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주세페 베르디 초상화 |
클래식과 가깝지 않은 독자의 경우 3시간 가까이 하는 오페라 전편을 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오페라 중간 중간 나오는 성악가의 대표곡은 TV를 통해 접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2007년 타계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테너 파바로티가 부르는‘여자의 마음’이나 유명한 빅3테너인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가 함께 부른 ‘축배의 노래’등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는 아리아 거의 대부분이 베르디의 작품이다. 그는 평생 26편에 달하는 오페라를 작곡했고 당시 이탈리아에서 굉장한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오페라의 왕’이라 불렀다. 베르디의 유명한 오페라 작품과 함께 그 속에 담긴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자.
음악가의 꿈을 키우던 베르디
베르디는 1813년 10월 10일 북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은 여인숙 겸 잡화상을 경영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눈에 띄었고 피아노를 잘 쳤다. 한번은 집에 있던 작은 피아노가 고장 나 수리한 사람이 누가 피아노를 치느냐고 물어보았다. 아버지가 베르디를 가리키자 갑자기 수리해준 금액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아버지가 이유를 묻자 이렇게 피아노를 많이 연습하는 아이가 기특해서 그렇다고 한 일화가 전해진다. 이미 9살 때 연주료를 받으며 오르간 주자를 한 베르디는 옆집의 부자 안토니오 바레찌의 후원으로 그의 집에 머물며 음악가의 꿈을 키웠다. 베르디는 1832년 5월 18세 때 고향을 떠나 밀라노로 가서 밀라노 음악원의 입학시험을 보았으나 실패했다. 실패의 이유는 음악원의 입학 자격 연령을 4세나 초과했고 음악이 서툴다는 것이었다. 결국 베르디는 밀라노에서 개인교수를 받아 작곡공부를 시작했다.
점차 작곡가로서 인정받게 되지만 가족을 잃은 베르디
개인 교습을 받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밀라노 음악인 협회에서 하이든의 오라토리오‘천지창조’를 연주했을 때 베르디가 대리 지휘자 역할을 했었는데 이 때의 역량이 인정되어 협회로부터 오페라 작곡을 의뢰받은 것이다. 그래서‘산 보니파치오의 백작 오베르토’가 밀라노 스칼라극장에서 초연되어 다소의 성공을 거뒀다. 26세의 일이었다. 이때 베르디는 처음으로 성공의 기쁨을 맛보며 그동안 자신을 후원해준 바레찌의 딸과 결혼도 하게 되었다. 오랜 사랑을 성공과 함께 이룬 것이다, 그러나 밀라노에서 행복했던 베르디는 딸과 아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병으로 떠나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페라‘하루 만의 임금님’을 작곡했으나 무참히 실패하여 자신을 잃은 베르디는 한때 작곡을 단념했을 정도였다.
베르디의 운명을 바꿔준 글 ‘가라, 내 마음이여! 황금날개를 타고’
슬픔과 시련에 빠져 작곡을 하지 않던 베르디에게 주위 사람들이 여러 대본을 전해주며 작곡 의뢰를 했다. 아무 반응이 없자 어느 날 극장 관계자가 대본을 펼쳐둔 채 돌아갔는데, 우연히 베르디가 그것을 읽게 된다. 그 이야기는 성서에 나오는 바빌론 왕의 이야기인데 대본에 적힌‘가라, 내 마음이여! 황금날개를 타고’라는 대사를 보며 슬픔을 극복하고 오페라‘나부코’를 작곡하게 된다. 이 오페라에는‘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나오는데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히브리인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곡으로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이 오스트리아의 횡포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를 원하던 때여서 국민들에게 애국심과 독립심을 고취시키는 희망의 노래가 되어 57회 이상 공연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베르디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유명해진 베르디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국외로부터도 초청되어 런던이나 파리에서 자작을 상연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표적 작곡가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늘날 이때 만들어진 베르디의 오페라들은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지고 있지 않다. 당시 19세기 중엽의 이탈리아인들을 열광시킨 것은 사실이나 1850년 37세의 베르디가 40일 동안 단숨에 작곡해낸‘리골레토’야말로 이듬해 3월 베네치아에서 초연되어 오페라 사상 드물게 보는 영광을 불러일으켰다.
