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대한뉴스] 글 박혜숙
미술계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사)한국미술협회(이하 미협) 조강훈 이사장이 취임 후 국제조형예술협회(IAA) 재가입 쾌거를 이뤄내 미협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은 국민이 신뢰를 보내는 것처럼 미협 이사장은 미협 전국 3만여 명 회원의 투표로 뽑혀 4년간 미협을 이끄는 대통령인 셈이다. 우리나라 미술문화와 미협의 미래를 위해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화폭에 옮겨 창조하는 예술세계는 무엇인지 고양시 덕이동에 자리한 작업실을 찾아 이야기를 들어봤다.
국제조형예술협회(IAA)란?
미협은 사단법인이지만 유네스코와 NGO에 가입되어 국가를 대표하는 단체다. 1961년 출범하여 전국 15개 시·도 지부에 서양화, 한국화, 조각, 공예, 디자인, 서예, 문인화, 불화 등 모든 장르를 포함한 16개 분과 3만 8천여 명이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IAA는 1954년도 창립하여 총회를 열며 세미나를 통해 세계 미술인의 친목과 정보교환, 세계 미술계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미협이 IAA에 가입한 것은 1962년도, 유네스코 세계총회를 한국에서 가졌는데, 이때 아프리카 대표가 마침 직업이 화가였고 그가 한국 미술문화의 대표와 함께 단체에 가입하자고 말하면서 첫발을 내디뎠다. 한국은 2백여 가입국 가운데 가장 많은 3만여 회원을 보유한 나라다. 일본이 5천여 명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1992년 서울에서 IAA 총회를 개최하였다. 1966년 일본 도쿄대회 이후 동양권에서 열린 대규모 국제미술인 대회였다. 그 후 한동안 미협은 세미나 불참과 회비 미납으로 3년간 제명당했으나 올해 슬로바키아 총회에서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도움으로 만장일치 재가입에 성공했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전했더니 미협이 그렇게 큰 단체인 줄 미처 몰랐다고 하더군요. 12월 5일 미술인의 날에 아시아·태평양회의를 진행하고 싶으며 내년에는 세계총회를 한국에서 개최할 수 있도록 정부와 시 관계자들과 협의하여 발로 뛰며 미술문화를 대표하는 장소를 물색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예정입니다.”
문화는 세계를 하나로 묶는 역할, 대정부 차원의 도움은 큰 힘
미술인의 복지부문
“회원간의 소통, 국민과의 소통, 협회와 정부간의 소통 그리고 기업간의 소통 등 미협이 발전하려면 공정미협, 열린미협, 실천미협 등 여러 가지 가운데 미술인의 복지부문도 매우 중요합니다. IAA에 가입되어 있기에 미협 회원은 루브르 박물관 등 세계 유명 박물관을 비롯하여 미술관 출입이 무료인데 국내에서는 혜택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 기초복지 차원에서 처음으로 예술인 패스카드를 가지면 국립미술관, 박물관 무료입장이 가능하게 됐습니다.”
천막시장 아트마켓, 새로운 미술문화 선도할 미술시장
“작가들의 작품값이 비싼 연유로 국민 또는 애호가들로부터 외면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원로를 비롯한 중진작가의 작품을 폭넓게 알리고, 신진작가를 발굴하며, 나아가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한국미술을 체험하는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정부의 도움이 있어 시와 협의하여 천막시장 아트마켓을 가을에 시작할 예정입니다.
정형화된 미술관을 탈피해서 관객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천막을 치는 장소가 어디든 그곳이 바로 아트마켓이죠. 현대와 전통미술의 만남, 스카프·넥타이·쥬얼리 등 아트상품을 개발하고 전시해 일반 시민들이 손쉽게 적은 것 하나라도 부담 없이 사고, 현장에서 작품 하는 모습도 지켜보고 그림도 배우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문화가정이 많아지는데 외국 관광객에게 한국미술을 체험하고 소장하면 그 기금의 일부는 자국의 민족을 돕는 데 쓰이는 것이라고 홍보할 것입니다. 정부의 도움과 관심이 꼭 필요합니다.”
뼈를 깎는 심정으로 작가들의 각성도 필요
“가격이 비싸서 작품이 팔리지 않는 것은 작가의 책임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작가의 작품이 몇 백만원 이상이라고 하여 내 것도 그렇게 작품값을 매기면 애호가가 구매할 의향이 쉽게 생기겠습니까. 조금 비싸지 않게 다작을 판매한다면 생활고에 덜 시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술시장이 침체기를 맞는 데는 국민과 애호가들보다는 어느 정도 작가들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미술시장을 재정립하는 데 있어서 서로가 뼈를 깎는 심정으로 쇄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순천이 낳은 예술가 조강훈
내형적인 움직임 강렬하게 동적으로 표현
‘순천만’ 하면 떠오르는 비경은 거대한 갈대밭, 철새들의 군무, 문학작품의 배경 등 한둘이 아니다. 조강훈 이사장은 그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때 미술시간의 일이다.
