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뉴스 혜운기자)=싱그러운 꽃향기와 나른하게 불어오는 봄바람에 기분 좋아지는 계절이다.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몸을 풀고 산으로 들로 나들이를 가는 사람들이 많다. 40~50년 전 '서울사람' 치고 봄에 '창경원' 나들이 한 번 안 가본 이가 있을까. 활짝 피어난 벚꽃구경을 하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창경원은 봄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벚꽃구경에 아이 잃는지 모르고
창경원은 국민의 나들이 장소로 각광받았지만 조선의 궁(宮)이 한낱 '사냥이나 놀이를 즐기는 나라의 동산'을 가리키는 말인 원(苑)으로 바뀐 것은 일제의 음흉한 계략이었다. 일제 치하였던 1909년부터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불렸는데, 일제가 창경궁의 위엄을 격하시키기 위해 벌인 일. 창경원으로 이름이 바뀐 후 창경궁의 전각이 헐리고 일본 벚꽃나무 수천 그루가 심기는 등 창경원은 그야말로 몸살을 앓았다. 순종은 백성들이 부담 없이 즐기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과연 그 속마음까지 그랬을까
왕의 숙소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된 만큼 사람들은 창경 원에 열광했고 1924년부터 시작된 밤 벚꽃놀이는 경성시민의 10%가 올 만큼 그 인기가 대단했다. 1930년대 신문에 창경원은 봄소풍 추천장소로 언급된다. 1935년 4월 12일 동아일보는 창경원의 봄소식을 전하며 "창경원의 '밤벚꽃' 은 경성시민에게 해마다 내리는 동원령이다. 그저 시간이 바쁘든 말든 설거지도 던져버리고 창경원으로 창경원으로"라고 썼다. 먹고 즐길 것, 쉴 시간과 공간도 부족했던 때다. 입장료가 싸고 꽃구경, 동물구경을 함께 할 수 있는 창경원은 그야말로 최적의 나들이 장소였던 것. 많은 사람이 창경원에 모이다 보니 분실물 사고나 미아가 심심찮게 발생하는 문제도 있었다.
"춘당지의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옆 눈으로 보는 둥 마는 등 연예장으로 걸음을 빨리한다. 소녀 하나가 무대에 나타나서 '찰스딴스' 를 자유자재로 뽐내어 보이자 관중은 숨을 죽이고 있는데 삽시간에 암흑세계가 되었다. '휴즈가 끊어졌으니 회중물을 주의하시오' 라는 방송이 퍼진다. 이 소리가 끝나자마자 '아이고 이런 주머니가 없어졌어' 라고 노인의 놀랜 소리에 관중의 웃음이 터졌는데 스리 맞은 주머니란 쓰디 쓴 담배가루뿐이었다니. 모처럼 공들인 스리한 이에게 미안 천만의 일이다. 해마다 있는 일이지만 출구 옆에 있는 창덕궁 경찰서입시 출장소에서 '어린애 찾아가시오' 라는 소리가 아니 들리고 써진 간판이 보이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구경도 좋지만 귀여운 아들, 딸까지 모른 체 한다는 것이야 화려한 꽃세계의 살풍경이 아닐는지,"(1935년 4월 12일 동아일보) 。
창경원 동물짝직기부터 불임까지 ‘관심’
광복 후에도 창경궁의 위엄은 돌아오지 않았다. 꼬마비행기, 회전목마, 끼리열차 등 놀이시설이 갖춰지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서울시민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창경원의 동물원도 더욱 번창했다. 1957년 5월 3일 경향 신문에 의하면 창경원에는 더 많은 동물들이 입적됐다. "우리나라에 입국한 청공작 두쌍을 비롯하여 백공작 두 쌍 청여우 두 마리, 금은계 각 두 쌍, 폐리캉 한 마리, 그리고 호로호로새 두 쌍과 하마 두 마리 등 아홉 종류의 동물이 사일 이른 아침 입경할 것이다. 이들은 즉시 창경원 동물원의 멤버로 입적, 다음날부터 동물원을 거쳐 가는 시민들 앞에 출현할 것이다.“
1963년 12월 3일 경향신문은 '창경원에 경사가 났다' 는 제목으로 말과 호랑이들의 짝짓기 소식을 전했다. "창경원에 경사났다. 창경원의 말과 호랑이들은 부지런히 성례를 서둘러 우선 약혼부터 해놓았다. 성급한 쌍쌍이들, 잔칫날은 아직 미정. 우선 청첩부터 돌린다. 짝 잃은 일본산 말인 대원호 군과 이번 에 새로 제주도에서 데려온 네 마리의 조랑말 재건호, 경북호, 조운호, 경운호 양 등이다. 한꺼번에 네 명의 신부를 얻게 된 신랑 대원호 군. 벌써 코를 벌름벌름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호랑이 쌍쌍이는 적어도 국제결혼. 창경원 측은 우선 청첩부터 내놓고 새살림은 내년 봄이나 되어야 차려줄 것이라는데 호랑이의 경우 신부는 15세에 신랑은 10세로 좀 걱정도 된다는 것."
