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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사)한국국악협회 홍성덕 이사장 4대가 국악인 가족

국악 문화에 충·효 정신 이어갈 터’

   
(사)한국국악협회 홍성덕 이사장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국가도 단체도 가정도 미래와 역사가 바뀐다. 박정희 대통령은 보릿고개를 넘기고 경제를 일으켜 선진국으로 가는 초석을 다졌다. 딸은 대한민국 최초 여자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이다. 핏줄로 이어진 가문의 뿌리와 정신은 무엇보다 나라 사랑이 먼저였다.

한국국악협회 홍성덕 이사장은 세계적으로 독특한 공연예술 여성국극을 국악의 한 분야로 새롭게 정립한 장본인이다. 부모를 비롯하여 자식과 손녀까지 집안의 4대가 국악인이다. 국악협회 이사장 취임 후 열과 성을 다하여 협회의 면모를 일신하고 있다. 홍 이사장을 만나 국악의 가르침과 정신, 뿌리, 혼, 애환 등 이야기를 나눴다.

3전4기 끝에 국악협회 이사장에 취임

홍성덕 이사장은 2012년 2월 (사)한국국악협회 제25대 이사장으로 선거에서 당당하게 선출되어 2백만 국악인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다. 이사장 후보 선거에서 3번 떨어지고 재도전하여 4번째 이뤄낸 쾌거였다. 당시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새끼를 잃은 어미의 심정을 뭐라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라며“아들의 바람대로 국악협회를 위해서 그리고 국악인의 화합을 위해서 그 역할을 다 할 것입니다”고 말했다. 기쁨에 앞서 아들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니 어떤 사연인지 궁금증에 대한 해소는 잠시 뒤로 미루고, 이사장 임기를 맡으면서 어떤 발전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빚도 갚고 협회 사무실은 전세로 돌리고

(사)한국국악협회는 1962년 1월 26일 정부로부터 승인받았다. 문예, 정악, 창악 등 12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하고 초월 박삼순 씨를 초대 이사장으로 추대하였다. 1970년 6월 8일을 국악의 날로 제정하고 2002년 1월 31일 서도소리분과 위원회 신설 및 기타 분과위원회 조정을 거쳐 오늘날 전국 18개 지부가 있다. 해외에는 LA, 뉴욕, 댈러스, 애틀랜타, 일본에 지부를 만들었고, 연변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으로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올해 초에는 애틀랜타한인회 한인회관 건립기금 모금 및 설맞이 한민족 국악대축제를 열었으며 만 불(1100만 원 정도)을 기부하여 따뜻한 동포애를 나눴다.

단체장을 잘 만나면 단체의 위상이 바뀌듯 국악협회의 위상도 높아졌다. 국악협회 사무실은 목동 예총회관에 있었다. 종로는 1961년 국악협회가 창설되면서 국악이 발전하기 시작했던 모체 같은 곳이다. 홍 이사장은“거리가 멀면 두 번 올 것도 한 번 오니 누구나 쉽게 찾아올 수 있어야 한다”며 회원들의 배려 차원에서 사무실을 종로로 옮겼다고 했다. 그런데 이사를 하려니 비축된 돈이 없었다. 전임들의 퇴직금도 사비를 털어 어렵게 마련했고 빚도 갚고 사무실 임대도 전세로 돌렸다.

국악의 상징 종로를 국악의 거리로
미래는 협회 차원의 국악건립회관이 꿈

   
 

최근 7월 26일~9월 20일 종로3가 묘동 사거리 국악로에서 열린 2014국악공연상설운영‘노(路)리노(路)리 토요국악상설공연’은 매주 매회 다른 공연으로 관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그 외 판소리·민요·무용·농악 페스티벌을 펼쳐 국악 대중화에 앞장섰다. 홍 이사장은 국악 홍보에 지원과 관심을 가져준 박원순 서울시장과 김영종 종로구청장에게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2백만 국악인을 대표해서 답례의 박수를 보냅니다.”미래 청사진은 무엇일까.

전통의 토대 위에 국악공연의 다양화를 시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국악인들을 위한 국악건립회관이 꿈이라고 한다. 또한 임기 내에 멀지 않아 어느 지역이든 가리지 않고 원로 국악인들이 편하게 쉴 수 있고 후진들을 이끄는 소리연습장을 준비하고 있다고 속내를 내비쳤다.

