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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그 이름을 기억하라 독립운동가

역사 속에 가려진 대한의 여전사들 남자현과 박차정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광복을 위해 싸우고 헌신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정신으로 이룬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여성 영웅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단순히 후방에서 남성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무기를 들고 전선에 뛰어들거나 자신의 몸을 던져 일제에 항거했다. 그중에서도 '여자 안중근'으로 불린 남자현 의사와 중국 대륙을 누빈 조선의용대의 여전사 박차정 의사의 숭고한 생애와 투쟁은 우리 역사에 깊이 새겨져야 할 위대한 발자취이다.

 

 

최초의 여성 무장투쟁단체 대원, 여자 안중근 남자현

 

1872년 경상도 안동에서 태어난 남자현은 남편을 의병 전투에서 잃은 뒤 홀로 아들을 키웠다. 그리고 47세, 세상이 '아녀자'에게 기대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만주로 떠났다. 서로군정서에 가입한 그녀는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하며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렸고, 만주 일대에 교회 12곳과 여자교육회 10여 곳을 세워 여성 계몽에도 힘썼다.

 

혈서로 쓴 독립의 호소와 마지막 의열 투쟁

 

남자현 의사의 투쟁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일화는 1932년 국제연맹 조사단 파견 당시의 일이다. 국제연맹 조사단이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녀는 왼손 무명지 2절을 잘라 흰 천에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썼다. 잘린 손가락 마디와 함께 이 혈서를 조사단에 전달하여 조선 민족의 강렬한 독립 의지를 국제 사회에 호소하고자 한 것이다.

 

이듬해인 1933년, 60세를 넘긴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동지 이규동 등과 함께 주만주국 일본 전권대사이자 관동군 사령관인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2월 말, 거지 노파로 변장하고 무기와 폭탄을 숨긴 채 정탐 활동을 하던 중 밀정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남자현 의사는 6개월간의 혹독한 고문과 옥중 생활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15일간의 단식 투쟁을 벌인 끝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이미 건강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 하얼빈의 한 여관에서 임종을 맞이하게 된 그녀는 유복자 아들 영달(김성삼)에게 중국 화폐 248원을 건네며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게 하라." 이어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숭고한 말씀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얼빈의 사회 유지와 중국인 지사들은 그녀를 '독립군의 어머니'라 부르며 존경의 마음을 담아 남강외인묘지에 안장하고 입비식을 거행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녀의 공로를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총을 든 여전사, 박차정

 

경남 밀양의 한 야산에는 '약산 김원봉 장군의 처 박차정 여사의 묘'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묘의 주인은 남성들 사이에서 직접 총을 들고 전선을 누비던 여전사이자 항일 무장 투쟁의 최선봉에 섰던 박차정 의사이다. 그녀는 짧지만 불꽃 같은 삶을 조국 광복과 여성 해방에 온전히 바쳤다.

 

1910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난 박차정은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일제의 무단 통치에 비분강개한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그 슬픔은 분노가 되었고, 분노는 행동이 되었다. 18세부터 항일운동에 뛰어든 그녀는 근우회 핵심 간부로 서울 11개 여학교의 만세 시위를 배후에서 지도하다 검거되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해 의열단에 가입하고, 의열단장 김원봉과 혼인한 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서 비밀 공작법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활약했다. 1938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을 맡아 직접 전선으로 나섰다.

 

곤륜산 전투의 총상과 순국

 

1939년 2월, 중국 장시성 곤륜산 전투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하던 중 박차정 의사는 어깨에 총상을 입게 된다. 이 부상은 그녀의 건강을 치명적으로 악화시켰다. 총상 후유증과 오랜 지병인 관절염으로 고통받던 그녀는, 광복을 불과 1년 앞둔 1944년 5월 27일 중국 충칭에서 3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오랫동안 사회주의 계열 활동 이력 등으로 인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순국 50여 년이 지난 1995년에 이르러서야 그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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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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