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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일반

헝가리의 작곡가, 피아노의 황제 프란츠 리스트

   
▲ 리스트 초상화

1960년대 말 우리나라에 영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고 불리던 청춘 록스타, 클리프 리챠드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공연할 때 여대생들이 열광하며 속옷을 벗어 던져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미 1800년대에도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시작하면 귀족부인들이 괴성을 지르고 열광하며 반지나 목걸이, 비단속옷들을 던지는 일이 있었다. 연주자가 꼈던 장갑을 가지기 위해 서로 싸우며 난장판이 되기도 했던, 지금의 오빠부대의 원조인 귀족부인 부대가 따라다니던 사람은 바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프란츠 리스트다. 잘생긴 외모로 긴 코트를 휘날리며 무대를 걸어 나와 악보도 보지 않고 피아노연주를 했던 프란츠 리스트, 그의 음악세계로 빠져보자.

리스트의 어린 시절
  리스트는 지금은 오스트리아에 속해있지만 1811년 당시는 헝가리의 외딴 시골 라이딩에서 10월 22일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집사로서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다. 리스트가 6살 때 아버지가 연주한 피아노곡을 듣고 테마를 따라 부를 정도로 신동이였던 그는 그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9세 때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아들의 매니저가 된 것처럼 리스트의 아버지도 매니저가 되었고, 연주회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고장의 귀족으로부터 6년간의 학자금을 보증받았다. 그래서 가족이 모두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주를 했다. 빈에서 현재 우리 학생들이 배우는 피아노 교본의 작곡가인 체르니에게 피아노를, 또 모차르트의 라이벌인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우게 된다. 12살이 되던 1823년, 빈에서 연주회를 할 때는 천재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은 베토벤이 참석하여 그 연주를 듣고,‘이 꼬마 녀석아, 참 대단한 놈이구나’하면서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렇게 연주 때마다 호평을 받은 신동 리스트는 연주여행을 시작하고, 아버지와 함께 파리에 가서 음악원 입학을 원했지만,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결국 개인 교수에게 배우게 되었다.

   
▲ 리스트가 치던 피아노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찾아온 방황
  우리는 어떤 분야의 신동이나 천재들이 반짝 이슈가 되었다가 사라지는 경우들을 종종 본다. 사춘기가 된 리스트도 파리에서의 본격적인 작곡수업과 파리근교와 영국으로 이어지는 연주여행으로 지쳐 결국 아버지에게 음악을 그만두고 성직자가 되겠다는 선언을 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 갑자기 장티푸스로 아버지가 사망하고, 파리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리스트는 음악에 다시 눈을 돌리게 되었다.

파가니니의 연주에 반해 다시 시작된 음악의 길
  리스트는 21세가 되던 해에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파리 순회공연을 보게 된다. 리스트는 처음 보는 테크닉과 뛰어난 곡해석, 완벽한 무대연출 등 파가니니의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아 다시 음악의 길로 돌아서 훗날 파가니니 대 연습곡이라는 피아노곡도 작곡한다. 이때부터 하루 10시간씩 연습을 해 리스트의 실력은 그야말로 일취월장이었다.

파리 사교계의 중심에 서다
  성인이 된 리스트는 살롱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당시 살롱은 예술가나 지식인들의 사교장이었고, 프랑스 예술활동의 원천지였다. 리스트가 살롱에서 교제한 사람들은 쇼팽, 베를리오즈 등 음악가와 빅토르 위고, 샤토브리앙 등의 문학가들이었다. 이 살롱을 통해 그는 파리 사교계의 스타가 되었고, 우상처럼 여기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와 함께 마침내 유럽 음악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영국 국왕 조지 4세를 위해 영국에서 연주했고, 약 10년 동안은 파리에서 생활했다. 리스트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그의 연주회는 어느 곳이나 초만원이었다고 한다.

   

▲ 살롱에서 피아노 치는 리스트

리스트의 사랑
  리스트는 19세 때 첫사랑의 아픔을 경험한다. 제자 카롤린이란 생크릭 백작의 딸과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는데, 상공장관이었던 그녀 아버지의 심한 반대로 헤어지게 되었다.

  실연의 상처에 빠진 리스트는 몇 달을 누워 있었으며 사람들 앞에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등 허무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파리의 신문들은 그가 죽었다는 사망 기사를 실었고, 그의 죽음을 알리는 별도의 인쇄물들이 팔려 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실연의 후유증은 2년간이나 계속되었다.

