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이야기 '멘델스존'

2014.11.05 14:45:02

클래식의 엄친아, 멘델스존

청명한 가을, 결혼식이 참 많은 계절이기도 하다. 결혼식의 마지막에 신랑신부의 퇴장곡으로 유명한‘결혼행진곡’이 금지된 적이 있었던 사실을 아십니까?

결혼행진곡의 작곡가인 멘델스존은 슈베르트, 베토벤, 모차르트 등 우리가 흔히 아는 이 작곡가들처럼 천재적인 음악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음악을 하고 행복한 삶을 살진 못했다.

반면에 멘델스존은 좋은 가정환경에서 태어났고 부모님께 인정받으면서 천재적인 음악성을 펼칠 기회를 가졌다. 그래서인지 그는 다른 작곡가들의 곡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40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삶을 산 그의 음악세계로의 여행을 한번 떠나보자.

야콥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리
(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의
유복한 어린시절

 

   
 

멘델스존은 북부 독일 함부르크에서 1809년 유태계 집안에 태어났다. 할아버지 모제스는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유명한 철학자였다. 그리고 아버지 아브라함은 유능한 은행가이며, 그의 어머니 리어는 영문학, 불문학, 이탈리아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선생이었고,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여러 가지 재능은 엄마에게서 온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9세 때 처음으로 연주회에 나가 사람들의 갈채를 받은 멘델스존은 예쁜 누이동생과 함께 피아노를 배웠고, 그리스어와 이탈리아어,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등 각국의 언어에 능통했다. 그리고 그림에도 재능이 있어 그의 수채 풍경화의 솜씨는 아마추어의 범주를 벗어날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천재성과 그를 비교하기도 하는데, 모차르트는 생계를 위해 연주여행을 다녀 자신을 알렸고, 멘델스존은 집에 전속 오케스트라가 있을 정도의 유복한 집안이어서 공개연주를 하지 않아도 되었던 복많은 천재였다.


멘델스존의 초기 음악
  멘델스존이 12살에 작곡한 초기 현악 교향곡을 보면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의 음악을  따라간 흔적이 보이는데, 이 작품들은 주로 그의 가정에서 연주했기 때문에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가 죽은 뒤에 출판되었다.


  1825년 파리 음악원장인 케루비니의 권유로 음악가로서 세상에 나갈 결심을 굳히고 로시니, 알레비, 마이어베어 등의 음악가와도 사귀고, 1826년 베를린 대학에 입학하여 문학과 고전 언어학 공부도 하였다. 이 해에 셰익스피어의‘한여름밤의 꿈’을 위해 서곡을 썼는데, 17세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멘델스존이 살려낸 바흐의‘마태수난곡’
  젊은 시절 멘델스존은 요한 세바스찬 바흐 음악에 매료되어 있었다. 당시 바흐의 작품은 거의 잊히고 있었는데, 1829년 20세 때‘마태수난곡’의 초연 100주년 기념으로 자신이 지휘해 상연하였다. 그의 스승이 보관하고 있던 악보의 일부와 자신의 집 하인이 푸줏간에서 사온 고기의 포장지에서 발견한 일부로 완성시켜 연주 당시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거장의 음악이 장엄하게 울려 퍼지자 그 자리에 있던 청중들이 모두 뜨거운 감동으로 눈시울을 적셨다고 전해진다. 그 후로 바흐의 음악은 재평가되고 많은 것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데, 이에 큰 공헌을 한 이가 바로 멘델스존이고,‘바흐 이전의 음악은 음악이 아니다’라는 극찬을 받게 만들었다.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그레이트’
  멘델스존은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토마스 교회의 초라한 합창 지휘자이자 오르간 연주자였던 바흐의 위대함을 알리고자 애썼다. 슈베르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노력했는데 그이유는 그는 괴테를 만나고 싶어 했던 슈베르트에게 항상 괴테가 편애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 그레이트는 슈베르트가 죽은 뒤 슈만이 슈베르트의 서고에서 찾아낸 악보를 멘델스존에게 전달해 그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셰익스피어의‘한여름 밤의 꿈’

