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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업개발연구원 백영훈 원장에게 듣는 그 때 그 시절

   
▲ 1958년 1월, 국내 최초의 DLF차관 조인식. 이양구 회장(가운데) 옆에 송인상 부흥부장관, 뒤에 백영훈 원장이 자리하고 있다.
 

1959년 서독에서 한국인 최초로 경제학박사 학위(최고 등급)를 받은 백영훈 원장은 한국으로 돌아와 국제학술원 주요 멤버가 되었다. 마침 영국 옥스포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동원 박사(1926~2006, 전 외무부 장관, 주 스위스 대사)와 함께 지금의 낙원상가 자리에 국제학술원을 개원하고, 월간지『국제평론』과 우리나라 최초의 영자잡지『Korean Quarter』를 발행하며, 세미나도 열고, 강의도 했다. 당시 젊은 엘리트들이 많이 모였으며 주된 논쟁거리는 국가의 장래였다. 이들의 뒤에서 후원해주던 이가 바로 서남 이양구 사업가다. 젊은이들이 국가의 장래를 위해 열심히 일해 줄 것으로 믿었으며, 그 당시 멤버들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국가의 발전에 기여했다.

국제학술원 설립자 이양구
  국제학술원 설립자였던 서남(瑞南) 이양구(1916년∼1989) 동양시멘트 사장은 함경남도 함주 출생으로 1956년 동양제과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으며, 1962년 한국경제인연합회를 창립하여 창립위원 및 이사로 취임했다. 이듬해인 1963년 한국양회공업협회를 설립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1964년 한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이양구 씨는 학자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학문과 지식을 수용하기도 했다. 특히 강원용 목사, 강영훈 전 총리, 백영훈 박사, 이동원 전 장관, 이어령 교수, 이기택 교수, 이영호 전 장관, 박정수 전 의원 등을 핵심으로 한 이른바‘이양구 학파’와 어울리며“이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젊은 인재가 많이 나와야 한다”며 젊은 지식인을 후원했다. 백 원장은 회상한다.“서남 이양구 사장은 전혀 정치적인 목적 없이 뒤에서 젊은 사람들을 키웠습니다.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토론하며, 그들이 하는 일이 좋은 결실을 맺도록 도와주셨습니다."

   
▲ 충정로 사택에서 환담을 나누는 이양구 회장과 이어령 교수, 세계적인 작가 게오르규(왼쪽부터)

5·16 군사정변 주 멤버의 강의 참석
  어느 날 파키스탄 군인인 트리노 장군이 정권을 쟁취한 내용을 중심으로 세미나를 개최하고 토론을 했다. 근 1주일 간의 수업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 열심히 강의를 들은 3인은 강의 마지막 날 백 원장에게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며 신당동 식당으로 초대했다. 식사를 하며 그들의 관심은‘우리나라에서도 파키스탄과 같이 군사정변이 일어난다면 성공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식사 후 같이 가볼 곳이 있다며 한 집으로 안내했다.‘이 집주인인 남자는 도대체 누구일까’하며 둘러보던 백 원장은 벽에 걸린 사진을 보고 그가 군인인 것을 알았다. 당시 차를 내온 사람이 육영수 여사였으며, 군복입은 주인공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평상복을 입고 강의에 참석했던 3인은 김동하 장군, 한신 장군, 유원식 장군이었다. 이들은 모두 5·16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주요 요직을 맡았으며, 백 원장보다 연배가 많았던 국제학술원의 이동원 박사는 외무부장관을 역임했다.

  궁금한 기자는 백 원장에게 물었다.“파키스탄 군사정변을 보며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때 나를 찾아온 그들은 이미 혁명의 꿈을 품고 있었는데 파키스탄 경우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어려울 거라고 했지. 그때 만약 내가 성공할 것이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내 답은 틀렸지만 그것이 박정희 대통령과의 지척에서 첫 만남이었고 불과 몇 년 후 내가 파독 광부, 간호사 임금을 담보로 독일 차관을 들여올지 누가 알았겠나. 처음 독일 갈 때 내 계급은 당시 정래혁 상공부 장관의 특별보좌관 독어 통역으로 육군2등병보였지.”“원장님이 어려울 것이라고 하셔서 더 준비를 철저히 해 5·16이 성공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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