  파가니니의 연주를 통해 다시 시작된 음악활동은 앞서 말했듯이 리스트를 파리 사교계의 중심에 세웠다. 잘생긴 외모와 훌륭한 매너, 화려한 피아노 연주까지 파리의 귀족부인들은 서로 앞다퉈 리스트와 사귀려 했다. 그중에 다구 백작의 아내 아골트가 리스트를 차지하는 행운의 여인이 되었다. 남편이 있는 유부녀로 젊은 리스트를 쫓아다니다 결국 남편도 버렸지만, 리스트와 정식으로 결혼 못한 채 3자녀를 두고 5년 만에 헤어지게 된다. 소설가이기도 했던 그녀와 사이에 난 딸 코지마는 훗날 바그너의 아내가 되었다.

  리스트의 마지막 사랑은 36세 때 만난 러시아의 캐롤린 공주였다. 그녀는 리스트의 자선공연에 큰 후원을 해 알게 되었고, 그녀는 별거중이었지만 유부녀였기 때문에 교황청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아 둘은 결혼을 하지 못했다. 교황청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한 두 사람은 26년간을 그리워하며 편지로 사랑을 나누었다. 그 편지는 600여 통으로 나중에 책 4권의 분량이 되었다.

리스트의 음악세계
  리스트의 음악적 업적은 교향곡이 아닌 교향시라는 제목이 있는 표제음악이다. 쉽게 말해 교향시는 어떤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고 음악을 하나의 시로 표현한 것이다. 리스트의 표제음악 중에‘사랑의 꿈’이라는 피아노 연주곡이 있다. 이 곡은 원래 시인 프라일리히라트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인데, 리스트가 피아노 독주곡으로 편곡을 했다. 이 시는‘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언젠가 무덤 앞에 서서 슬퍼할 시간이 올 것이기 때문에’라는 내용인데, 처음에 연주는 조용하고 감미롭게 흐르다 시간이 갈수록 심장박동이 빨라지듯 감정이 충만한 연주가 필요한 곡이다. 이 곡은 캐롤린과의 사랑의 아픔 속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작품활동이 활발했던 독일 바이마르에 머물던 기간 동안 리스트는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 로시니의‘윌리엄 텔 서곡’, 멘델스존의‘축혼 행진곡’, 슈베르트의‘송어’,‘마왕’등의 가곡들, 생상의‘죽음의 무도’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들을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도록 편곡했다. 그리고‘초절기교 연습곡’이라는 12곡의 연습곡을  작곡했는데, 리스트의 피아노 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며, 탁월한 피아노 기교가 필요한 복잡하고 어려운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대표작으로는 헝가리의 민속음악과 집시음악을 표현한‘헝가리 랩소디’가 있다.

   
   
▲ 리스트 박물관 전시물
   
▲ 리스트 흉상

만년의 리스트
  만년의 리스트는 로마 아씨씨의 프란시스코 수도원에 귀의하여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작곡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1871년 고국 헝가리 왕으로부터 지금의 리스트 음악원인 국립음악학교의 1대 교장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리스트는 로마, 독일의 바이마르, 헝가리에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1886년 여름, 사위이자 친구인 바그너를 기념하는 가극 상연에 참석하기 위해 바이로이트에 갔다가 그곳에서 기관지염이 악화되어 7월 31일에 그 생애를 마쳤다.




기자후기

   
▲ 조선영 기자는 10여 년간 오스트리아 빈에서 종교음악을 전공했다. 다음호에 독자 여러분들이 만나고 싶은 음악가가 있다면 본지 담당자에게.

  피아노 연주자들은 악보 암보 때문에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시초에 피아니스트 리스트가 있었다. 리스트는 처음에 악보를 들고 나와 보면서 연주를 하다가 중간에 악보를 집어던지는 무대 쇼맨십을 보이며 팬들을 열광케 했다. 혹자들은 리스트가 괴팍하고 여성 편력이 심한 사람으로 말하기도 한다. 무대에서 보여지는 그 모습이 그 연주자의 다가 아니다. 그가 하는 연주나 작곡한 곡이 주는 느낌은 사람들을 속일 수가 없다. 그만큼의 감흥이 팬들을 열광시키는 것이리라. 한번은 리스트가 독일시골의 어느 마을에 갔을 때 한 사람이 찾아와 용서를 빌며 리스트의 제자라고 거짓말을 했다는 고백을 듣고는 지금 연주를 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몇 가지 고쳐주며‘이제부터 당신은 나의 제자입니다. 자신있게 사람들에게 소개하시오. 당신의 연주회 끝에 내가 한 곡 연주해 주겠소’라며 용서했다고 한다. 이것 또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자리를 볼 수 있는 이야기다.  38년간 한 여인을 사모하는 마음을 간직한 리스트, 그리고 사랑할 수 있을 때 후회없이 사랑하라는 메시지의‘사랑의 꿈’연주를 들으며 훌륭한 예술가는 절대 평범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