정부에 바라는 점은 무엇인지 물었다.“돈이고 명예고 돌보지 않고 국악에 미쳐 평생을 바쳐온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국악의 맥이 끊겼을지 모릅니다. 정부 관계자분들의 우리 문화를 지킨다는 의지와 신념으로 적극적인 지원 정책이 절실합니다.”고 호소했다.

회원들에 대한 마음속 생각은 이렇다.“어느 분야나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어렵고 힘든데 특히 예술인들은 개성이 뚜렷해서 더욱 그렇습니다. 국악인들의 화합을 위해 잘하려고 노력하고 또 국악인들이 잘 따라주고 있어 고맙게 생각합니다”라며“내가 뭐 도와줄 거 없을까?”라고 물어본다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낮추고 먼저 그렇게 말을 꺼낸 사람은 지금까지 홍 이사장이 처음이라고 주변에서는 입을 모았다. 이사장직을 수행하면서 일군 업적을 잠깐 살펴봤다. 이제 홍 이사장의 개인적인 아픔과 국악계가 큰 인재를 놓친 안타까운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온 가족이 매달려 열과 성을 다해 준비한 제37회 전주대사습놀이

   
 

홍 이사장은 (사)전주대사습놀이보존회 이사장을 20 06년, 2010년 두 번 역임했다. 그중 2011년 제37회 전주대사습놀이는 좀 특별했다. 매년 열리던 전주 실내체육관 대신 전주한옥마을에서 펼쳐져 전국 명창을 비롯한 모든 국악인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함께 즐기는 축제로 만들었고, 2010년에 이어 2011년에도 TV MBC에 생방송 되도록 노력을 기울여 성사시켰다.

홍 이사장의 아들인 김태현 한국여성국극예술협회 기획실장은 대회를 위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직접 챙기고 준비하며 동분서주했다. 전국에서 심사위원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전주역에서 한옥마을까지는 택시로 기본요금이면 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으나 김 실장은 손수 운전하여 역까지 마중을 나갔다.“귀하신 분들이 멀리서 오시는데 정성이라도 쏟아야지요”라며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모셨다.

한옥마을 경기전에서는 늦은 밤까지 각종 전야제 축하 공연이 펼쳐졌다. 전야제공연에 홍 이사장의 딸 김금미(현 국립창극단) 명창이 참여했다. 김금미 명창은 2007년 제33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명창부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전야제를 마치고 모든 사람들이 다음날 치러질 본선을 기약하며 숙소로 향했다. 김 실장은 홍 이사장에게 말했다.“어머니~아무 사고 없이 행사가 잘 끝났어요. 내일 본선 때문에 쉬러 숙소로 가려고요.”홍 이사장은 아들에게 고생했다며 편히 쉬고 내일 보자고 말했다. 그것이 아들에게서 듣는 마지막 목소리가 될 줄이야.

2011년 6월 12일,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날

예선 날 홍 이사장은 MBC 전주 공개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여 있는 심사위원들이 반가워 다가갔다.“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웬일인지 걱정하는 눈빛으로 한숨으로 홍 이사장의 눈길을 피하는 것이 아닌가.“왜 그러지? 무슨 일이 있었나? 나한테 서운한 감정이 있는가?”내심 걱정하며 축사를 마치고 단상을 내려왔다.

조금 후, 국악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승용차를 타지 않고 버스를 타려는데 만류하는 소리가 들렸다.“이사장님 내려오세요. 갈 데가 있어요.”홍 이사장은 영문도 모른 채 승용차에 올랐다.“나를 태운 차가 전북대병원 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참 이상하다~심사위원 중에 누가 사고 났어요?”라고 물었으나 홍 이사장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다.