   
   한여름밤의 꿈

 멘델스존이 괴테로부터 선물 받은‘한여름 밤의 꿈’을 처음 읽은 것은 17살 때인 1826년이었다. 환상적인 희곡에 반한 멘델스존은 즉시 멋진 서곡을 작곡했다. 17년 뒤인 1843년, 프러시아의 빌헬름 4세는 연극‘한여름 밤의 꿈’공연 때 연주할 극음악을 만들어 달라고 멘델스존에게 요청했다. 서곡, 요정의 행진, 결혼 행진곡, 광대의 춤 등 12곡으로 이루어진 이 음악은 17세 때 완성한 서곡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장장 17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서곡은‘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다른 곡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멘델스존의 작품 중 가장 사랑받는 곡 중 하나이다.
  셰익스피어의‘한여름 밤의 꿈’의 무대는 고대 아테네다. 줄거리가 비슷한‘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이지만,‘한여름 밤의 꿈’은 희극으로 서로 사랑하는 헤르미아와 뤼산드로스는 부모의 반대를 피해 숲속으로 도망간다. 요정의 세계, 귀족의 세계, 서민의 세계가 복잡하게 얽히며 꿈과 환상이 펼쳐지고, 사랑하는 세 쌍의 남녀가 결혼하는 것으로 끝난다.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창설
  멘델스존은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설립을 기획하여 노력하던 중 작센 왕으로부터 자금을 얻어 실현시켰다. 그 자신이 피아노와 작곡을 가르치는 것 외에 슈만이 피아노와 작곡을, 하우프트만이 음악 이론을, 다비트가 바이올린을 맡는 등 쟁쟁한 교수진을 갖추고 1843년에 개교했다. 이 음악원은 독일 음악의 새로운 중심지의 하나로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누이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멘델스존의 죽음
  1847년 평생 사이좋게 지내던 누이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고 상심한 나머지 시름시름 앓던 멘델스존은 여섯 달 후인 그해 11월 누이의 뒤를 따라 세상을 하직했다. 그녀의 갑작스런 죽음이 그에게 회복되지 못할 충격을 주었던 듯 남매의 정이 워낙 두터웠던 탓에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혼자 살아갈 힘을 잃고 38세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기자뒷말
  음악가로서는 보기 드문 혜택 받은 환경에서 자란 멘델스존의 음악은 행복감에 넘치고 균형과 조화  가  잡힌 작품들은 따뜻한 인간적 공감을 불러일으켜 듣는 이에게 안정감을 준다.


  멘델스존은 우아한 용모와 세련된 사교성 덕분에 귀족들의 모임에 다투어 초대되었고, 그의 연주회는 항상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잘난 척 하지 않고 항상 남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한번은 런던에서 베토벤 3중주곡을 연주하는데 피아노 악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다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악보가 굳이 필요 없었지만 다른 책을 거꾸로 놓고 한 친구에게 옆에 앉아서 악보를 넘기는 시늉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냥 연주하면 다른 두 연주자가 그가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려는 것이라고 오해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멘델스존은 유태계였지만 기독교로 개종하고 독일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나치시절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의 동상을 녹이고 결혼행진곡을 금지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19세기 낭만파의 대표작곡가라 다시 인정받지만 말이다.


  우리가 결혼행진곡에 발맞춰 퇴장할 때를 한번 돌이켜보자. 그때는 내 옆에 그 사람이 제일 멋지고 제일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렇게 팔짱을 끼고 함께 넘어온 세월의 고개를 돌아보고 지금 그때를 생각하며 서로 손을 잡고 ‘사랑한다, 고맙다’고  한번 말해보는 건 어떨까.

 


대한뉴스(www.daehannews.kr/) - copyright ⓒ 대한뉴스.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PC버전으로 보기

㈜대한뉴스 | 03157 서울시 종로구 종로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1007-A | Tel : 02)573-7777 | Fax : 02)572-5949 월간 대한뉴스 등록 1995.1.19.(등록번호 종로 라-00569) | 인터넷 대한뉴스 등록 및 창간 2014.12.15.(등록번호 서울 아03481, 창간 2005.9.28.) 발행인 겸 편집인 : 김원모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혜숙 Copyright ⓒ 2015 대한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