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 주인공이기도 하다. 또한 DJ정부 시절 대통령은 경찰청 순시 때 이팔호 청장의 몇차례 보고를 받은 후 그를 치안총수로 입명했다.


청장님, 지창용 씨는 어떤 분인지요?

일본정치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로서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참 많이 하셨는데 인간적으로는 매우 소탈한 분이며 한국역술인협회 회장을 26년 역임했죠. 5·16 때 박정희 장군은 날짜를 518일 로 잡아 놓고 지창용 씨를 찾아갑니다. 워낙 비밀스런 거사였기에 그 당시 장군은 차에서 기다리고 참모진이 그를 뵙고 논의를 하니 날짜를 이틀 앞당기라고 해서 5·16이 된 것입니다. 일반 역술인과는 아주 다른 분이었죠. 사주뿐만이 아니라 풍수지리에 능해 대통령께서 직접 헬기를 내주며 전국을 돌아보고 경부고속도로 맥을 잡도록 했으며 국립묘지, 서울대 관악캠퍼스. 용인경찰대학 등 국가의 주요 자리는 그 분이 다 터를 잡았죠. 또 이병철 회장은 임원 면접시에 그 분을 꼭 모시곤 했죠

 

청장님, 경무과장 시절 김 기자는 어떤 기자였는지요?

그 당시 경찰청 출입기자들 대단했습니다. 기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특종과 한 줄의 진실을 찾는 사람들이기에 김 기자는 포근할 때는 참 포근하면서도 취재할 때보면 아주 냉정했지요. 또한 경찰과 기자들 간에 중간 역할을 참 잘했습니다. 그래서 방송 기자들과 중앙지 기자들 가운데 일부는 형이라고 많이 따랐습니다.

 

서울경찰청 경무과장 시절에 경찰직을 그만두려 했었나요?

, 누군가 경무과장으로 오기로 내정되어 있었는지 이런저런 압박이 자꾸 들어와 사표를 쓰려 하는데 김 기자가 상관과 주변 한두 사람 때문에 그만둬서야 되겠냐"며 적극적으로 말렸죠. 지금 생각해봐도 김 기자의 조언은 항상 옳았습니다.

 

이팔호 청장- ‘나에게 태양은 하나다

김대중 대통령 집권 시 차기 대통령은 노무현과 이회창의 대결이였다. 대통령 선거 한 달을 앞두고 김 기자는 경찰청장실을 방문해 공적이 아닌 사적으로 말씀드리겠다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30분만 독대를 하겠느냐고 청장에게 말을 하자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김 기자에게 나에게 태양은 하나뿐인 데 뭐 또 말을 갈아타느냐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당시에는 대다수의 국민 70~80%가 한나라당 이회장 후보가 대권을 잡는다고 할 때이다.

 

당시 치안총수로서 만나볼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랬는지요?

당연한 거 아닙니까. 김대중 대통령은 아주 합리적인 분이셨습니다. 인사를 하려면 지연, 학연이 많이 작용할 때인데 충청도 시골 촌사람인 저를 치안총수 자리에 앉히고 길을 열어 주신 분 입니다.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말고 여태까지 해온 소신대로 일 처리 하라구요. 순경으로 들어와 최고통치권자에게 인정받고 경찰의 수장을 했으면 됐지 뭐 더 다른 것을 바라겠습니까.

발행인은 덧붙여서 말한다. "제가 그 자리를 주선하는 것인데 단번에 거절을 하시니 섭섭했지요. 마음은 많이 아쉬웠지만 형님, 정말 멋있고 경찰로서 믿음직스러웠습니다."

 

글을 몰라 무면허로 경운기 운전을 하던 어르신들에게 꿈을 주다

김 기자는 충청 지방취재 도중 경운기와 접촉사고가 났다. 김 기자가 가해자고 경운기가 피해자인데 파출소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뀌었다. 김 기자는 할아버지께서 피해자인데 왜 가해자로 되있느냐고 묻자 경찰은 할아버지가 무면허이기 때문에 그리 되었다고 했다. 김 기자는 당시 충남경찰청장인 이팔호 청장을 만나 이 일을 들려주었다. 이 청장은 규약을 검토했다. 경운기도 소형면허증이 있어야 하는데 어르신들이 글을 몰라 거의 무면허이기 때문에 각 경찰서장에게 하명하여 구전으로 필기를 대체하고 실기시험을 봐서 면허증을 발급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민원인이 원하는 바를 찾아 주었다.

 

그 당시 몇 명이나 이런 식으로 면허증 발급을 했는지요?

충남지방경찰청에서만 한 700 ~ 800, 부산에서 수백 명 그리고 서울지방경찰청에서도 그 일을 했으니 면허증 받은 사람이 수천 명은 되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할아버지가 자다가도 일어 나서 면허증을 보고 또 보기에 할머니가 그리도 좋으나고 묻자 내 평생 국가자격증은 처음이라며 기뻐했다는 미담도 있었습니다.

 

선물, 일생에 잊지 못할 배려

추석이나 설을 앞두고 청장은 김 기자가 전화해 청장실에 잠깐 들러달라고 했다. 김 기자가 청장실에 가자 포장도 뜯지 않은 몇십개나 되는 선물들을 차에 실어주었다. 김 기자가 무엇이냐고 묻자 청장은 "김기자는 아는 사람은 많지만 돈이 없잖아. 이거 가져가서 써" 라고 답했다.

 

발행인과는 어떤 인연이며 청장님이 보는 발행인은 어떤 사람 인지요?

글쎄 어떤 적당한 말이 있을까 그저 대단한 사람이라고 밖에남에 대한 배려를 잘하며 사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조언을 구했는데 한 쪽에 편중되지 않고 사물이나 현장을 넓게 보고 깊게 생각해서 내게 보탬이 많이 되었죠. 답답한 일이 있어 물으면 세상을 보는 안목이 있어 방향제시를 잘해준 해결사에요. 그리고 항상 말과 행동이 같은 변함없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발행인은 좋은 자리에 있을 때보다는 퇴직하고 난 뒤에 정을 나누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장님도 퇴직 후 가슴에 담을 어떤 선물이 있었는지요?

현직에 있을 때는 청장실에 한번 오라고 전화를 하면 취재거리 있느냐고 먼저 묻고 지금은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으니 퇴직할 때가 갈께요라며 안왔습니다. 그러더니 퇴직한다는 말도 안했는데 퇴직하는 날 느닷없이 와서 , 고생했어요. 축하합니다.”하며 선물을 주는 겁니다. 의외였습니다. 롤렉스 콤비 시계를 가져왔는데 나는 평소 시계를 잘 차지 않으니까 그것이 비싼 시계인 줄 몰랐어요.

 

발행인은 왜 떠나는 분에게 비싼 선물을 하였는지요?

형님과 만나 식사하고 약주 할 돈을 몇 십년 모으니까 시계 하나가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이건 형님껍니다.”하고 드렸습니다.

이팔호라는 이름은 제게 큰 언덕이고 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팔호 청장님이 퇴임할 때, 그간 내 마음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준 고마움에 대한 보답으로 선물했습니다.”

 

취재를 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두 사람의 우정이 참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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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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