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대한뉴스]
30여 년 전 두 사람은 경찰과 기자라는 사회인으로 만나 각자 다른 현실에서 살아가면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눴다. 그들 사이에는 재물이 많고 적음도, 직위가 높고 낮음도 없었다. 요즘은 금방 만나도 친구라고 할 정도로 친구라는 말도 흔하고 또 헤어지면 원수가 되는 경우도 있다. 송병무(68) 경위(전 파출소장)와 발행인의 27번째 인연은 ‘우리는 친구 아이가!’ 라는 말이 얼마나 정답게 느껴지고 소중히 여겨지는지 평생지기 벗이 된 사연을 소개한다.
송병무 소장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나 군대를 전역하자마자 경찰이 되었다. 한때는 무술유단자로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하다가 경기도 광주경찰서 서부파출소 및 5~6곳의 파출소 소장을 지내면서 ‘지역주민이 원하는 지역주민을 위하는 경찰상’ 소리를 들으며 퇴직했다.
현직 근무 시절에는 얼마나 조용했는지 관할 내 업소에서 부하 직원을 소장으로 알고 정작 송 소장은 경찰로 안보고 소장인 줄도 모를 정도였다. 그저 지역민과 잘 어울리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였다. 왜냐하면 주는 것 받지 않고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적발하기보다 선도해서 옳은 길로 가게 하는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항상 내가 경찰이기 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고 지역의 주민이란 생각으로 특별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사람들의 속내를 들으려고 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송 소장이다.
봉사 속에 꽃핀 향기로운 만남
송 소장이 경기도 광주경찰서 서부파출소(현재 하남시)에서 근무하고 있던 어느 날 30대 초반의 젊은 기자(발행인)가 방문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사회부 기자이며 옆의 비닐하우스에서 장애인들과 같이 생활하고 있는 김원모입니다.” 송 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예.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두 사람은 차한잔을 나누며 이야기를 나눴다.
“발행인이 장애인 11쌍을 합동결혼식 시켜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처음에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당시 서부파출소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장애인 부활교회 비닐하우스에는 20여 명의 장애인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가락시장에서 바닥을 기어 다니며 수세미 장사를 하거나 다리 밑에서 ‘한 푼만 주세요~’라며 구걸하는 사람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생계를 꾸려갔다.
아침에 눈만 뜨면 파출소 앞을 지나다니니 직원들도 그들과 자주 마주치곤 하여 장애인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송 소장은 당시 모시고 있던 서장님께 부탁하여 주례로 세우고 발행인과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며 신접살림에 필요한 전자제품, 옷, 이불, 그릇 등 어떤 것은 새것을 어떤 것은 쓰던 것을 후원받아 살림을 마련해주고 결혼식을 올려줬다.
또한 부활교회가 있던 곳은 그린벨트 지역이었다. 어느 날 군청에서 비닐하우스를 철거해야 한다며 단속반이 들이닥칠 때였다. 비닐하우스 입구에 시선을 사로잡는 문구가 있었으니 ‘부탁드립니다. 이곳은 많은 장애인들의 보금자리입니다.
법에 의해 철거를 꼭 하셔야 될 것이나 하시더라도 단속 대상에서 맨 마지막에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서울지방경찰청 출입기자 김원모’ 하고 신분증을 복사하여 같이 붙여 놓았다. 군청 직원들은 단속하러 왔다가 파출소에 찾아와 문의했다.
그럴 때마다 발행인은 ‘다른 곳으로 이사할 곳을 찾으면 바로 옮길 테니 당분간 봐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또 누가 무슨 고발을 했는지 경기도 성남지청에 접수되어 비닐하우스에 살고 있는 장애인이 몇 차례 조사를 받았다.
멀쩡한 기자라는 사람이 장애인과 같이 생활하며 그들을 대변하고 있으니 혹시 장애인들을 이용해 앵벌이를 시키거나 착취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오해가 있었던 것이다. 검찰에선 훌륭한 기자가 있다며 서울지방 경찰청에 통보하였다. 경찰청에서는 ‘경찰의 날’에 내부무장관상, 본청장상, 서울청장상을 출입기자단에게 수여하는데 발행인은 내무부장관상을 받았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송 소장은 말한다.
