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과거와 같은 활기를 느끼기는 어렵다. 크리스마스트리에 걸린 꼬마전구들이 시내를 환하게 밝히고, 흥겨운 캐럴이 거리를 가득 채우던 그 풍경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임시수도 부산에서도 크리스마스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임시수도인 부산에서는 엄숙한 크리스마스 풍경이 연출되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국민들이 간절히 기원했던 것은 바로 남북통일. 1952년 12월 26일 자 <경향신문>을 통해 그날 속으로 함께해본다.
‘크리스마스를 맞은 임시수도 부산 거리의 표정은 성심스러운 기도를 올리고 또 즐기려는 기분만은 지난해보다도 충만하고 있으나 부유층 일부 계급에게만 이날의 복된 면을 독점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관계도 각성하였고 학생층도 정중하였고 교인들도 진실하였고 대공혈투에 대결하고 있는 후방겨레의 자숙태도는 착실한 것을 엿볼 수 있었다. 관현의 눈을 피하여 꾸며진 몇 땐스파티와 무슨 무역회사 사장집 그리고 무슨 마담의 집에서의 밤을 새는 노름판에는 한 사람의 관리와 여학생 그리고 점잖은 군인의 그림자를 엿볼 수 없었고 오직 전쟁이 어디서 어떠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가를 알 필요조차 없다는 족속들의 집합만이 이날을 저주하고 있었다.
성급한 처녀들이 밤예배를 마치고 바삐 집으로 돌아가며 부르는 성탄 찬미가는 그야말로 일선 장병의 무운을 기원하고 성스러운 힘으로서 이북동포의 어두운 가슴에 등불을 켜리라는 외침이 아닐 수 없다.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신조에 명년을 멸공 통일의 해로 맞이하려는 기풍들이 이모저모에서 엿보여지는 성전 삼 년째의 성탄절은 우리에게 굳건하고도 희망에 가득 찬 새 약속을 확고히 하여 주었다.’
손에 케이크든 선남선녀가 거리에
한국전쟁이 끝난 후 크리스마스 풍경은 사뭇 달라진다. 거리에는 젊은 남녀들이 돌아다니고, 한 손에는 케이크와 선물을 든 사람들이 많이 보이게 된다. 당시 신문은 크리스마스에 대해 ‘젊은 남녀의 명절 같다’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1956년 ‘착잡한 표정을 이룬 서울의 거리’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된 <동아일보>를 살펴본다.
‘이십사일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하는 이날 아침 서울 거리는 이날 밤을 즐거이 보내려는 선남선녀(?)들의 분주한 걸음걸이가 특히 눈에 띄고 한편 교회에서는 성탄 축하에 바쁜 교인들, 거리에서 종소리 울리는 구세꾼들, 길 한 모퉁이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지게꾼들이 착잡한 표정을 이루고 있었다.
다방에서 이따금씩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젊은 남녀들. 손에 든 케이크 박스, 축음기 심지어 양주병, 번갈아 들어서서는 뭔지 속삭인 끝에 사라지고, 바야흐로 이날의 스케줄에 돌입하는 듯. 백화점마다 이날따라 많은 사람들이 들랑날랑, 대부분 케이크에 타이 핀 정도를 사 가고, 종로 네거리 모퉁이에선 거리의 동정을 구하는 구세군의 종소리에 쳐다보는 사람이란 별로 없는데. 이따금 긴 치마를 입은 어린 색시들이 바쁜 발걸음. 명동 천주교당 마리아상은 작년과 달리 일체의 장식이 없어 알고 보니 간소하게 성탄을 축하한다는 것. 남대문 로타리 지하실, 서울역 앞 골목길마다 언제나 다름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 지게꾼들은 심지어 오늘이 무슨 날인지도 모르는 형편.’
