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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이윤구 한동대학교 석좌교수

남북관계 정치적으로 태풍이 불어도 겨레의 핏줄은 통해야 한다

[인터넷 대한뉴스] 글 김윤옥 기자 | 사진 안지형 기자

 

진솔한 언어로, 모금의 대가 이윤구 교수


사회 곳곳에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보이지 않는 지도자들이 많다. 예수의 멍에를 마치 자신이 진 것처럼 오늘 이 시간에도 어려운 이들을 보며 가슴앓이하는 지도자가 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하고 기독교계와 사회복지계에서 큰 어른으로 추앙받는 이윤구 교수. 발로 뛰며 진심어린 말로 사람을 감화시켜 기적 같은 일들을 이룬, 눈물도 많고 전하고 싶은 말도 많은 원로다.


매년 들어오는 100만 달러(당시 환율 9억 원)로 한국의 어려운 곳에 적절히 분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이윤구 월드비전 회장(1991~1996년)은 사서 고생을 했다. 원조 들어오는 계좌를 없애버리고 모금운동에 뛰어들어 1991년 원조 받던 금액인 100만 불 모금에 성공했다. 그에 더해 100만 불 해외원조도 해냈다.

 

30여 년 간 국제기구에서 일한 경험과 간디, 함석헌 선생의 사상은 그가 무소유를 실천하며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행동가로 만들었다. 개성공단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된 지금도 이 교수가 관여하는 단체에서는 사랑의 빵이 두만강을 넘어 현지로 들어가고 있다. 어려운 이들의 부탁을 거절 못하고 없는 여력도 짜내어 당신이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된 유일한 국가 대한민국. 그 전환점의 주인공이었던 이 교수, 왜 많은 사람들이  큰 어른이라고 하는지 알아본다.

 

이윤구 교수는


1929년 생. 신학대학을 나와 미국에서 대학원,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근 30여 년간 기독교 관련 단체 해외 파견 및 유니세프와 UN에서 일했다. 50대 중반 그간의 해외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신대 교수, 한국청소년 연구원 초대 원장, 월드비전 회장, 한국사회복지사협회 회장, 인제대 총장,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했다.

 

100여 나라를 다니며 보고 듣고 느끼며 꿈꿔왔던 이상을 다양한 단체의 수장을 하며 목표보다 10배, 100배의 성과를 거두었다. 81세 되던 해 본인의 나이는 뒤집어 18세,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다며 청년의 마음으로 여전히 사회봉사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젊은이들과의 소통을 위해 현재 한동대학교 석좌교수로 강의도 한다. 연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부인 차신애 여사와는 초등학교 동창으로 삶의 동반자며 지기로서 1남1녀를 두고 60년 가까이 해로하고 있다.

 

삶의 전환기


1952년 강원도 인제 험준한 산속. 타고 가던 차량이 계곡 아래로 떨어졌으나 칡넝쿨이 완충작용을 해줘 다행히 큰 상처 없이 차에서 걸어 나왔다.

 

- 자동차 전복 사고 후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하나님은 왜 저를 이런 죽음의 계곡에서 살려내셨을까. 어떻게 저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차도 사람도 이 정도로 무사할 수 있을까. 내 자신도 의아했지. 힘들게 계곡을 걸어 올라와 차도로 들어서는 순간 어떤 영혼의 힘이 내 혼을 뒤집어엎었다고 할까. 내 생명은 나 아닌 주변의 삶, 가난하고 헐벗은 병든 이웃들을 섬기라고 하늘이 다시 주셨다는 생각이 들며 환희심이 가득 차는 거야. 그날 이후 생의 진로가 바뀌었지. 사람을 진심으로 섬기라는 극적인 전환이 있었어.

 

- 그래서 신학과 사회복지학을 공부하셨죠


신학대학에 다니면서는 빈민굴에서 많이 생활했지. 1961년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서는 강원도 진부령 길도 없는 산속 최전방 화전민들과 한 2년 같이 생활한 적이 있어. 그간 배움을 실천하려했는데 당시는 봉사니 복지니 하는 말조차 없을 때라 한집에서 50여 명의 마을 주민과 같이 생활하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사를 도와주는 나와 집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보여 간첩으로 오인 받아 문초도 당했어. 그리고 전라남도 해남에서는 구호물자 먹어가며 바다를 메워 논밭을 일구었지. 남해안은 염분기가 많지 않아 간척지를 만든 바로 그 이듬해 수확했으니 국제기구 직원들이 기적으로 생각할 정도였어.


1990년대 이미 미래창조를


국제기구에서 일하며 저개발국의 실상을 잘 알고 있던 이 교수에게는 꿈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어려운 나라를 돕는 원조국이 되도록 하자. 지금은 전 세계에서 한국의 많은 기업과 종교집단이 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나 불과 25년 전만 해도 우리는 원조를 받던 나라였다. 남이 간 길을 가는 것은 쉽다.

 

허나 이 교수는 항상 새로운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모금의 불모지 시절 목표 달성을 위해 사랑의 빵, 기아체험 24시간, 사랑의 쌀 보내기 등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로 일을 만들고 주도했다. 이 교수가 벌려 놓은 일들은 현재까지도 월드비전의 주력 사업이다.

 

- 1991년 월드비전에서 역사적인 일이 있었죠


90년 대 들어 ‘언제까지 얻어먹느냐. 40년간 해외에서 원조를 받았으면 됐다. 이제 우리나라도 살만하니 더 이상의 원조를 받지 말고 우리 힘으로 하자’하니 어떻게 모금을 하려고 하느냐는 우려가 많았지. 무모하고 무리한 일일 수도 있었지만 결국 우리는 해냈어. 한번 마음먹고 뛰니 못할 것이 없었지. 백만 불 원조를 끊은 그 해 ‘각설이’ 소리 들어가며  월드비전 식구들과 열심히 뛴 결과 세계월드비전으로부터 지원을 거부한 딱 100만 달러가 모금된 거야. 기적이었지. 그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력이었어.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3년 6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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