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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뉴스 월드컵이야기)대한민국, 아시아 최초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참가한 국가

현해탄에 빠져 죽을 각오로 치른 첫 한·일전



(대한뉴스 박혜숙 기자)=~민국! 짝짝짝~, 짝짝!’ 이 소리가 들립니까! 4년마다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는 월드컵 때면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감동적인 응원 소리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처음 박수 소리가 들린 후 이 소리는 선수들과 온 국민을 하나로 묶는 힘이 되었다. 그전에 1954년에는 도쿄 한복판에 최초로 태극기가 게양되는 역사적 순간도 있었다. 2022 FIFA 카타르 월드컵이 열리고 있다. 개최지와 간략한 대회 일정 소개, 그리고 월드컵 관련 감동적인 이야기를 둘러보자.

 


22회 카타르 월드컵

 

국제축구연맹(FIFA)주관, 개최지는 카타르, 대회 기간은 20221121~ 1218일까지, 대회 규모는 5대륙 32개국이 참가한다. 대회는 카타르의 무더운 기후 관계로 통상적인 계절보다 늦은 11월과 12월에 열리며 카타르 도하 및 도하의 위성도시 총 5개 도시 8개 경기장에서 펼쳐진다.

 

한국은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 올라 이란, 아랍에미레이트, 레바논, 이라크, 시리아와 함께 A조에서 본선 진출을 다투게 되었다. 2022329일 아랍에미레이트 전에서 패배하여 10721패를 기록, 승점 23(득실차 +10)을 기록, 이란에 이어 A2위를 기록하면서 본선 진출을 확정하고, 브라질, 독일,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스페인에 이어 세계에서 6번째로 월드컵 본선에 10회 연속 진출하는 기록을 세웠다. 한국은 포르투갈, 가나, 우루과이와 함께 H조에 편성되었다.

 

개막전은 20221121일 오후 1(현지 시각) 도하에서 40km 북쪽에 있는 알코르 시에 있는 알바이트 스타디움에서 개최, 결승전은 1218일 오후 6시 수도 도하의 북쪽에 인접한 위성도시인 루사일에 있는 루사일 스타디움에서 개최된다.

 

경기장은 카타르의 수도 도하, 루사일, 알라얀, 알와크라, 알코르에 분산되어 있다. 카타르가 워낙 작은 나라여서 북쪽 40km 거리에 있는 알코르를 제외하고는 모두 수도 도하에 인접한 위성도시로, 도하 도심에서 10~20km 거리에 있어 서로 무척 가까운 것이 특징이다.

 

월드컵의 탄생

1924, 파리에서 피파(FIFA, 국제축구연맹) 총회가 열렸다. 여러 나라에서 프로와 아마추어 축구팀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올림픽에 맞서는 세계 축구 대회를 한번 열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피파 회원국들은 모두 찬성하고 대회 이름을 '월드컵'으로 정했다. 1929, 바르셀로나 피파 총회에서 회원국들은 월드컵에 대해 여러 가지 의논을 했다. 대회는 4년에 한 번씩 열자고 결의했고, 1회 대회는 1930713,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남미와 유럽의 13개 팀이 참가한 첫 월드컵이 열렸다. 마침 독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와도 일치했다. 오늘날 올림픽이 열리는 중간 해에 월드컵이 개최되는데 이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1회 우루과이 월드컵, 결승전 전반과 후반 서로 다른 공 사용

 

1회 월드컵 대회가 열리기 두 달 전까지 유럽에서는 단 한 나라도 경기 참가 신청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럽이 세계 1차 대전을 치르고 전쟁 복구로 정신이 없어 경기를 열 만한 형편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국제축구연맹(FIFA) 줄리메 회장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대회 홍보에 나서면서 유럽 네 나라를 포함한 열세 개 나라가 첫 번째 월드컵에 나섰다. 1930년에 열린 1회 월드컵 대회를 치른 나라는 남미의 우루과이였다. 1930713일부터 30일 동안 우루과이의 세 개 경기장에서 열렸다. 결승전엔 개최국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가 올라왔는데 42로 우루과이가 이겨서 첫 우승컵을 안았다.

 

우루과이에 월드컵 첫 우승이라는 영광을 안겨 준 선수는 카스트로였다. 카스트로는 어릴 때 오른쪽 팔을 다쳐서 잘라냈다. 더군다나 왼쪽 다리가 오른쪽 다리보다 조금 짧아서 여간 불편한 몸이 아니었다. 달리는 모습이 마치 비틀비틀 춤을 추는 것처럼 불안해 보였다고 한다. 오른팔이 없는 대신 카스트로의 오른발은 무서운 폭발력을 지니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페루와 치른 예선 첫 경기에서 후반전 43분에 결승 골을 터뜨려 우루과이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 뒤 묵묵히 경기를 치르다가 마침내 아르헨티나와 결승전에서 다시 한 골을 터뜨렸다. 우루과이가 32로 아슬아슬하게 앞서던 후반 44분에 우승에 쐐기를 박는 골을 터뜨려 우루과이에 월드컵 첫 우승이라는 영광을 안겨 주었다.