거룩한 크리스마스 보내자 ‘일침’
1960년대는 해가 더할수록 크리스마스가 더욱 화려해지자 일각에서는 ‘조용히 보내자’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진정한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집에서 조용히 보내는 것이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는 주장이 많아졌다. 1965년 12월 20일 자 <동아일보>에 ‘벌써 흥청 괴로운 세모의 거리에 성탄절 소음’이란 제목으로 실린 기사를 살펴본다.
‘앞으로 사흘이면 크리스마스이브. 물가고와 생활난에 허덕이는 서민의 어두운 심정도 아랑곳없이 거리에는 징글벨의 가락이 울려 퍼지고 우체국은 연하장과 크리스마스카드를 부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그러나 서울 시내 주요 상가는 해마다의 푸념대로 ‘경기가 없다’고 넋두리를 되풀이하고 있다.
서울시는 오는 23일 시청 앞 분수 옆에 높이 20미터의 맘모스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운다. 시민의 공동성탄수라고 이름 지어진 이 트리는 서울은행이 기증한 전나무에 10와트짜리 5색 등 2천6백 개를 매달아 그중 10분의 1(2백 60개)은 명멸 장치를 하는 등 각종 데코레이숀을 마련하리라는 데 경비는 자그마치 12만여 원. 서울 시내 각 백화점은 지난 토요일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 그러나 M 백화점 양품부 판매원 P 양은 아직은 값만 묻는 분이 많아요‘라고 말하고 있다.’
유류파동에 우울한 크리스마스
1973년 세계를 강타한 유류파동의 여파로 당시의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어둡기만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거리에는 반짝이는 조명이 가득했지만 이때는 꺼진 조명만이 우울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대변할 뿐이었다. 1973년 12월 25일 자 <동아일보>에 ‘조용하게 지낸 얼어붙은 성야’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를 통해 당시 모습을 되돌아본다.
‘어둡고 쓸쓸하고 추위에 얼어붙은 성탄전야였다. 얼마 전만 해도 명멸하는 조명 아래 흥청대던 광란의 전야가 올해는 고요하다 못해 쓸쓸하기조차 했다. 이십사일 밤 서울의 도심지 거리는 초저녁에 잠깐 붐볐을 뿐 영하 십삼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로 길거리는 모두 얼어붙었고 유류파동의 여파로 네온사인이 모두 꺼진 데다 유흥업소들도 일찍 문을 닫아 도심지일파는 예년에 비해 거의 삼분의 일이 줄어 평일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성탄 대목을 노린 술집과 다방 등이 한두 시간 영업을 더 하며 바가지요금을 받고 서울의 명동, 무교동, 충무로 등 도심지 거리를 젊은 아베크족들이 자정이 넘도록 더러 어울려 다니는 모습들이 겨우 크리스마스이브라는 기분을 돋워 주었을 뿐이다.
서울 명동 일대는 오후 육시 경부터 인파가 몰리기 시작, 이날 밤 구시경에는 칠만 오천여 명으로 절정을 이루었으나 십시경부터는 부쩍 사람의 수가 줄어들었다. 무교동 서린호텔 앞길에서는 종로지구청소년선도위원회회원 이십여 명이 ‘크리스마스를 조용히 보내자’는 피켓을 들고나와 행인들의 귀가를 종용했다.
자정을 넘기자 버스들도 거의 다니지 않았으며 영업용택시들만 새벽 2시경까지 손님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서울 도심지의 다방과 술집들은 이날 밤 유류파동으로 인해 9시 반과 10시까지로 각각 규정된 영업시간 단축을 대부분 외면, 심한 곳은 자정이 될 때까지 영업을 했는가 하면 손님들에게 바가지요금을 씌우기 일쑤였다.
명동의 대부분 다방들은 오십 원짜리 커피를 팔지도 않고, 일백 원이 넘는 쌍화차, 주스 등만 팔아 손님들의 불평을 사기도 했는데 명동의 모 다방에 들어갔던 서 모씨(21)는 차를 마시지 않고 나가다 여자종업원 4명으로부터 “복잡한 데 와서 자리만 차지하고 그냥 가느냐”고 멱살을 잡히는 등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