![]() |
||
▲ 오페라‘리골레토’의 포스터 |
베르디의 오페라 3대 걸작 ‘리골레토’
웃긴 분장의 광대가 눈물을 흘리는 이 인상적인 사진은 오페라‘리골레토’ 의 포스터다. 리골레토가 모시는 주인인 만토바 공작은 바람둥이라 적이 많았다. 공작이 그 도시의 모든 여자들을 건드려 가족들이 화가 나 찾아오면 망신을 주고 내쫓아 자신의 주인을 보호하는 일을 하던 리골레토는 어느 날 자신의 숨겨둔 딸도 이 공작에게 농락당한 사실을 알고 복수를 결심한다. 자객에게 살해를 의뢰한 사실을 알게 된 리골레토의 딸 질다는 이미 공작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고 공작을 위해 자신이 자객의 칼에 대신 죽는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왕의 환락』을 각색한 대본으로 작곡한 이 오페라는 베르디도 다소 자신이 있었는지 특히 유명한 아리아‘여자의 마음’은 초연 전에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무대연습 때에도 가수에게 악보를 주지 않고 초연 전날 겨우 악보가 주어졌다고 한다. 베르디의 생각대로 이 아리아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주 유명한 곡이 되었고, 당시 그의 명성은 더욱 더 상승했다.
‘일 트로바토레’
‘트로바토레’란 음유시인이란 뜻으로,‘일 트로바토레’는 에스파냐의 극작가 안토니오 가르시아 구치에레츠의 희곡으로 만들어진 오페라다. 스페인의 백작이 한 집시 노파가 자신의 아기를 쳐다본 후 아기가 아프기 시작하자 저주를 걸었다고 생각해 그 집시 노파를 화형에 처하는데 그것을 본 노파의 딸이 그 아기를 훔쳐 불을 질러 죽인다. 세월이 지나 이 사실을 알게 된 백작의 큰아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 동생을 훔쳐간 여인의 아들을 죽이는데 그 아들이 자신의 친동생임을 알게 되는 비극이다. 사실은 옛날 그 집시가 불을 질러 죽인 아기가 백작의 아기가 아니라 실수로 그녀 자신의 아기를 죽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백작의 아기를 친자식처럼 키운 것이었다. 이 오페라는 아주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크게 성공을 거두고 새벽녘에 불을 피우고 일을 나가려는 희망찬 집시들의 노래인‘대장간의 합창’은 대표곡이 되었다.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춘희 ‘라 트라비아타’
철부지 귀족 청년과 창녀의 사랑이야기인 이 오페라는 사랑하는 두 남녀가 소박한 행복을 꿈꾸지만 사회의 인습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젊음과 아름다움의 덧없음, 신분차별에 대한 윤리 비판이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소프라노 최고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는 아리아가 있고 유명한‘축배의 노래’가 오페라의 시작을 알린다. 1853년 이 오페라가 초연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마지막에 폐병으로 쓰러져 죽는데 너무 뚱뚱해‘쿵’소리를 내며 쓰러져 관객들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 |
||
▲ 라 트라비아타 |
베르디의 죽음
부와 명성에 둘러싸인 베르디는 밀라노의 호텔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1901년 1월 27일 87세의 일생을 마쳤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800여 명의 합창단이 오페라‘나부코’의 주제곡을 부르고 당시 밀라노 시민이 40만명이었는데 20만명이 넘는 군중이 참석했고 이탈리아의 일간지들은 애도하는 뜻에서 일제히 1면에 검은 리본을 인쇄했다. 국민적 영웅이었던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는 이렇게 음악인의 묘지에 잠들었다.
기자 후기
우리 독자들도 모든 유행가가 내 이야기 같고 에세이나 시를 읽으며 좋은 글귀를 메모하며 마음의 위안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베르디가 가족을 모두 잃고 시련에 빠져있을 때 그를 다시 살게 해준 한 줄의 글귀,‘가라 내 마음이여! 황금날개를 타고’를 통해 슬픔을 모두 날려 보내고 완성한 작품으로 베르디의 인생은 다시 시작되었다. 재혼을 했어도 더 이상 자식을 낳지 않고 가슴에 묻어둔 부정으로 그의 내면의 인간적 면모를 볼 수 있다. 오페라 속 아리아의 아름다운 선율과 극적인 멜로 이야기들, 그리고 악인들도 마지막에는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그런 이야기로 끝내는 것 또한 그의 매력이라고 느껴진다.
추운 겨울 속에 다시 오지 않을 것 같던 봄이 찾아왔다. 대한뉴스의 뜰에는 각자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뽐내는 자연의 콘테스트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아침에 커피 한잔과 함께 따스한 봄 햇살을 느끼며 베르디 오페라의 매력에 푹 빠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