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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전시/도서

음악기행 - 마리아 칼라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았던 소프라노

[인터넷 대한뉴스]글 조선영 기자 | 사진 www.callas.it

▲ 1964~65년 런던 로얄오페라하우스 은퇴공연 당시‘토스카’

 

 

 

푸치니의 오페라 중에‘토스카’가 있다. 여주인공 토스카는 오페라가수이다. 혁명가인 애인 카바라도시가 사형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 대가로 자신의 몸을 요구하던 비밀경찰 스카르피아에게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한 뒤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유명한 아리아‘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Vissi d'arte, vissi d'amore)’를 부른다. 그리고 결국 비밀경찰을 죽이고 자신도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마리아 칼라스는 이 토스카 역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때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을 선택하며 은퇴공연을 하지만, 배신의 아픔을 겪고 가장 싫어하던 고독 속에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이렇게 노래와 사랑만이 전부였던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자.

 

천덕꾸러기에 외톨이였던 어린 시절

 

1923년 12월 2일 미국 뉴욕에서 마리아 칼라스는 그리스 이주민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뚱뚱하고 못생겼던 그녀는 아들을 원했던 부모의 실망이 그대로 그녀에게 무관심으로 표현되었다. 그녀가 엄마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노래를 할 때뿐이었고, 마리아의 엄마는 재능이 있는 딸이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 마리아는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부모의 이혼으로 엄마와 함께 그리스로 온 마리아는 아테네 국립음악원에 입학해 성악공부를 하게 되지만, 데뷔도 하기 전인 1945년 22세 때 아버지가 계신 미국으로 돌아와 메트로폴리탄오페라단 오디션에 응시하지만 탈락하게 된다.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얻는 법

 

마리아는 1947년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오페라‘라 조콘다’를 통해 데뷔무대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50년 당시 오페라의 여왕이었던 레나타 테발디가‘아이다’공연을 앞두고 갑자기 쓰러지게 되는데 그때 대역을 하게 된다. 미리‘아이다’에 대한 연습이 끝난 마리아는 오페라단과 3일 연습 후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의 무대에 오르게 된다.

이 단 한 번의 공연으로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이렇게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1947년 베로나에서 데뷔했을 때 그 다음날 27세 연상의 이탈리아의 부유한 사업가 죠반니 바티스트 메네기니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의 음역대가 넓고 아름답고 풍부한 성량 있는 목소리에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녀에게 적극적인 후원을 약속하며, 구애를 했다. 데뷔 후 빛을 보지 못했던 마리아는 음악에 대한 성공을 꿈꾸며, 그의 구애를 받아들여 이때부터 그녀는 메네기니와 성공을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그는 마리아가 최고의 스승들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최고의 행운을 주며 결혼까지 해 예술과 생활 모두를 함께했다. 이렇게 준비된 마리아가‘아이다’에서 레나타 테발디 대신 공연한 후 파격적으로 극장과 전속계약을 맺어 신인이지만 테발디와 교대로 극장에 서며 두 소프라노는 세기의 라이벌이 되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창법과 연기력을 갖춘 오페라 디바(여신)

 

마리아는 1951년 라 스칼라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은 시즌 개막공연 이후로 1958년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맡게 된다. 그녀는 곧 작곡가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의 벨칸토창법의 노래를 함으로써 수년 동안 무시당했던 많은 오페라의 레파토리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마침내 1952년 6월엔 레코드 EMI사와 전속계약도 맺는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리아는 170cm 키에 뚱뚱하고 덩치가 커서 외모는 그리 매력이 없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살을 빼며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된 계기는 연출가 비스콘티가 살을 빼면 오페라계의 오드리 햅번이 될 수 있을 거란 말을 듣고 비스콘티를 사모했던 마리아가 극히 짧은 기간 안에 30kg을 감량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동성애자였던 그와는 사랑할 수가 없었다. 이후로 그녀는 실력에 미모까지 갖춰 관객들로 하여금 오페라에 더욱 빠져들게 만들었고, 인기는 날로 치솟았다. 1956년엔 과거 그녀를 오디션에 탈락시켰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무대에‘노르마’를 공연하면서 최초로 서게 되고,‘토스카’와‘루치아’도 공연하게 되었다.

 

마리아 칼라스의 운명을 바꾼 사랑

 

1957년엔 그녀에게 운명 같은 사랑이 찾아왔다. 명성은 얻었지만 늘 외로웠던 그녀는 베니스의 한 파티에서 그리스의 선박 재벌 오나시스를 처음 만나게 된다. 오나시스는 미리 그녀의 옆자리에 앉도록 손을 써놓았고, 같은 그리스인이라는 것에 마리아는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러다가 1958년 마리아 칼라스는 자선 콘서트 날 아침, 오나시스의 사인이 있는 엄청난 크기의 장미꽃다발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날 점심과 공연장에 가기 바로 직전에도 꽃다발을 받아 큰 감동을 받으며 그녀는 오나시스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서 오나시스는 마리아 칼라스부부를 자신의 호화 크루즈 크리스티나 호에 초청을 했는데, 마리아는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스탄불까지 크루즈여행을 한다. 이 여행을 통해 오나시스와의 세기의 스캔들이 터지고 자신의 후원자이자 남편인 메네기니를 버리고 몇 년간 무대도 뒤로한 채 오나시스와의 사랑에 몰두하지만 결국 재클린 캐네디와 오나시스의 결혼식을 보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1965년 푸치니의 오페라‘토스카’를 끝으로 은퇴를 한다. 그리고 재기를 하려 했으나, 이미 목이 상한 본인 노래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녀는 파리에서 은둔생활에 들어가고, 1977년 55세의 나이로 우울증과 수면제 과다복용에 의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기자 뒷말

 

기자가 처음 성악을 배울 때 선생님께서 마리아 칼라스의 협연영상을 보여줬었다. 그때는 마리아 칼라스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 얼마나 유명한지, 그런 것은 알지 못했을 때였다. 하지만 인상적이었던 것은 지휘자가 자신의 앞을 지나가려 하자 미소를 지으며 지휘자의 손을 잡아 본인의 뒤로 지나가게 했다.

그리고는 전주가 나오자 그녀는 얼굴표정과 몸짓으로 이미 소리 없는 연주를 시작하고 있었고, 언제 시작했는지 모를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노래가 끝나고 지휘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손잡고 함께 퇴장하던 그 영상과 그녀의 도도하고 자신에 찬 그 미소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파리에서 은둔생활을 할 때‘내가 이렇게 노래했었지….’하며 종일 자신의 노래를 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드높은 명성과 팬들의 열렬한 환호,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사랑을 택했다. 그것이 잘못된 선택일까? 그녀의 팬들과 음악계에서 볼 때는 미련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향기 나지 않던 꽃에서 향기가 나게 해준 사랑, 아름다운 꽃이라고 처음 느끼게 해 준 사랑은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그녀의 열정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4년 8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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