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은 냉면 마니아였다? Yes! 매운 것을 싫어하는 고종(1852~1919)이었지만 냉면만큼은 맛있게 먹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그는 겨울밤이면 야참으로 냉면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고기 육수에 편육, 배, 잣을 올려낸 '왕실 냉면'은 뜻밖에도 궁중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대한문 밖에서 사 온 것이다. 냉면을 사랑한 왕은 또 있다. 임유한의 '임하필기'에는 순조 (1790~1834)의 냉면 이야기가 나온다. 순조는 야심한 밤에 달구경을 하다 군직자들을 시켜 냉면을 만들게 한 후 같이 먹었다고 한다. 냉면은 다이어트에 좋다? Yes! 냉면다이어트는 일반 식사가 한 끼에 800Cal 내외인 점을 감안했을 때 한 끼를 냉면으로 먹으면 300~400Cal 줄일 있다는 데 착안했다. 실제 양념과 건더기의 종류 및 양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보통 100g을 기준으로 냉면은 400~550Cal 정도다. 물냉면이 가장 칼로리가 낮고 비빔냉면, 칡냉면, 회냉면 순서다. 같은 양의 메밀국수 칼로리는 물냉면의 30% 수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비빔냉면은 염분이 많아서 고혈압 또는 심장병 환자의 다이어트식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냉면은 20세기 음식
인간은 언제부터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었을까? 아이스크림의 역사는 무척이나 오래됐다. 고대 중국인들이 눈과 얼음에 과일즙을 섞어 먹었다는 것이 가장 오랜 기록이다. 옛 이집트나 바빌론에서도 설탕을 친 과일을 얼려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동양의 푸른 중앙초원에서는 목축과 농경 생활을 함께했다. 중국 사람들은 기원전 3000년경에 눈과 과일즙을 섞어 만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고 한다. 또 공자 시대에 석빙고를 사용하여 얼음이나 눈을 보관했다는 기록도 있다.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알렉산더 대왕은 꿀과 과일즙, 우유로 만든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노예들이 산에서 가져온 눈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히포크라테스는 그의 환자들에게 얼린 음식(Frozen Food)로 식욕을 돋워 주었으며 1세기경, 네로 황제는 포도주에 과일 섞은 것을 알프스산에서 가져온 얼음에 얼려 먹었다. 아이스크림이 유럽에 알려진 것은 1295년부터이다. 1292년 마르코 폴로가 중국으로부터 돌아와 물과 우유를 얼려 만드는 법을 유럽에 전했다. 중국 북경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마르코 폴로는 1292년 <동방견문록>에서 중국에서 즐겨 먹던 프로즌 밀크의 배합 비법을 북부 이탈리아에 전파했
우리 식으로 주세법을 만들어 발전시켰다면 현재 우리 술의 위상은 어느 정도일까? 얼마 전 韓·日 정상 만찬장에서 사용된 술 ‘경주법주 초특선’이 우리나라 고유의 청주가 아닌 일본 청주인 ‘사케’(さけ)라며 양조업계와 주류 전문가들이 지적했다. 경주법주 초특선은 우리 청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점점 알코올도수가 낮아지는 이유가 TV 광고를 할 수 있어서라는데 경제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봤다. 주류면허지원센터는? 주류공업의 발전과 주세행정의 합리화와 근거과세를 위한 기술지원으로 세정의 과학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설립된 국세청 소속하의 중앙연구행정기관이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주류를 국세청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나라도 일본의 영향을 받아서 주세행정 체계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1909년 10월 1일 舊 한국 정부 탁지부 소속 양조시험소가 창설됐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1949년 6월 재무부 소속하에 양조시험소 설치, 1966년 3월 국세청 발족에 따라 국세청양조시험소로 개편, 그 후 2010년 12월 국세청 주류면허지원센터로 기구를 개편하고 2015년 10월 제주 서귀포 청사로 이전했다. 설립된 이래 100년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MZ세대들에게 1960년대는 어쩌면 그저 낯설거나 혹은 관심 밖의 시대일 수도 있겠다. 1960년대는 도시화, 산업화로 대변되는 시대다. 