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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1892-1950)를 다시 보자

-춘원연구가 최종고 교수와의 대담-

[인터넷 대한뉴스]

 

 

춘원 이광수는 그의 전 생애가 아닌 일제말기 행적이 집중 조명되어 그의 문학적인 업적마저 사라지며 잊혀져가고 있다. 기록이 없으면 있던 것도 없어진다는 역사적인 사실 앞에 그에 관한 전기를 쓰고 있는 최 교수를 만나보았다.

 

1. 춘원의 대표적인 문학작품과 그에 얽힌 일화가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춘원의 수십 편의 작품들을 다 소개할 수는 없습니다만, 역사소설 중 <이순신>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큰 감동을 주어 성웅화시켰고, 정주영 회장은 춘원의 장편 <흙>에서 건설의지를 얻었다 하고, 화가 이연호 목사는 춘원의 시 <서울로 간다는 소>에서 큰 감동을 받고 평생을 빈민을 위한 목회로 바쳤습니다.

이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선배들은 춘원의 글을 통해 한국인의 얼과 혼을 느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춘원을 가리켜 한 국민과 함께 울어준 예레미야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이런 춘원이 일제말기의 군국주의에 협력을 하게 된 것도 우리 민족의 힘이 모자랐기 때문에 지켜주지 못한 책임이라고 함 선생님은 말씀하셨지요.

저도 학생시절에 학교공부 하느라, 교수가 된 후로는 가르치느라 춘원의 작품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가 작년에 정년퇴임을 하고 그의 작품을 읽으며 삶과 사상을 연구해보니 그동안 우리가 너무 모르고 외면해온 것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춘원의 문장력은 아직도 어필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춘원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2. 춘원의 삶을 연대기 별로 살펴본다면 어떠했으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춘원은 189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빈한한 가정에서 동학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 가서 기독교계통 중학을 마치고 고향의 오산학교에서 가르치다 톨스토이를 숭배한다는 이유로 학교와 불화하여 세계의 피압박민족들을 체험하기 위해 방랑의 길을 떠났습니다.

중국 상해에 머물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의 주필로 초빙되었으나 좌절되었습니다. 다시 귀국해 오산학교에서 가르치다가 일본으로 가 와세다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1919년에 삼일운동에 앞서 2.8독립선언문을 쓰고 직접 영어로 번역하여 상해로 가져가서 외국 언론과 지도자들에게 보냈습니다. 신한청년단에 가입하여 이를 기초로 임시정부를 세우는 데에 공헌하였고, 안창호, 이승만을 도와 <독립신문>을 내고 사료편찬 작업을 하여 한국역사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간디가 자국에서 독립운동 하는 것을 보고는 귀국하여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조선일보 부사장까지 지냈습니다. 이들 언론을 통해 한 국민의 심금을 울리는 소설들을 연재하여 큰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1930년대 말기로 들어서면서 수양동우회사건이라 하여 일제가 한국지도자 40여명을 일망타진하여 5년간 재판을 끌면서 온갖 회유와 협박고문을 했습니다.

춘원은 자신이 희생함으로서 동료와 민족을 살리려고 전향서를 제출하고 그때부터 노골적으로 친일활동을 했습니다. 이것이 해방후 한국인에게 일종의 르상티망(ressentiment:원한怨恨·복수감復讐感)으로 작용하여 선망과 환멸과 외면이 이어져 6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춘원은 뛰어난 능력과 명성이 일제에 의해 철저히 이용되었고 해방이 되자 반민족행위자라 하여 구속되었으나 무죄로 불기소되었고, 이듬해 6.25로 납북되는 민족적 비애를 모두 뒤집어쓴 희생양이었습니다.

최근에 역사학자 김원모 교수가 쓴 <영마루의 구름: 춘원 이광수의 친일과 민족보존론>이란 1,2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연구서를 내었는데, 우리가 몰랐던 사실을 많은 사료에 입각해서 고증했습니다. 저도 춘원의 공과를 바르게 인식하여 30퍼센트의 잘못으로 70퍼센트의 훌륭한 점을 묵살하는 민족적 손실은 이제 지양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춘원에 대한 바른 전기(biography)가 나와서 읽혀야 하겠는데, 현재 서점에는 한 권도 없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춘원이 자기 자신에 대해 쓴 글들을 모아 <나의 일생: 춘원자서전>이란 책으로 편집하여 보니 7백여 페이지가 되는데 이번 6월 중으로 출간됩니다. 일단 본인이 쓴 자서전을 읽어보고 왈가왈부하자고 한 작업인데, 저는 이 과정에서 많은 사실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아마도 <백범일지>와 함께 청소년과 일반인들이 애독하리라 기대합니다.