어느 동물이 들어오는지, 몇 마리가 들어오는지, 결혼(?) 상대는 누군지 세세히 기사화될 정도로 환영받으며 창경원에 들어온 동물 중 대를 잇지 못하는 동물은 안타까움을 낳기도 했다. 1978년 3월 18일 경향신문은 "우리 속에 갇힌 창경원 동물들이 생식기능을 잃어가 대가 끊어지고 있다. 호랑이, 코끼리 등 창경원의 맹수류가 20여 년 동안 한 번도 새끼를 낳지 못하고 있고 번식력이 강한 원숭이류마저도 짝을 지어주지 못해 새 봄을 맞아 창경원 당국의 고민이 대단하다" 고 기술했다. 이 동물들이 생식기능을 잃은 원인은 뜻밖이다. 신문에 따르면 창경 원 동물이 번식력을 잃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소음과 먼지 등 각종 도시공해에 시달리기 때문이라고. 생물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인 생식기능을 살려주는 것은 사람의 의무라며 호소하고 있기도 하다.
창경원에서 다시 창경궁으로
1980년대 들어서며 창경원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광복을 맞은 지 40여 년이 되도록 아직도 식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데에 따른 것. 1983년 8월 17일 정부는 창 경원 복원 정비를 위해 1984년 1월 1일부터 2년간 창경원 공개 를 중지하고 일제가 붙인 창경원이란 명칭 대신 원래 이름인 창경궁으로 부르기로 결정한다. 창경궁을 복원하기로 하면서 창경원의 동물들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1983년 10월 8일 자 동아일보는 창경원 동물들의 이사가는 풍경을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 "73년 11개월 8일 동안 서민들 의 도심공원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창경원 동물원의 동물들이 경기도 과천의 서울대공원으로 이사를 했다. 사육사가 던진 나일론 포획망에 붙잡혀 나무상자 속에 들어간 공작은 청록색 꼬리를 흔들며 정든 우리를 떠나기 싫은 듯 '꺽꺽' 울어댔다. 곧이어 검은댕기 해오라비도 사육사에서 붙잡혀 나무상자 속에 넣어졌는데 검은 댕기를 흔들며 영문도 모르고 재롱을 피웠다. 동물들의 이동순서는 성질이 온순해 다루기 쉬운 동물부터 시작됐는데 내년에 옮겨질 대형동물들은 동물원 이동작전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다." 동물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춘당지에 살고 있는 잉어와 붕어 들의 거처에도 관심이 쏠렸다. 1983년 11월 3일 경향신문에 따르면 '춘당지의 잉어와 붕어는 이사를 가지 않느냐' 는 전화가 경향신문사에 쇄도했다고 한다. '창경원의 외톨이 비단잉어' 라는 제목 아래 실린 기사가 자못 재미있다. "춘당지의 물고기들도 사자나 코끼리 등 다른 동물들에 못지않게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것이다. 그러나 춘당지를 보금자리로 삼고 있는 물고기가족들의 거취는 창경궁 복원계획에 따라 아직은 유동적이다. 일본식인 지금의 타원형연못을 네모꼴로 그 모습만 바꾸게 되면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다. 하지만 춘당지 자체가 없어지게 되면 어디론가 이주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다. 몸통길이가 78~80cm나 되는 황금빛잉어와 은빛붕어 및 자라 등은 태평스럽다. 오직 다른 동물 가족들과의 작별을 아쉬워하며 제 갈 길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1986년 8월 23일 드디어 창경궁이 문을 열었다. 1,320여㎡ (400여 평)의 회랑을 복원해 옛 궁정의 위엄을 되살렸을 뿐 아니라 벚나무 대신 소나무, 느티나무, 물오리나무 등 재래품종 을 심어 한국식 정원으로 꾸몄다. 동물우리가 있던 터는 넓은 잔디밭으로 탈바꿈했고 춘당지 일대의 수정궁음식점, 케이블카가 철거됐다. 춘당지는 궁의 연못으로 조경됐으며 연못 주변에는 산책로를 만들어 시민휴식처로 변모했다. 이날 중건식에는 시민 1,000여 명이 함께하는 영광을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