특히 1962년 국가가 주도했던 산업육성정책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처음으로 실시되면서 농촌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사람들이 끊임없이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광복 직후 서울의 인구는 80만명 정도였으나 1960년 서울의 인구는 240만명을 넘어서게 된다. 1960년대 이후 서울의 성장은 우리나라 도시화의 과정을 거의 지배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도시화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도 1960년대 이후이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는 이촌향도(離村向都)의 물결이 밀어닥 치게 된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도시인구의 비율은 1966년에 34%, 1970년에 41%로 늘었다. 1966~1970년 동안의 서울의 인구중가는 매년 평균 40만명 이상에 이르렀고 이는 우리나라 전 체 인구증가의 76%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재건운동의 유행으로 젊은 남녀 '재건데이트' 유행 1963년에는 시골 어린이가 배가 고파서 술도가의 술 찌꺼기를 얻어먹고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책상 앞에서
(대한뉴스 조선영 기자)=1950년대 중반 출간된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은 대학교수의 부인인 선영이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사교춤을 배우며 내용이 전개된다. 주부로서 집안 일밖에 모르던 그녀가 자유를 꿈꾸며 세상 밖으로 나서게 되고 곧 젊은 남자와 불륜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선영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남편이 용서하면서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작품은 마무리된다. 이 소설은 당시 여성단체로부터 '여성을 모욕하고 미풍양속을 해치는' 작품이라며 고발을 당했지만 10만부가 넘게 팔려나가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1956년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개봉했다. 소설 '자유부인' 은 장안의 화제와 비난을 한 몸에 받았지만 당시 성도덕 관념의 변화 등 당시 사회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당시 자유부인 선영이 비난을 받았던 것은 가정주부가 외간 남자와 불륜에 빠졌다는 설정에 있었지만 그보다 큰 원인은 춤(맘보)에 있었다. 미풍양속과 어긋나는 춤바람이 났고 외간 남자와 정분이 났기 때문이다. 춤을 허락해 주세요 1935년 축음기 보급은 30만대를 넘어서고 레코드의 보급이 춤바람을 몰고 왔다. 1937년 잡지 <삼천리>에 일본레코드회사
(대한뉴스 안상훈 기자)=과거에는 전화 교환수를 통하지 않으면 전화를 걸거나 받을 수 없었다. 전화교환원이라는 직업은 우리나라에 전화가 들어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 전화가 들어온 것은 1902년 3월 20일에 대한제국 통신원에서 지금의 서울인 한성과 인천 사이에 전화를 임시로 설치하면서부터다. 당시 전화는 전화를 걸면 통화하고 싶은 사람과 바로 연결되는 방식이 아니었다. 자석식이라고 해서 전화기의 핸들을 돌리면 교환원이 나오는 것과 공전식이라고 해서 전화기를 들면 교환원이 나오는 방식이었다. 이 둘 모두 중간에서 전화를 연결해줘야 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이 일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바로 전화교환원이었다. 1971년이 되자 전화교환원 없이 전화를 건 사람이 직접 다이얼을 돌려서 상대방과 통화할 수 있는 자동식 전화가 개통되었다. 이후 자동식 전화의 출현과 더불어 1987년 이루어진 전국자동교환망의 완성으로 전화교환원 없이 전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전화교환원이라는 직업은 사라지게 됐다. 그 시절 전화사업이 시작된 초기의 전화교환원은 대부분 남성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에 여성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고객을 응대할 때 밝고 명
(대한뉴스 김건기 기자)=매일 무심하게 수없이 드나드는 도로에도 이름이 있고 고개를 들어 쳐다보면 무수한 건물에 간판이 걸려있다. 간판에는 세월, 문화, 주인장의 신념이 담겨있다. 얼마만큼 오래됐는지,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지역의 특산품이 무엇인지, 주인이 그 일을 소중하게 여기며 치열하게 일하는지를 읽을 수 있다. 최근 남산 돈가스, 해운대 암소갈비집 등 기존 업체 또는 신생 업체까지 자기네가 원조라며 홍보하는 통에 당최 어디가 원조고 맛집인지 알 수가 없다. Q 00 원조집은 어디예요?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은 저 음식을 굳이 줄까지 서서 기다리며 사 먹을 일인가 싶다고 한다. 하지만 여행객들은 그 지역에 자주 가는 것도 아니고 잘 모르기도 하니 일단 유명한 곳부터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00 원조집은 어디예요?”라고 묻는다.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처음 시작한 사람’이다. 원조 감자탕, 원조 돼지국밥, 원조 맛집 등 자기네가 원조라며 원조 간판이 넘쳐난다. 그러다 보니 끊임없는 원조 논란이 된다. 최근 서울중앙지법 민사62부(부장판사 이영광)는 부산에 있는 해운대암소갈비집이 서울에서 해운대암소갈비집이라는 상호로 식당을 운