 

3. 춘원은 1914년 러시아에서 잡지발간을 하고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때의 경험이 1933년 석 달간 <조선일보>에 연재된 소설 ‘유정’의 배경이 된 것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위에서 잠시 말씀드린 대로 춘원은 1914년 1월에 <신한민보>의 초청을 받고 도미할 때 러시아에서 여비를 마련하려고 왔다가 당시 추정(秋汀) 이갑(李甲, 1877-1917) 장군이 반신불수로 계신 것을 보고 말동무도 되고 편지도 대필해주면서 <대한인정교보>라는 신문을 편집했지요. 그 11호에 자신의‘망국인의 설움’등 시 3편과 ‘지사의 감회’라는 수필을 실어 결국 폐간조치를 당하고 편집진이 체포되었지만 춘원은 아슬아슬하게 한 달 전에 이미 귀국하여 오산학교에 가서 화를 면했습니다.

어쨌든 이런 러시아 경험에서 춘원은 러시아어도 배웠고, 관찰한 시베리아 풍경을 <유정>이라는 소설에 십분 농축해 넣었습니다. <유정>이라는 소설은 <무정>보다 덜 알려져 있습니다만, 내용은 더 재미있습니다. 재미도 있지만 한 편의 서사시 같은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주인공 최석 교장과 남정임의 순수한 사랑의 감정이 사회적 인습과 비난을 받고 세계에서 제일 큰 담수호 바이칼로 마지막 행로를 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육당 최남선의 불함문화론도 그렇고 근자에 많은 학자들이 우리 민족은 바이칼에서 도래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시원(始原)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 춘원은 설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작품은 서양어로 번역되어도 세계적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입니다.

 

4. 춘원은 작품 <유정>이 제일 먼저 외국어로 번역되기를 원했는데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되었는지요?

춘원은 분명히 자신의 작품 가운데 <유정>이 제일 먼저 외국어로 번역되기를 바란다고 했고, 자연묘사에 공을 들였다고 했습니다. 정말 바이칼호수의 물결과 자작나무숲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그런데 못난 우리 후배들이 80년이 지나도록 이런 명작을 영어로 번역도 못했습니다.

일본어로는 번역되었고, 러시아어로는 현재 진행 중에 있습니다. 아마 머지않아 영어로도 번역될 것입니다. 저는 작년 여름에 바이칼호에 피서여행을 갔다가, 괴테가 말한 ‘세계문학’(Weltliteratur)을 130년대에 이미 한국에서도 춘원이 이루었는데, 우리 한국인이 너무 무관심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이칼호반에 <유정>문학비를 세울 구상을 추진 중에 있습니다. 1년에 3,4천명의 한국인이 피서여행을 가는 그곳에서 남의 나라 산천만 보고 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문호가 일찍이 이곳을 작품화했다는 사실을 목도하고 오면 얼마나 뜻있고 자랑스럽겠습니까? 좋은 뜻이 있으면 반드시 길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5. 법학자로서 많은 저술을 하고 춘원에 대한 연구와 전기를 쓰는 특별한 동기가 있습니까?

저는 33년간 법학교수를 하면서 선배 되시는 유진오 박사, 이항녕 교수, 이태영 변호사 같은 존경하는 분들이 춘원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영모, 함석헌, 안병욱, 지명관 같은 선생님들도 춘원에 대한 관심이 큰 분들임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독일서 공부하여 괴테를 좋아하여 10여년 괴테연구에 빠지기도 했는데, 한국인으로 괴테에 가까운 분이 누구인가 생각하니 춘원임을 알고 전기학(biographics)의 관점에서 제대로 한번 춘원연구를 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우리가 한 인물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자기의 좁은 붓대롱 안에 드는 면만 갖고 평가하고 비판 부정하는 것은 결국 자기가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2000년부터 한국인물전기학회(Korean Biographical Society)를 창립 운영해오고 있는데, 한국인의 가장 대표적 인물로 춘원을 꼽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큰 능력을 갖고 태어나 많은 업적을 내었음에도 민족사의 비극으로 희생양이 되는, 모순과 역설을 안고 있는 인물로 정말 제대로 연구되고 평가되어야 할 대상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좀 외람된 말을 하자면, 저는 큰 인물일수록 이런 모순을 안고 있는 폭넓은 인간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기를 쓰는 일은 계속하지만 출간은 그리 빠르지 못할 것입니다.

