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뉴스 조선영 기자)=1950년대 중반 출간된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은 대학교수의 부인인 선영이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사교춤을 배우며 내용이 전개된다. 주부로서 집안 일밖에 모르던 그녀가 자유를 꿈꾸며 세상 밖으로 나서게 되고 곧 젊은 남자와 불륜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선영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남편이 용서하면서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작품은 마무리된다. 이 소설은 당시 여성단체로부터 '여성을 모욕하고 미풍양속을 해치는' 작품이라며 고발을 당했지만 10만부가 넘게 팔려나가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1956년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개봉했다.
소설 '자유부인' 은 장안의 화제와 비난을 한 몸에 받았지만 당시 성도덕 관념의 변화 등 당시 사회정서를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당시 자유부인 선영이 비난을 받았던 것은 가정주부가 외간 남자와 불륜에 빠졌다는 설정에 있었지만 그보다 큰 원인은 춤(맘보)에 있었다. 미풍양속과 어긋나는 춤바람이 났고 외간 남자와 정분이 났기 때문이다.
춤을 허락해 주세요
1935년 축음기 보급은 30만대를 넘어서고 레코드의 보급이 춤바람을 몰고 왔다. 1937년 잡지 <삼천리>에 일본레코드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영화배우 복혜숙, 오도실, 기생 오은희 등은 총 독부에 댄스홀 허가를 해달라는 공개 탄원서를 올렸다. 이들은 "일본과 중국에는 모두 댄스홀이 있어 건전한 오락이 성하고 있다. 댄스는 세기말적 악취미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경성 에 댄스홀을 허가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댄스홀은 허가되지 않았고 많은 지식인들은 댄스 열풍을 비난했다.
해방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가장 눈의 띈 변화는 미군의 댄스파티였다. 서울에서 가장 큰 댄스홀은 옛 미도파백화점 5층의 정자옥댄스홀과 신세계백화점 5층의 미스코시댄스홀로 알려졌다. 이처럼 댄스가 번지면서 학생과 지식인들은 소위 '댄서' 들을 비난했고 경찰에 의해 단속이 시작됐다. 1954년 서울신문에 정비석의 '자유부인' 이 연재됐으며 공무원, 학생, 가정주부 등 댄스족이 자주 검거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55년 6월 '박인수 사건' 이 터졌다. 공무원을 사칭하며 70여 명의 여인을 농락한 사건으로 박인수가 댄스로 여인들을 유혹했기 때문에 댄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함께 댄스홀 단속, 가정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운동이 촉구되기도 했다.
사교댄스 교습소의 양성화
1961년 조선일보를 보면 서울에 비밀 댄스홀만 100여 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신문에는 '계를 한다고 앞가슴에 500 환짜리 한 장 꽂고 나간 가정주부들이 애들이 찾는 것은 생각 않고 생전 처음 보는 남자 품에 안겨 탱고를 춘다' 는 내용이 실려 있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댄스홀에서 춤추는 남녀 45명을 옥내외 집회 금지령으로 위반하기도 했다. 당시 군사정부는 '국가재건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사람들이 대낮에 춤추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 이라고 해석했다. 1962년은 이른바 '트위스트의 해' 였다. 트위스트, 일명 꽈배기 춤은 신체 접촉이 없는 춤이었기에 단속하지 않았다. 댄스계의 중심지는 역시 카바레였다. 정부는 홀의 조명을 밝게 하라고 지시했고 경찰은 여전히 댄스족들을 단속했으나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춤추는 게 무슨 죄냐?' 고 따지며 항의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는 점이었다.
1963년경부터는 '포크댄스' 를 건전 취미로 장려하는 시도가 이어졌다. 1966년 YMCA성인부는 사교댄스의 건전한 보급 을 위해 '사교댄스의 밤' 이라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1970년대에 접어들자 댄스계의 화두는 포크문화로 집약됐다. 이때부터 나이트클럽 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사교댄스 교습소의 양성화도 시작됐다. 이후 1972년 '10월 유신' 선언 이 후 대학가는 무력감과 패배주의에 젖게 됐고 통기타, 블루진, 생맥주와 고고춤이 젊은이들의 문화로 자리매김하면서 '고고 열풍' 이 불었다.
1975년까지 남자와 동반하지 않은 부녀자들만의 카바레 출입은 금지됐었다. 1976년 금지령이 해제 되자 카바레는 대목을 만난 듯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1979년 경기침체가 닥쳐 사회 곳곳에 '절약바람' 이 부는 와중에도 카바레와 고고클럽은 불황의 무풍지대였다. 댄스는 한편으로 '현실을 벗어나려는 도구이 자삶을 위안하는 촉매' 의 역할을 했다.
사교춤 전문 나이트클럽도 등장
카바레(Cabarets)는 바(Bar)와 카페가 합쳐진 복합적인 장소다. 단지 큰 홀에서 대중이 모여 소위 밴드가 연주하는 경음악 등을 들으며 경쾌하게 노래도 부르고 쇼도 관람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카바레의 본격적인 등장은 광복 이후부터였으나 초창기부터 무도장 설치를 금지했고 경제재건, 국민정서 함양, 사회질서 확립 등의 차원에서 허가 여부가 결정됐기 때문에 유흥접객업소 중 가장 느린 신장세를 보였다. 서울 수복 후 1957 년까지 카바레가 허가된 것은 19개소였고 1960년까지 전혀 변동이 없다가 1962년 이후부터 매년 2~3개씩만 늘어났을 뿐이다.
1950년대만 하더라도 사교춤에 대한 인식도 부족한 데다 남녀가 얼싸안고 춤을 춘다는 것은 국민정서상 용납하기 힘들었다. 특히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 이 장안의 화제가 된 후로는 춤꾼이 마치 '가정파괴범' 인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이 강했으므로 허가 후에도 단속이 심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댄스에 흥미를 느끼는 남녀들이 늘어나고 비밀댄스교습소가 암암리에 생겨남으로써 상당수 남녀들이 법망에 걸려들기도 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의 탓인지 1970년부터는 사교춤을 출 수 있는 나이트클럽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이트클럽은 대개 저녁 6시에 개장하고 밤 11시에 폐장했다. 들어갈 때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남녀동반으로 출입할 수도 있 다. 파트너가 없을 때는 지배인이나 웨이터가 댄서를 붙여준다. 때로는 품위 있는 핑크무드의 쇼도 등장한다. 생존에 허덕이는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무산시켜 주는 한 모금의 청량제 구실도 되었던 것이다. 한편 1975년부터는 댄스홀이 성행하자 아르바이트홀마저 곳곳에 생겨났다. 돈이 적게 들면서도 손쉽게 아르바이트 여대생 이나 미망인 등을 파트너로 얻을 수 있다는 이점을 내세운 일종의 카바레 형태였다. 그러나 진짜 아르바이트생보다도 직업적인 댄서들이나 유한마담의 출입처가 되어버려 때로는 스캔들을 자아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