병원에 도착하자 병실 쪽이 아닌 영안실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누가 죽었나?”의아심이 드는데 영안실 문이 열리자 바로 정통으로‘김태현’이름 석 자가 한눈에 들어왔다.“어? 우리 아들 이름과 똑같네~ 라고 속으로 생각하는데 영안실 직원이 죽 잡아당겨 덮였던 보를 들췄다. 홍 이사장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아이고~기여요. 딱 보니 내 아들 태현이요.”김 실장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서도 행사를 걱정하며 혼자 외로이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실장은 전야제 마지막까지 어머니를 도와 행사 마무리를 하고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내, 국악인 후배 등 네 명이 함께 차에 타고 있다가 상대방 운전자 실수로 차가 두 동강이 나는 큰 교통사고가 났다. 모두 두 명이 죽고 그의 아내는 한국무용을 전공한 재원이었으나 아직도 병원에서 치료중이다. 그렇게 큰 사고는 역사에 없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김 실장은 한창 나이인 39세에 운명했다. 2011년 6월 12일 일요일 새벽에 일어났던 일이다. 관계자들은 행사에 혹 지장이 있을까 염려하여 홍 이사장에게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뒤로 미뤘던 것이다.

김태현 실장‘국악계 최고의 기획자,
효자인 우리아들이 날 버리고 갔어요

“엄마 일을 돕던 효성이 지극한 내 아들이 왜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 있단 말인가. 차라리 꿈이었으면 차라리 노망이 들어 헛것이 보였으면…”홍 이사장은 아들을 국악의 길로 이끌지 말 것을, 바쁘다는데 전주대습놀이에 못 오게 할 걸, 뒤늦게 밀려드는 후회에 가슴을 치고 또 쳤다. 김 실장은 전주대사습놀이 행사가 있던 날 대구에서 큰 행사가 있었으나 홍 이사장이“네가 나 좀 꼭 도와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자 차마 거역을 못 하고“제가 내려가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대구로 향하던 차를 돌려 전주대사습놀이와 국악을 위해 희생했다.

타고난 재능은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았다. 김 실장은 청소년기 방황하던 시절에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여 추계예술대 국악과에 들어갔고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후 박사학위를 밟고 있었다.

김 실장은 자기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하루는 이른 아침 느닷없이 홍 이사장의 집을 찾아왔다. 그날따라 엄마가 마치 남자라도 감추고 있는 것처럼 이 방 저 방 문을 열어보더니 말했다.“엄마~나 무척 좋아하지마. 우리 때문에 평생 외롭게 지냈는데 이젠 남자 친구도 사귀고 그러세요. 제가 잘해드릴게요.”라고 나직이 입술을 움직였다. 홍 이사장은 29세 때 홀로 되어 오로지 자식만 바라보고 아들이면서 남편 겸 여기며 의지했다.

“자식이 보는 엄마는 누가 뭐래도 이 세상 국악인 중에서 엄마가 최고야! 아들이 알아주면 됐지~”라며 엄지손가락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면서“꼭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 돼서 좋은 일 많이 하고 큰 역할해야 돼요”라고 말했다.

홍 이사장은 귓가에 쟁쟁히 맴도는 그 소리에 지금도 가슴이 우릿해왔다. 눈만 감아도 전주대사습놀이 행사 때 그날따라 국악에 더욱 큰 관심을 갖고 잘해주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아들아~내 아들, 오직 너 하나 믿고 평생을 살아왔는데 나를 버리고 갔구나~”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고 실오라기라도 잡고 싶은 감당키 어려운 깊은 슬픔 속에서도 국악협회를 위해 큰일을 하라는 아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나보고 따라오지 말라는 뜻이구나 여기며 아들의 바람대로 국악협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오로지 협회만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는 중이다. 홍 이사장은 행정가이면서 또한 뼛속까지 예인의 피가 흐르고 천 년의 소리를 읊는 판소리 명창이다.

홍성덕 이사장의 뿌리

1945년 전북 전주에서 무남독녀로 출생. 아버지 홍두환 고수는 우리나라 창극의 효시인‘협률사’의 단장이며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홍정택 명창의 형님이다. 어머니는‘육자배기’를 구성지게 잘 불렀던 김옥진 명창이다. 또 그의 증조부는 우리 민족 최초 민중 봉기인 동학농민혁명 당시 천민부대를 이끌었던 홍낙관, 홍진관 대장이다. 그 후 곳곳에서 의병운동과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3·1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올해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 홍 이사장 가문의 뿌리가 갖는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홍 이사장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소리를 들었고 태어나서 보고들은 것도 소리가 전부였다.‘쑥대머리’의 임방울, 판소리 인간문화재 박봉술, 남도 명창 박초선, 박초홍 명창 등이 노래하는 모습을 어려서부터 보아왔다. 6세 무렵 흥부네 막내 역을 했었다.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긍께~ 소리꾼이 돼서 뭣에 쓴당가. 안 된당께”라며 등짝을 맞았던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한겨울 추위에 의상 궤짝에 들어가 몸을 녹이기도 했고, 어머니는 치마를 벗어서 덮어주기도 했다.

