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 격 : 30 × 18㎝
·재 료 : 캔버스 × 유채
·제작년 : 1950년 2월 23일 동경중앙우체국 발매우편 書簡(편지지)
·서 명 : 오른쪽 하단
·출 처 : 1950년대 당시 CID조사관 H씨
·재 료 : 캔버스 × 유채
·제작년 : 1950년 2월 23일 동경중앙우체국 발매우편 書簡(편지지)
·서 명 : 오른쪽 하단
·출 처 : 1950년대 당시 CID조사관 H씨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오산고등보통학교 당시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일본 분카학원 미술과에 입학해 재학 중 출품해 신인으로서의 주목을 받았다. 1940년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해 협회상을 수상했고, 1943년에도 같은 협회전에서는 태양상을 수상했다. 이 무렵 야마모토와 1945년 원산에서 결혼해 2남을 뒀다. 이중섭은 원산사범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6·25전쟁 때 월남하여 종군화가 단원으로 활동했으며 신사실파 동인으로도 참여했다. 월남 이후에는 각지를 전전하며 그림을 그렸고,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 대신 쓰기도 했다. 이 무렵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며, 이중섭은 홀로 남아 부산, 통영 등지를 전전했다. 1953년 일본에 가서 가족들을 만났으나 며칠 만에 다시 귀국했다. 이후 줄곧 가족과의 재회를 염원하다 1956년 정신이상과 영양실조로 40세에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 화단활동은 부산 피난시절 기조전과 신사실파에 일시 참여한 것 외에 통영, 서울, 대구에서의 개인전이 기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