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대한뉴스]글·사진 홍성준 기자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이 발발한 1636년 12월 조선의 임금인 인조가 청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당해 이듬해 1월까지 겨울의 추위 속에서 47일간 항전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민족사의 중요한 요충지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장소로 새롭게 주목받는 남한산성을 둘러보았다.
12월의 어느 주말 아침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은 전날 내린 겨울비와 추위로 인해 온통 빙판이 되어버렸다. 얼어붙은 길을 조심스럽게 가면서 ‘청나라 군대에게 쫓기던 인조의 피난길도 이렇게 힘들었을까?’하는 생각에 잠기는 찰나 어느새 남한산성의 남문에 도착하였다.
해발 500m의 남한산과 청량산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한강과 인접하고 서울을 비롯한 일대 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정학적인 이유 때문에 중요한 요충지로 활용되어 왔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이곳을 차지해야 한강 유역을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영토확장으로 인한 삼국 간의 충돌이 빈번하게 이루어진 장소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 가는 일이 발생하였기에 도성을 방어하고 유사시 왕이 피신할 수 있는 거처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인조는 1624년부터 1626년까지 2년간 공사를 추진하여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산성터에 성벽과 왕이 거처할 행궁을 건설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산성을 방어하게 하였다. 거대한 산성을 불과 2년 만에 당시의 기술력으로 완공했다는 것은 임진왜란 직후 백성들의 호국정신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병자호란과 남한산성
남한산성을 완공한 10년 뒤인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청 태종은 직접 1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12월 추위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양을 향해 진군하였다. 이에 인조는 왕자들을 먼저 강화도로 피신하게 하고, 자신과 조정 또한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보름 만에 한양까지 내려온 청나라 군대에 의해 길목을 차단당했다. 강화도로 갈 수 없었던 인조는 새로 축조한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1만 3,000명의 군사가 산성을 방어하고 있었으나 식량은 준비가 부족하여 겨우 50일 치가 비축되어 있을 뿐이었다. 전국에서 구원병들이 출병하였으나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던 청나라 군대에 의해 궤멸당하고 말았다. 포위된 남한산성을 구원해줄 군대도 없고 내부에서는 신하들이 ‘계속해서 항쟁할 것인가? 항복하여 화친을 맺을 것인가?’로 분열이 되어 논쟁만 계속될 뿐이었다. 이듬해 1월 강화도가 함락당해 피신해있던 왕자가 포로로 잡히는 한편 항전이 장기화되자 성안에서는 군마까지 잡아서 먹을 정도로 식량이 부족하였다. 인조는 47일 만에 성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갖추는 치욕을 겪게 되었다.
험한 지형과 성곽이 합쳐진 요새
비록 항쟁은 실패하였으나 남한산성에 대한 기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항쟁에 실패한 것은 식량부족과 적에게 포로로 잡힌 왕자 등 다른 요소에 의해 인조가 스스로 항복을 한 것이지 청나라 군대가 직접 성문을 부수고 산성을 점령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산성은 둘레 11.7km의 성벽과 여장 1,897개소, 옹성 3개, 대문 4개, 암문 16개, 포대 125개를 갖추고 외부는 해발 500m의 급경사로 이루어진 산악지형이 천연의 장벽을 이루고 있다. 내부에는 완만하고 넓은 분지를 이루고, 행궁과 병영, 마을이 있으며, 우물과 샘이 마르지 않아 식량만 충분하다면 수만의 군대가 장기간 항전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남한산성의 위용에 청나라는 ‘난공불락’으로 느끼고 항복문서에 산성을 쌓거나 보수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을 넣었고 이후 사절을 보내어 남한산성을 보수한 흔적이 있으면 문제 삼았다고 한다.
군사 요충지 기능 잃고, 관광지로 재조명
병자호란 이후 화포와 조총이 주무기가 되고 활과 창검이 보조무기가 되자 숙종, 영조, 정조 3대에 걸쳐 성벽과 포대에 대한 보수가 이루어져 오늘날 남한산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구한말, 명성황후 시해사건 발생 후 봉기한 의병들이 한성 진공을 위해 준비를 한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1907년 군대해산 후, 일본은 남한산성에 보관 중이던 조선군의 무기와 탄약을 회수하면서 군사 요충지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해방 이후 남한산성은 197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75년부터 1997년까지 성벽복원사업과 1999년 남한산성 역사관 개장, 2010년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알리고 있다.
현재 남한산성은 연간 280만 명이 방문하고 있는 수도권 시민들의 주요 관광지이자 역사와 자연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성곽을 따라 조성된 길은 짧게는 2.9km, 길게는 7.7km까지 5개의 코스가 있다. 그중 남문에서 북문에 이르는 코스는 경사가 급하지 않고 코스 중간에 위치한 수어장대와 서울시내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코스이다. 봄부터 여름까지는 성곽 길 좌우에 나무숲이 울창하여 자연과 조화된 산성의 모습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해주고 가을에는 낙엽이 깔린 길을 걸을 수 있다.
겨울에는 사시사철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 군락지가 있어 탐방객들을 심심하지 않게 해준다. 남한산성 안쪽에는 왕의 임시 거처였던 행궁과 역사전시관이 있어 과거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으며, 해마다 다양한 공연과 전시가 열린다고 한다.
올겨울도 유난히 추울 것으로 예상되지만 집안에만 움츠려있지 말고 남한산성 성곽 길을 따라 걸으며 건강도 챙기고 수백 년 된 산성의 모습을 보며 역사의 숨결을 느껴 보자.
남한산성 가는길
차량
송파IC(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 복정역사거리 → 약진로 → 남문
광주IC(중부고속도로) → 광지원 → 중부면사무소 → 동문
대중교통
지하철 8호선 산성역 → 9번 버스 → 남문
지하철 5호선 마천역 → 성골마을 등산로(1시간 소요) → 서문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3년 1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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