'긴 더 밤 고운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이 노래는 지금도 대중들 사이에 종종 불리는 가요 '아침이슬' 가사의 앞부분이다. 김민기가 작사. 작곡하고 양희은이 불렀던 이 노래는 친근한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로 1971년 발표 당시 많은 이들의 인기와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4년 뒤 당국에 의해 '시의에 맞지 않는다' 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방송부 적격 판정을 받아 금지곡 목록에 오르는 일이 발생했다. 그 이면에는 노래 가사보다는 작곡자 김민기의 언행이 권력층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지금처럼 표현의 자유가 신장되고 민주화가 진척돼 가는 상황 아래에서는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사실이지만 과거 우리에게는 그런 암울한 시대가 있었다. '왜색' 이유로 '동백아가씨' 금지곡 낙인 정부 수립 후 이미 대중가요심의제도가 마련됐었지만 본격적으로 금지곡이 양산된 때는 1961년 5 · 16 군사정변 이후였다. 당시 권력층은 건전한 국민정서의 함양과 명랑한 사회분위기 조성, 공공질서 문란과 퇴폐풍 조 조장 방지, 청소년 선도 등을 명분으로 대중음악에 대한 강도 높은 심의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권력층에
‘목돈을 위해 저축을 하겠다' '살과의 전쟁에서 확실하게 개선가를 부르겠다', '연애에서 결혼까지 꼭 성공하겠다', '담배를 끊겠다' 등 야심찬 계획을 세운 적이 있는가? 그러나 누구나 최고의 소망으로 꼽는 것은 따로 있다. 모든 계획을 가볍게 제치고 늘 굳건히 1위를 차지하는 '건강하기' 가 바로 그것. 다양한 장수 비법으로 건강하게 사는 법을 알아보자. 풍부한 사교성이 장수의 시작 살을 에는 바람에도 열심히 걷는 사람들. 1주일에 2시간만 걸어도 치매가 올 위험성이 35%나 줄어든다는 보도에 여기저기 걷기 운동이 한창이다. 누구에게나 간절한 건강과 장수의 꿈. 과연 오래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국 미시간대학교의 한 연구단체가 노년 부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최소한 1년에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베푸는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사람보다 더 오래 살 확률은 60% 더 높다고 한다. 또 건강심리학저널은 결혼생활이 도움된다고 말한다. 결혼생활을 10년 이상 유지하면 수명이 늘어나는데, 이는 결혼하면 위험한 행동을 저지를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 명 이상의 친구와 교제를 유지하면 치매 발생비율이 26% 낮아지며, 독신자는 배우자와 행
(대한뉴스 정미숙 기자)=1928년 4월 22일 버스가 등장했다. 경성부가 일본 이시가와지마 조선소에서 만든 '우즈레' 라 불리는 12인승 상자형 버스를 도입한 것. 정원은 22명이었으며, 차비는 구역별 7전으로 책정했다. 경성부에서 버스를 운행했기 때문에 '부영버스'라 불리던 버스는 경성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낯선 이동 수단이라는 점도 눈길을 끌었지만, 그보다 '뻐스 걸' 이라 불렸던 여차장들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경성 사람들의 러시아워를 책임졌던 버스 여차장들은 종일 자동차 소음과 매연 그리고 성마른 승객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버스의 개통에 발맞춰 경성 부영버스 회사에서는 여차장을 모집했다. 응모 자격은 15세에서 20세 미만의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미혼 여성으로 조선에서 최초로 선발된 여차장은 모두 12명이었다. 6.2:1의 경쟁률을 뚫어야 여차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업무는 고되었지만, 여성의 사회활동에 제약이 많았던 당시에는 인기 있는 직업 가운데 하나로 1930년에는 7명의 여차장을 뽑는데 99명이 지원해서 14.1:1의 경쟁률을 보였다. 하루에도 수천 번 '오라이' 와 '스톱'을 반복하는 여차장은 코발트 빛 정복을 입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