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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일반

광활한 러시아의 겨울풍경, 그 안에 서정적인 낭만을 노래한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 1880년도 차이코프스키 초상화

광활한 러시아의 겨울풍경,
그 안에 서정적인 낭만을 노래한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해마다 차이코프스키의‘호두까기인형’발레공연이 열린다. 그 배경이 크리스마스고 이야기가 동화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그 맛을 더 하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때의 단골 공연이 된 것이다. 추운 겨울은 싫지만 그의 음악과 생크림이 가득한 뜨거운 핫쵸코를 마실 수 있는 겨울이라면 상상만 해도 감미롭다.
지금부터 올 겨울을 좀 더 아름답게 느낄 수 있도록 아름다운 러시아 겨울 풍경을 떠올리며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으로 여행을 함께 떠나보자.

법무성관리직을 그만두고 음악을 택한 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러시아 우랄지방 보트킨스크에서 광산기사였던 아버지와 음악을 좋아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치고 어학 쪽에도 재능을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매우 음악을 좋아했고, 음에 민감한 재능을 보여 10세에 작곡을 하기도 했으며, 특히 피아노를 좋아했다.

  그도 여느 작곡가와 마찬가지로 부모들의 반대로 인해 1852년 12세 때 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에 입학을 했고 1859년 졸업과 동시에 법무성에 취직하면서 음악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생활이 안정된 관리생활을 그만두고 1862년 22세 때 새로 열린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들어가 이 학교의 교수 잘램바에게서 작곡법을 배웠다. 루빈슈타인에게 관현악법을 배웠는데 우수한 성적으로 음악원을 졸업한 차이코프스키는 루빈슈타인이 1865년에 개교한 모스크바 음악원 원장이 되자 그 학교의 화성학 강사로 38세인 1878년까지 재직했다. 당시 모스크바음악원으로 불렸던 이 음악원이 현재의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으로서 전통이 있는 러시아 최고의 음악학교가 되어 있다.

그의 음악세계
  차이코프스키가 20대였던 1860년대에는 러시아의 민족주의 음악파인 러시아5인조의 영향으로 국민악파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나 30대 중반 이후로는 말 그대로 낭만파, 즉 낭만주의 경향의 곡을 작곡해 동시대의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영향을 러시아에 알렸다. 그래서 국민악파가 강했던 러시아에서는 발표하는 곡마다 혹평이 이어졌다. 말년에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유럽을 다니며 연주를 해 러시아에서보다 많은 인기를 얻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세계
피아노협주곡 1번 내림나단조

  1874년부터 1875년에 걸쳐 작곡한 곡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의 루빈슈타인 학장을 위해 만든 곡이다. 하지만 루빈슈타인은 서정적인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세계와 맞지 않다며 대폭 수정을 요구했고 자존심이 상한 차이코프스키는 독일의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뷜러에게 연주를 부탁해 보스턴에서 뷜러의 초연으로 성공을 거두자 3년 뒤 루빈슈타인이 사과를 했다고도 전해진다. 가장 대중적이고 화려한 시작이 차가운 겨울 하늘과 멀리 눈이 쌓인 산을 떠올리게 하는 곡이다.

발레곡 ‘백조의 호수’,‘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속의 미녀’
  1875년에 작곡한‘백조의 호수’는 발레곡으로 1877년 볼쇼이 발레단에 의해 초연됐지만 형편없는 발레안무와 무대로 실패하자 차이코프스키는 다시는 발레곡을 작곡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12년 만에 다시 발레곡‘호두까기인형’을 작곡했는데 첼레스타라는 새로운 악기로 사탕요정의 춤을 표현하기도 했다. 또 1890년에는‘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작곡했다. 이 두 발레곡 또한 관객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지만 모두 차이코프스키 사후에 큰 인기를 얻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의 발레가 유명하게 된 것도‘백조의 호수’가 지속적으로 공연을 한 이유 중 하나다.

마지막 작품 교향곡 6번 ‘비창’
  이 곡은 1893년에 작곡하고 그의 지휘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곡이 대중의 인기를 얻지 못하자 원래 표제가 없던 곡이었는데‘비창’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그리고 9일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비극적인 곡의 분위기를 그의 죽음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되었고 어떤 지휘자는 차이코프스키의 유언과도 같다고 말했다.

  시작 1악장부터 우울과 슬픔이 들려오고 4악장에서는 그의 인기를 보여주는 듯한 화려함과 웅장함이 마지막처럼 들리지만 곡은 끝나지 않고 러시아의 장례풍습인 손으로 관에 모래를 던지는 소리가 저음의 현악기로 표현되며 끝이 난다.

차이코프스키의 여인들
  1868년, 첫 번째 여인 데지레 아르토는 오페라 가수로 그녀가 모스크바에 연주여행을 왔을 때 차이코프스키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여 구애했으나 그녀는 이듬해에 바리톤 가수 파디라와 결혼하고 말았다.

  두 번째 여인은 음악원의 제자였던 밀라코바였다. 그녀와 1877년 7월에 정식으로 결혼했으나 1주일간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별거생활로 들어가 그대로 이혼해 버리는 불행한 사태를 초래했다.  당시 동성애자라는 소문에 힘들어하던 그는‘아무나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며 밀라코바와 사랑 없는 결혼을 했고 이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까지도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결혼생활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느껴 한때 건강이 몹시 나빠지기도 했다.

  세 번째 여인은 그야말로 운명의 폰 메크 부인이다. 철도업을 했던 부호의 미망인인 그녀는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사랑하여, 1876년부터 14년간에 걸쳐 그에게 매년 6,000루블(당시 한화 가치 6,000만원)에 가까운 돈을 원조하였고 두 사람의 교제는 1,200여 통의 서신왕래만으로 그치고 평생 서로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차이코프스키보다 9살의 연상의 여인이였고 이들의 사랑을 진정 음악계의 플라토닉 러브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폰 메크 부인의 이름을 부르며 운명했다.

차이코프스키의 무덤
  1893년 53세의 나이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러시아는 물론이고 인기가 많았던 서구유럽의 팬들이 모두 애도하는 가운데 성대하게 국장으로 치러졌다. 성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 묘지에는 수십 명의 러시아 저명 음악가의 무덤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차이코프스키의 무덤은 한층 두드러지게 호화롭다.

기자뒷말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에 대해 많은 설이 있다. 콜레라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러시아의 음악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비소를 물에 타서 마시고 자살을 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 이유는 차이코프스키가 당시 시대상에 가장 금기시되던 동성애자로 알려지면서 비밀재판이 소집되어 그에게 명예로운 자살을 하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또 그의 장례식에서 이마와 손에 키스를 하도록 했었다는 기록은 콜레라로 인한 죽음에 의문을 더했다. 그리고 그의 정신적인 사랑이었던 폰 메크부인이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원조와 일체의 서신을 끊은 것도 자살의 큰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화려하고 힘도 있지만 여성적인 선율의 서정성이 돋보이는 곡이 많다. 당시 민족음악과는 거리감이 있어 작곡하는 곡마다 혹평이 이어졌지만 지금은 어느 작곡가 음악보다도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의 음악에서 러시아의 칼바람을 이겨내지 못할 연약함이 아름다움으로 느껴질 때가 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화가 화려함으로 폭발하는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음악을 들으며 기자는‘차이코프스키, 당신의 음악은 최고입니다!’ 라고 소리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