10세 때 산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고수가 던진 북채에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자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손으로 막으면서도 창을 배우고자 하는 집념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강도근 선생에게 흥보가 사사, 홍정택 선생에게 수궁가 사사, 오정숙 선생에게 심청가와 춘향가 사사, 김소희 선생에게 남도민요를 사사 받았다. 모두 우리나라 최고의 명창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1982년도 생사의 갈림길에 닥쳤다. “장암이었습니다. 대수술을 몇 차례 받았지만, 의사로부터 회복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지요. 밥 한 톨, 물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니 장작개비처럼 깡마르더군요. 그런데 어차피 죽을 것 밥이라도 먹고 죽자고 생각하니 희미하게 다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죽음 앞에서 자식들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홍 이사장은 아버지 홍두환 고수, 어머니 김옥진 명창 그리고 아들 김태현, 딸 김금미, 손녀 박경주, 조카 김세미, 김선미까지 4대가 국악인 가족이다. 한편, 어머니가 즐겨 불렀던 전라도 대표 민요‘육자배기’를 여성국극 활성화의 하나로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여성국극이란 무엇인가.
여성국극을 국악의 한 분야로 새롭게 정립

1950년대 초 창극을 대표하는 여성국극은 여성들로만 구성되어 우리 전통의 창과 춤 그리고 연기를 혼합한 예술로 남성 역할도 여성이 맡았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매력, 화려한 의상과 분장 무엇보다 공연내용에 대중들이 공감하면서 인기가 높았으나 50년대 후반, 대중들은 영화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서 여성국극이 시들해졌다.

그러던 차 1960년대 홍성덕 이사장은 임춘앵 여성국극단에서 선화공주 역의 주인공을 맡으며 국극계에서 왕성하게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나 기업체의 지원 없이 여성국극의 전통을 이어가기는 어려웠다. 1987년 서라벌국악예술단을 창단하고 사라진 여성국극을 적극적으로 알려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돈벌이가 되는 판소리나 할 것이지 왜 사서 고생하느냐”며 핀잔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1995년 한국 공연단체로는 처음으로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내 뜻은 청산이요’초청공연을 가졌고, 그 후 미주 9개 도시 순회공연 등 침체하였던 여성국극을 국악의 한 분야로 정립시켰다. 외국에 나가면 태극기만 봐도 눈물이 찡한데 국악을 국내에서 듣는 것과 타국에서 듣는 것은 천양지차다. 지난 50여 년 동안 100회 가까운 국내공연과 40회의 해외공연을 통하여 국악의 세계화를 위하여 총력을 기울여 민간예술을 통한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리고 홍 이사장은 10월 11일 제33회 대한민국 국악제와 11월 1일 광화문 광장에서 처음 열리는‘통일국악제’준비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국악 속에 흐르는 충·효의 정신

충·효의 정신과 국악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국악과 한복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소리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판소리할 때, 살풀이 할 때 등 각 장르에 맞는 한복을 입고 준비하는 과정은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충은 전통의 뿌리를 이어가는 우리 가락이고, 효는 우리 옷 한복을 가리킨다. 일반 옷과 달리 한복은 어머니가 아무리 바빠도 손수 한 땀 한 땀 짓던 지극정성이 배어있고 그 옷을 입고 나가면 걸음걸이부터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잡아주는 데 그 속에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느낄 수 있다.

홍성덕 이사장을 인터뷰하며 한정된 지면에 국악의 방대한 내용과 국악인의 일생을 다룬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국악의 소리란 한이 서리지 않으면 소리가 익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소리를 배우면서 겪은 설움과 인내 그리고 한때는 저세상 사람이란 소리도 들었고, 아들을 잃은 슬픔 등 세월의 한이 심금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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