 

우루과이 월드컵 결승전에서는 전반과 후반에 서로 다른 공을 썼다. 결승전에 오른 아르헨티나는 자기 나라에서 만든 공을 쓰자고 했고, 개최국으로 결승에 오른 우루과이 또한 자기 나라에서 만든 공을 쓰려고 했다. 두 나라 주장이 팽팽히 맞서자 마침내 뽑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아르헨티나가 이겼다. 그래서 전반전은 아르헨티나 공으로, 후반전은 우루과이 공으로 경기를 치렀다.

 

·일 예선전 승리, 도쿄 한복판에 최초로 태극기 게양

 

5회 스위스 월드컵 개최 기간은 1954616~ 74일까지 진행됐다. 피파는 아시아 지역에 월드컵에 참여할 수 있는 티켓 3장을 한국, 중국(당시 중화인민), 일본에 보냈다. 중국은 월드컵 참가를 포기하여 한국과 일본이 예선전을 치르게 되었다. 최초의 한·일 예선전을 치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1954년은 식민지로부터 벗어난 지 9, 한국전쟁 휴전 1년밖에 되지 않은 시기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일본과 싸워서 지면 어떻게 하냐, 각 나라에서 경기를 번갈아 치르는데 일본이 한국 땅을 밟게 해서는 안 된다 등 무조건 참가를 반대했다. 지게 되면 전쟁 직후 상심이 큰 국민에게 더 큰 상처를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이유형 감독은 끈질기게 대통령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예선전을 치르지 못하면 일본에서 모든 경기를 치르겠다고 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만약 일본과 싸워서 진다면 현해탄(지금의 대한해협)에서 빠져 죽겠다는 각서까지 썼다고 한다. 그런데 명색이 국가대표 선수이지 변변한 유니폼도 축구화도 없었다. 선수들은 사비를 들여 티셔츠를 사고 직접 바느질로 이름과 번호를 새긴 유니폼을 만들었다. 축구화는 심지어 나무로 만든 신발이라 못이 뚫고 올라와 발을 찌르기도 했다. 직접 만든 유니폼을 입고 나무신을 신고 열심히 훈련했지만, 막상 일본으로 갈 비행기 표를 살 돈이 없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재일동포들이 십시일반 모금 운동을 벌여 비행기 표를 사주었다. 195431일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도쿄에 도착했다.

 

한국 선수들은 일본에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을 각오를 했기에 한·일전 경기는 전쟁 그 자체였다. 경기가 열린 3월의 날씨는 이상 한파로 인해 폭설에 맹추위가 덮쳤다. 장비도 제대로 없던 한국 선수들은 축구화에 고춧가루를 넣고 열이 나게 해서 뛰었다고 증언한다. 목표는 단 하나, 월드컵 진출은 아예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일본을 이기자였다. 5회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맞붙은 한·일전은 1차전 195437일 도쿄 51 , 2차전 1954314일 도쿄 22 무승부로 한국이 스위스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따냈다. 도쿄 메이지 왕립 스타디움, 도쿄 한복판에 최초로 태극기가 게양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한국은 월드컵에 진출한 첫 아시아 국가가 되었다.

 

스위스 월드컵 개막 후 스위스에 도착한 한국 선수들

 

당시 한국은 일본에 이겼을 경우 그다음 여정은 어떻게 될 것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국가대표팀은 난관에 부딪혔다. 스위스까지 가려면 비행기 표를 예약해야 하는데 예약이라는 것 자체를 몰랐다. 가난한 나라에서 후원을 해 주는 것도 아니고 사비로 개인마다 비행기 표를 사야 했다. 어찌어찌하여 좌석을 예약했는데 1명의 선수가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했다. 난감해하던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던 영국인 부부가 말을 걸어왔다. 여행 중인데 자기들은 다음 비행기 표로 갈 테니 먼저 가라며 비행기 표를 한국 선수에게 양보했다. 드라마 같은 우여곡절 상황을 극복하고 스위스에 도착했다. 월드컵 개막식을 치른 후였다.

 

월드컵 본선 경기 헝가리에 완패, 세계는 한국 선수에게 열광

 

월드컵 역사에서 지금까지 두 팀이 가장 크게 벌어진 점수 차이는 9골이라고 한다. 이러한 신기록(?)을 세운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헝가리와 맞붙어 실력 차이를 느낀 한국 선수들은 수비에만 몰두했다. 어느 순간 세계 무대에서 한국인의 자존심이 무너진듯한 창피함을 느꼈다고 한다. 다시 죽을힘을 다해 경기장을 뛰어다녔다. 결과는 단 한 골도 못 넣은 채 90 점수 차이로 지고 말았다. 완패였다. 그러나 세계의 이목은 한국 선수단에 쏠렸다. 열심히 경기를 치른 선수들 패기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며 여기저기서 유니폼, 축구화 등 후원이 밀려들어 왔다. 아프리카 최빈국에서 참가한 국가에 승리와 상관없이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것과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우리나라는 2002년 제17회 한일 월드컵에서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4강 신화를 창조했다.

 

한편, 한국의 첫 번째 국제 대회는 런던 올림픽이다. 1948년 제14회 런던 올림픽은 뜻깊은 대회이다.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일장기 대신 태극 마크를 달고 다른 나라와 경쟁을 한 대회이기 때문이다. 처음 국제 대회에 참가한 우리나라의 축구팀은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53으로 승리해 8강에 진출했다. 그 뒤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120으로 크게 지기는 했지만, 스웨덴은 당시 올림픽 축구 경기에서 우승한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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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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