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린이음악단은 1951년 4월 한국전쟁 당시 해군 정훈감실에서 한국을 도와준 유엔군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계획하고 만든 합창단으로 부산으로 피난 왔던 서울중앙방송국(훗날 KBS) 소속 어린이들이 중심으로 7~12세 사이의 노래를 잘 부르는 어린이 25명으로 구성돼있었다. 어린이합창단은 1953년 7월 휴전까지 군병원의 환자들을 위한 위로공연과 유엔군 부대를 찾아가서 그 나라의 민요, 동요를 부르며 유엔군 군인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 실제 전선까지 가 전쟁으로 지친 군인들을 위해서 공연을 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합창단은 더이상 위문공연을 할 필요가 없어지자 합창단장은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손원일 제독에게 "미국 대도시 순회 공연을 제의해 미국에서의 공연이 성사되었다. 특히 한국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 공연에서 영어로 "Longing for Brother (오빠생각)"을 부르자 많은 사람들이 울었으며 택사스에서의 공연때는 1만 5천명의 관중들이 모였다,
1970년 3월 30일 9명의 일본 적군파가 도쿄발 후쿠오카행 일본항공(JAL) 여객기를 공중 납치했다. 요도호에는 승무원 7명과 승객 등 115명이 타고 있었고 적군파는 기장을 권총으로 위협해 평양으로 갈 것을 요구하였다. 범인들은 북한으로 가던 중 3월 31일 김포공항에 비상착륙한 뒤 승무원과 승객을 인질로 잡고 북한까지 안전한 비행 보장을 요구했다. 결국 김포공항에서 범인들은 한국정부의 설득으로탑승객 전원을 석방하는 대신 야마무라 신지로 당시 운수성 정무차관을 인질로 잡고 79시간 만에 북한으로 떠났다. 그 후 평양에 도착 후 납치범들을 내려놓고 하네바 공항으로 돌아왔다.
1963년 3월 2일 서울 금호초등학교 1963년 입학식. 1960년에 서울 시내 초등학교의 교실은 1100여 개나 부족해 2부제 수업을 하고도 한 반 학생이 보통 80명, 심할 때는 100명이 넘는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학생들은 공부해야 했다.
황태는 매서운 겨울철 눈보라와 청정한 봄바람 속에서 말리는 명태를 말한다. 황태라는 이름은 함경북도 명천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명태를 말려서 노랗게 변한 것을 지칭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6·25 발발후 함경도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고향의 황태를 잊지 못해 속초, 묵호등지에서 정착해 황태를 만들다가 대관령 일대를 살피다 횡계리를 찾아내 최초로 황태 말리기 작업을 시작하여 생산했다. 뒤를 이어 또 다른 함경도 실향민들이 대관령 근처 용대리에 대한민국 최초로 덕장을 만들고 1964년에 대관령 황태덕장마을이 생기게 되었다.
1883년 개항한 인천항은 조선 최대 무역항으로 1900년대 초반까지 전국 무역항의 절반을 차지 했다. 1963년은 80년 만의 한파로 얼어붙어 58만여 평의 내항이 폐항 상태에 빠졌다.
겨울 한파하면 늘 뉴스에서 한강이 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강에 얼음이 언다는 것은 강추위를 그대로 대변해 준다. 한강의 결빙은 1906년부터 노량진 앞의 한강대교 남단에서 둘째와 넷째 교각 상류 100m 부근에 얼음이 어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즉 이 지점에 얼음이 생겨 물속을 완전히 볼 수 없는 상태를 한강의 결빙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한강에 다리가 없던 시절, 한강의 결빙을 관측하기에 가장 좋은 지점이 노들섬이었는데, 현재 이곳에는 기상청에서 세운 ‘한강 결빙 관측 지점’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에 의해 창립되어 현재 전세계 134개국에서 인종, 종교, 피부색, 지역을 초월하여 나눔과 돌봄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국제적인 단체다. 1908년 한국에서의 활동을 시작한 구세군은 초기부터 아동구호시설인 혜천원, 윤락여성을 위한 여자관, 교육사업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고 긴급구호 활동 등 사회적으로 혼란하고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어려움에 처해있는 이웃들을 찾아가 돌보는 활동을 펼쳐왔다. 이후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나오는 한결같이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하는 사랑의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구세군 자선 냄비는 1891년 성탄이 가까워 오던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선냄비는 그 첫 종소리를 울리게 되었는데. 도시 빈민들과 갑작스런 재난을 당하여 슬픈 성탄을 맞이하게 된 천여명의 사람들을 먹여야 했던 한 구세군 사관은 오클랜드 부두로 나아가 주방에서 사용하던 큰 쇠솥을 거리에 내걸었다. 그리고 그 위에 “이 국솥을 끓게 합시다.”라고 써 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성탄절에 어려움을 당한 이들에게 따뜻한 식사를 제공할 만큼의 충분한 기금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렇게 이웃을 돕기 위
원각사는 한국 최초의 극장으로 1908년 지금의 서울 광화문 새문안 교회 자리에 세웠다. 로마식 극장을 본떠 만들었으며 2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이었다. 1960년 12월 5일 전소되고 원각사를 복원하자는 취지로 지어진 것이 1995년 문을 연 정동극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