“무엇을 그릴까… 학교 뒤편의 깨진 맨홀에 바람에 날려 온 비닐, 신문조각들이 엉겨붙어 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 그것을 그렸습니다. 선생님이 그림을 위로 치켜들고 서 있으라는 겁니다. 관찰력, 표현력 그리고 남들이 보지 않는 가장 어두운 곳을 보려는 화가의 정신이 살아있다고 많은 학생들 앞에서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조금 우쭐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후 선배들의 그림을 보면서 따라잡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미술사조에 한 획을 긋는 예술가의 길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남자는 가난한 집의 아들, 여자는 부잣집의 딸’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작품의 발상과 형식은 체험과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의 작품은 소, 닭, 말 그리고 향토적인 장구를 비롯하여 좋아하는 꽃 해바라기를 소재로 삼았다. 처녀작이라고 가리키는 작품 속 소의 눈동자는 마치 상대를 제압하려는 듯 불을 뿜는 듯 느껴졌다.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는 성격이 아니라서 정적인 것보다 역동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어릴 적 소 등에서 떨어졌던 일, 온순해 보였던 소가 화가 나서 달리면 엄청난 힘을 분출해 도저히 잡을 수 없었던 일 등은 좋은 경험이죠. 어떤 그림은 말을 그릴 때 윤기가 자르르 흐르게 표현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러한 표피를 뒤로 하고 내면에 투영되는 근육이나 뼈의 움직임을 강한 느낌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뭉개고 깎아내고 말리고 다시 덧칠하고 수십 번의 과정을 거치기에 그림을 ‘그린다’는 말보다는 ‘만든다’고 표현합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작품의 정통성을 정립하게 된 데에는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불가리아 소피아 국립예술대학교에서 공부한 영향이 컸다. 소피아 국립대학교는 외세에 물들지 않고 정통미술을 강조하는 학교 중의 하나다. 그러한 문화 속에서 창조적인 표현의 발상이 생겨났고, 무엇보다 그림에 꾀가 없고 미술의 본질을 엿보았다.
고양시가 조용하고 아늑하고 좋아서 작업실 둥지를 틀었다. 오늘날 고양시 지부가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발전하게 된 데는 그의 남다른 추진력으로 화합을 이끌어냈기에 가능했다. 회원 7십명이 지금은 7백여 명이 되었다. 꽃박람회 때 만든 아트페어장은 지역을 홍보하는 대표격이 되었으며, 그 외 호수공원에 호수갤러리, 자유로에 처음으로 갤러리를 만들어 외부작가들과 교류를 펼치기도 했다.
프로필
소피아 국립예술대학교 파인아트마스터디그리(MFA), 개인전 10회 이상, KIAF, 서울오픈아트페어, 화랑미술제 국내외 단체전 및 초대전 3백여 회, 휴스턴아트페어, 샌프란시스코아트페어, 마이애미 아트페어, 퀼른아트페어, 햄튼 아트페어, 북경아트페어 등 참가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전남도전·광주도전·충남미술대전 심사위원,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강사 역임. 현재 (사)한국미술협회 이사장, 한국미술문화진흥회 대표, 아트광주2014 조직위원장.
김흥수 화백 별세하자 한국미술협회장으로 장례 주관
조강훈 이사장은 얼마 전 타계한 미술계의 큰 별 김흥수 화백의 장례를 한국미술협회장으로 치렀다. 핵가족 시대에 큰일을 당하고 보면 암담하고 걱정이 앞선다. 어느 회원은 이렇게 말했다. “미협이 중심이 되어 회원간의 친목을 다지고 선·후배 관계와 역할에 대하여 재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며, 이사장과 미협 관계자들에게 고맙게 여긴다고 했다. 한국미술협회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대상은 미술협회 이사장, 상임고문을 지냈거나 한국미술을 널리 알리고 후학들을 양성하여 지대한 공로가 인정되는 사람이 그 대상이 된다.
취재후기
문화에 관심 높은 국가 지도자를 갖는 것도 국민의 행복일 것이다. 예전 국전 시절의 대통령은 ‘대통령상 수상’ 작가를 초청해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림을 외국에 많이 팔아 달러를 벌어야 한다고 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과 함께 문화발전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데생을 즐기고 휘호가 많았으며 기업이나 부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그림을 사 달라고 홍보대사 역할도 자처했다고 한다. 미술계는 각 분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사기를 진작시켰던 그 시절이 그립다고도 한다. 1949년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국전은 1981년 30년 역사를 마감하고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이 시작됐다. 어떤 단체든 잘하려고 하다 보면 음과 양이 있기 마련이다. 미술대전의 투명성과 공정성에 대하여 잡음도 들리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미술계 및 일반인의 꾸준한 관심과 정부·기업 차원에서 많은 뒷받침을 해주어 문화 강대국으로 우뚝 서는 그날을 기대해본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4년 7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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