“발행인은 후원금이든 먹을 것이든 장애인을 보고 가져오는 것인데 건강한 사람이 관리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장애인이 몸은 불편해도 정신은 괜찮고 얼마든지 할 수 있다며 장애인들 스스로 돈 관리를 하도록 조직과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부활교회 장애인들은 돈 관리를 직접하고 목사 월급도 장애인이 줬습니다. 규칙은 오늘 이시간까지 적용되고 있습니다. 당시 김갑순 전도사는 교회 안살림을 맡았고 발행인은 뒤에서 그림자처럼 바깥 살림살이에 신경 썼습니다. 또한 직접 음식재료를 구해 와 그들과 찌개를 끓여 격의 없이 같이 먹는 모습은 참 감동이었습니다.”
이런 일로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은 자연스레 우정이 시작되어 30년을 넘긴 것이다.
발행인이 본 송 소장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위인 참 좋은 친구죠. 계절은 춥고 더울 때가 있는데 마음자리가 늘 한결같고 따듯하고 깊어서인지 복도 많습니다. 부인이 영화배우를 무색케 할 만큼 뛰어난 미모를 갖췄고 슬하에 1남 1녀를 뒀는데 머리가 좋아요. 아들은 고대를 졸업하고 삼성그룹 회계사로 근무하고, 딸은 한양대를 졸업한 재원이랍니다.”
이어 발행인은 말한다.
“송 소장이 돌봐 준 사람 참 많죠. 그 중 간질병 환자이면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노숙자가 있었어요. 송 소장은 그를 위해 블록으로 집을 지어주고 보살펴주었죠. 잦은 데모진압 출동으로 송 소장이 겨를이 없는 사이 노숙자가 방에 불을 지피다가 발작해 화상을 입고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사망했습니다.
그 때 송 소장이 얼마나 울던지... 남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송 소장 후배의 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인데 아이의 아빠가 가정을 돌보지 않아 엄마가 근근이 생활하고 있었죠. 그런데 아이 엄마가 축복받지 못한 네 번째 아기를 낳은지 3일 만에 아이 아빠가 죽었어요.
그 가족을 거둠은 물론 거리의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발견해 보호해주다가 떨어지지 않아 아내에게 오해를 받은 일, 룸살롱에 취직한 어린 여자를 집에 돌아가도록 선도하던 중 그 여자가 맹장 수술을 받게 돼 비상금을 털어 도와준 일, 부산에서 가출한 18세 여자아이를 아무데서나 재울 수 없어 단칸방이었던 집에서 재웠다가 다음 날 아내의 지갑이 없어졌던 일, 돈 한 푼 생기지 않는데 저와 함께 장애인 합동결혼식에 발품 팔고 다닌 일 등 생활이 윤택해서 펼친 봉사활동이 아니라 그저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많은 봉사를 한 사람입니다.”
송 소장이 본 발행인
송 소장은 우리와는 많이 다른 친구라며 운을 뗀다.
“하루는 발행인이 전화를 걸어와 ‘여보게 친구, 선·후배 대여섯 명 데리고 그리로 갈 테니 계곡에 좋은 장소 있으면 알아봐 주게’ 라고 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북부검찰청 강력 검사였고 다섯 명은 경찰대 2, 3, 4기 출신들이었어요.
검찰청 강력 검사는 강했고 경찰의 형사반장, 수사반장 직책을 가진 그들의 나이는 20~30대의 젊은 혈기에 법대로 하는 친구들이라 검사와 많이 부딪혔나 봐요. 검사와 경찰 사이에 중간 다리를 놓아 화해의 자리를 만든 겁니다. 현재 서울경찰청 외사과장, 형사과장 등 높은 직위에 있어요. 2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들과 호형호제하는 모습을 보면 발행인은 정말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라며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 받은 일에 대해 풀어 놓는다
“광주경찰서 정보계장으로 근무할 때입니다. 중부파출소(남한산성) 소장 시절 알았던 방범위원 중의 한 사람이 법을 어겨 구속됐어요. 그가 특별면회를 부탁하자 정 때문에 모른척할 수 없어 믿고 면회를 시켜줬더니 그만 도망가 버렸습니다.
