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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기억나십니까? “고, 스톱, 오라이~”, 그녀는 뻐스 걸

신종 직업은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틈타 새롭게 생겨나고 또 오래된 직업은 사라지기도 한다.


(대한뉴스 정미숙 기자)=1928422일 버스가 등장했다. 경성부가 일본 이시가와지마 조선소에서 만든 '우즈레' 라 불리는 12인승 상자형 버스를 도입한 것. 정원은 22명이었으며, 차비는 구역별 7전으로 책정했다. 경성부에서 버스를 운행했기 때문에 '부영버스'라 불리던 버스는 경성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낯선 이동 수단이라는 점도 눈길을 끌었지만, 그보다 '뻐스 걸' 이라 불렸던 여차장들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경성 사람들의 러시아워를 책임졌던 버스 여차장들은 종일 자동차 소음과 매연 그리고 성마른 승객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버스의 개통에 발맞춰 경성 부영버스 회사에서는 여차장을 모집했다. 응모 자격은 15세에서 20세 미만의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미혼 여성으로 조선에서 최초로 선발된 여차장은 모두 12명이었다.

6.2:1의 경쟁률을 뚫어야 여차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다. 업무는 고되었지만, 여성의 사회활동에 제약이 많았던 당시에는 인기 있는 직업 가운데 하나로 1930년에는 7명의 여차장을 뽑는데 99명이 지원해서 14.1:1의 경쟁률을 보였다.

 

하루에도 수천 번 '오라이' '스톱'을 반복하는 여차장은 코발트 빛 정복을 입었다. 물론 바지가 아니라 치마였다. 코발트 빛 복장에 정모를 쓰고, 커다란 혁대로 허리를 졸라맸으며,

목에는 붉은색 넥타이를 매고, 흰 양말을 신었다. 그들은 가죽 가방(돈 가방) 을 어깨에 메고 한 손에는 차표를 개찰하는 펀치를 들고 있었다. 오전 6시에 서 오후 9시까지 일하고 매달 보통 25~30원의 임금을 받았다. 온종일 수백 명의 사람에게 시달리며 받는 보수치고는 엄청난 박봉이었다승객 중에는 당시 표현으로 별별 '잡것' 들이 많았다. 1전이 모자라니 6전만 내겠다며 요금을 깎는 손님부터 술에 취해서 버스 안에다 미역전, 즉 토를 하는 사람, 두 구역을 타고 한 구역의 가격만 내겠다는 손님 등이었다. 이들 때문에 여차장들의 눈에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여리디 여린 그들이었지만 힘만은 장사였다고 한다. 힘을 못 쓰면 도저히 승차근무를 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인데, 여차장들은 버스에 오르지 못하고 승강구에 어설프게 서있는 승객 들을 문 양옆 손잡이를 꽉 움켜쥔 뒤 오로지 팔과 배의 힘으로만 거뜬하게 밀어 올렸다. 여차장의 '배치기' 에 승객들은 쑥쑥 버스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렇게 헌신해도 여차장들의 처우는 형편없었다. 입금액이 적으면 불시에 소지품 검사를 했고, 이따금 60cm 높이 고무줄 위로 폴짝폴짝 뛰어보라고 시켰다. 머릿속이나 속옷에 숨겨둔 동전이 있으면 떨어질 테니 그걸 잡아내자는 거였다. '도둑년' 소리를 듣는 건 예사고, 완전 알몸 수색도 각오했던 그들은 일과가 끝나도 필수적으로 삥땅 검사를 받았고, 행여 술 취한 승객들이 버스 에 쏟아놓은 토사물이 있으면 깨끗이 치워야 했다.

 

참고 도서 '사라진 직업의 역사' 사진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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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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