 

6. 전국에 80개 가까운 문학관들이 있지만 정작 20세기 대표 문인인 춘원문학관은 없습니다. 춘원문학관이나 기념비나 문학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안타까운 현실을 잘 지적했습니다. 지금 전국에 지방자치제가 되어 웬만한 문인들은 심지어 생존인물까지 문학관을 만들고 문학제를 하고 기념비를 세우고 있습니다. 우리도 문화국가가 되었으니 이런 것이 나쁘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이 와서 한국의 가장 유명한 문학가가 누구이냐, 그의 문학관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 춘원의 문학관 하나도 없다고 한다면 뭐라고 설명하겠습니까? 물론 그동안 친일문제를 규탄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압니다만, 이제는 세계화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좀 더 공과를 포용하는 너그러운 자세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친일은 친일대로 전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해방을 맞으며 돌베개를 베고 사시던 남양주군 사릉의 댁을 춘원문학관으로 복원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험난했던 현대사의 영욕을 어찌 밝은 면만 보고 카타르시스 하겠습니까? 동인문학상은 있는데 왜 춘원문학상은 없는가요?

 

7. 2014년 2월 중앙일보에서 15개 자사고와 특목고에서 추천한 추천도서 목록을 보면 오직 2개교에서만 춘원의 작품을 선택했습니다. 작품을 통해 한국인의 얼을 잘 표현한 춘원의 작품이 요즘 들어 각광 받지 못하는 이유를 무엇 때문이라고 보는지요?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해방 후 춘원의 납북 이후 가족들은 미국으로 가고 누구도 춘원을 끝까지 챙기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른바 진보세력에서 춘원을 친일파라고 몰아 부친 여파가 컸다고 봅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60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심지어 1963년에 삼중당에서 나온 <이광수전집>도 절판이 되고 서점에는 춘원전기 한 권도 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초중고 교과서에서도 춘원을 친일파로 언급하는 몇 줄만 나오니 젊은 세대는 점점 춘원과 거리가 멀어지고 역사는 왜곡되어 가는 것입니다. 역사를 바르게 가르치고, 인간을 바르게 이해하게 인도해주는 것은 기성세대의 책임입니다. 저는 지난 가을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에 다녀왔는데, 그곳의 독립운동역사관에 수십 명의 독립운동가들의 사진과 해설들이 적혀 있는데,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춘원이 러시아에 살면서 독립운동을 한 엄연한 사실도 완전 무시되고 한 마디 언급도 없습니다.

아마 그것을 만든 사람들은 국내에 춘원에 대한 자료가 없으니 할 수 없었다고 할 것입니다. 역사가 무서운 것은 기록이 없으면 있던 것도 없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청소년과 장래를 위해서는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없어진 <이광수전집>을 다시 내고, 그 속에서 한국인의 정신을 느끼는 교육이 강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춘원의 위대한 점의 하나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육당 최남선과 함께 한국학(Korean Studies) 선구자의 한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단순한 소설가, 작가에 머문 것이 아니라 늘 공부하는 학자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훌륭한 인물을 훌륭하게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는 것이 진정한 교양이요 교육 아닐까요?

 

8. 최근 춘원연구의 현황을 말씀해주세요.

네, 이런 일반적 사회적 외면 내지 망각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연구열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해방 후 지금까지 각 대학에서 나온 춘원연구 석박사 논문은 1천 편이 넘을 것입니다. 요즘도 연구서들이 출간되고 있고, 일본과 미국, 러시아 등 외국에서도 연구서와 논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2007년에 춘원연구학회가 조직되어 매년 가을 심포지움을 개최하고 <춘원연구학보>와 <뉴스레터>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작년 11월에는 춘원이 중학을 다닌 동경의 메이지학원대학에서 <이광수는 누구인가>라는 국제심포지움을 개최하여 한일대역서로 출간되었고, 작년 봄과 금년 봄에는 미국 샌디에이고와 필라델피아에서 춘원세미나가 개최되어 영어로 춘원소개서를 하나 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무정>이 번역된 후 작년에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으로 <흙>이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이제 춘원연구자들의 국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자료도 교환하고 유대를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대로 그동안 너무 못해서 할 일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요즘 한국 문인들 사이에는 노벨문학상이 일종의 유혹이 되어 자기 소설과 시를 외국어로 번역하려고들 하는데, 감히 말씀드린다면 훌륭한 선배의 전통을 무시하고는 한국이 문화국가로 비쳐지지 않을 것입니다. 춘원연구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이러한 비정상적인 분위기는 정상화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8. 이 외 하실 말씀이 있다면

춘원에 대하여 일개 학자로서 주제넘게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한 국민 전체의 문제로 이제 마음을 가다듬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그동안 너무 편향된 시각으로 몰아치고 외면하면 되는 것 같은 환상을 벗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지식인의 양심이 있다면, 이런 모순된 현실을 극복하는 데에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4년 6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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