경찰서가 난리가 났죠. 발행인에게 전화했습니다. 발행인은 대검찰청 관계자와 함께 저를 찾아와 자초지종을 듣더니 그에게 부탁하길 ‘이 사람은 내 친구다. 성남지청장에게 부탁하여 당분간만 처벌하지 말고 봐 달라.’ 하니 대검찰청 관계자는 상황 설명을 듣고는 기다려주게 되었고, 도망간 사람은 6개월 만에 다시 구속되어 그 일은 무사히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또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발행인이 인천경찰청 이헌만 청장을 만나는 자리에 제게 같이 가겠느냐며 물어 함께 갔습니다. 발행인이 친구라고 소개하자 청장은 ‘아! 송병무 씨.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라며 악수를 건네요. 그리고는 참 좋은 친구를 두었다며 밥을 샀습니다.
경찰청 본청 수사국장실을 갔을 때도 ‘송병무 씨’냐고 웃으며 친절하게 맞아주었습니다. 군대로 치면 일등병이 장군의 이름을 알 수는 있어도 별을 단 장군이 그 많은 사병 이름은 특별한 연유가 없는 한 잘 모르잖아요. 헌데 치안 총수가 제 이름을 알고 있다니 놀랬습니다. 직위를 떠나서 친구라고 떳떳이 이야기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발행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대하는 것이 똑같습니다.”
20여 년 세월이 흐른 후 어느 날 발행인이 송 소장에게 본인은 어떤 사람인지 물었단다.
“사실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양파 껍질처럼 까면 깔수록 새로운 모습이 자꾸 나오니까요. 처음에는 다른 기자들처럼 경찰 업무에 대해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기사화하는 것은 아닌지, 나에게 뭘 바라는 것은 없는지 했지만, 점점 만나다보니 진실성이 보이는 것이 일반 기자와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퇴직해서 가진 것도 줄 것도 없는데 한결같은 모습을 보면서 ‘왜 나한테 잘해줘?’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우리는 친구 아이가!’ 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기자가 송 소장에게 물었다. “발행인과 생각나는 추억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제가 있던 곳이 시골 파출소이다 보니 계곡에 가서 옷을 다 벗고 동심으로 돌아가 물장구치고, 참외, 수박을 먹으며 놀던 일이 생각나네요. 어떤 때는 거만해 보이기도 하는데 같이 시간을 보내면 시골 사람보다 더 시골스러운 소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특히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아요. 하하하~”
친구란 무엇인가
발행인은 말한다. “친구지간에는 직위가 높고 낮음도 재물의 많고 적음도 필요치 않습니다. 때로는 스승 같기도 아우 같기도 한 동료이며 부모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내가 받는 것보다 친구를 위해 마음을 쓸 수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친구는 상대가 무슨 실수를 하거나 평소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상한 점이 보이면 좋지 못한 일이 있는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병원에도 데려갈 줄 알아야 합니다. 몸이 불편하다고 손가락, 발가락 다 자르면 몸뚱어리만 남지 않겠어요. 요즘은 친구라고 말해 놓고 돈에 친구를 파는 일은 없는지 권력에 따라 친구를 바꾸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봤으면 합니다.”
취재 후기
발행인은 오랜만에 친구가 온다고 회사 내 주방에서 떡국을 끓이느라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걸쭉한 육수에 전복과 닭다리 살을 넣어 국물이 뽀얗게 우러난 떡국이 완성됐다. 직원들과 모두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데 송 소장은 기자에게 속내를 내비쳤다. “발행인이 원래 요리를 잘합니다. 갖은 채소를 썰어 넣어 만든 강된장 맛이 일품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대한뉴스 ‘회장’인데 주방에서 음식은 그만했으면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발행인이 말했다. “때로는 자연에서 더 큰 공부를 배웁니다. 올챙이 시절을 간직한 사람은 추억이 많아도 그 시절을 잊고 사는 사람은 추억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 소중한 인연들에게 봉투 만들어 줄 돈은 없고 서툴지만 내 마음을 담아 음식을 만들어서 대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친구가 ‘음식 그만하라’는 말에 참으로 대책이 없는 답변이지만 그 덕분에 직원들은 맛있는 떡국을 먹은 날이다. 친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더 새겨본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4년 3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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