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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사람과 인생 | 원로 교육자 김만봉 선생

교육여정 45년, 복이 되는 찬란한 보배들을 꿰어 담다

[인터넷 대한뉴스] 글 이금주 기자 | 사진 이동현 기자

 

동량지재(棟梁之材)의 교육자로 살아온 참된 스승 이야기

 

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페스탈로치는 “교육의 목표는 머리와 손과 가슴, 지식과 기술과 도덕의 세 가지가 원만하게 조화된 전인형성(全人形成)에 있다”고 역설. 지금까지 전인교육이란 말은 흔하게 들을 수 있지만 이를 잘 전수해 줄 좋은 스승을 만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성경에는 세상사에 여러 가지 복이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만남의 복은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좋은 만남과 복된 만남은 우리의 마음을 풍성하게 하고, 우리의 영혼을 부요하게 만들기 때문. 또한 성공이나 축복의 길로 이끌어 주는 연결고리이자 다양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역사들은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는가.

 

기자가 정초부터 만남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이유는 참된 스승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 그런데 좋은 교육자란 어떤 모습일까. 기자는 그 이상을 서울 배명중·고등학교 교감(18년)과 교장을 역임하고 본지 <대한뉴스> 논설위원으로 활동, 10년 동안 한번을 거르지 않고 한결같은 정필 칼럼을 기고해 온 김만봉 선생에게서 찾았다.

 


원로 교육자에게서 바른 삶의 지혜를 배우다


김만봉 선생은 45년 국가의 백년지대계인 교육에 전념, 동량지재(棟梁之材)의 육성에 평생을 바치고, 1971년 <수필문학>에 ‘개털모자'로 등단, <생명의 소리를 들으며> 등 여러 편의 수필과 칼럼을 발표, 우리나라 문학과 언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정년 퇴임 후에도 사회사업과 향토문화 발전 사업에 전념, 교육계의 원로이자 유공자로 우리 사회에 바른 목소리를 전해왔다. 또한 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입시위주의 교육을 지양하고 전인교육의 장으로서의 학교의 역할에 중점을 두어 활달하고 건강한 인간, 효(孝)와 애국애족(愛國愛族)하는 인재 양성과 함께 대내외적으로 배명학원의 발전을 꾀하고 청소년의 진취적인 사고함양을 위해 보이스카웃의 활동을 적극 장려, 해외잼버리 단장으로 참가하는 등의 많은 공헌을 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과 교육부장관상, 한국교총회장상 등을 수상했다.


2007년 4월에는 <샛별처럼 샘물처럼>으로 제6회 한국불교문학 본상을 수상, 유수하고 주옥같은 다수의 작품을 내놓은 그의 수필 속에는 평소 교육자로 살아온 인생들을 압축해 보여주는 교육지론과 실천들이 녹아든 표현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지나친 물욕(物慾), 시기(猜忌), 질투(嫉妬), 교만(驕慢), 허영(虛榮), 멸시(蔑視), 모함(謀陷), 사심(邪心), 나태(懶怠), 방종(放縱), 무책임(無責任), 아첨(阿諂), 허언(虛言) 등은 모두 다 우리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악이며, 도둑이다.”


평소 위와 같은 자기수양에 대한 덕목들을 강조, 역사상 성현이나 위인, 정치가와 철학자 등의 교훈을 되새기며 그의 문학적 표현을 빌자면 ‘자랑스러운 대한의 아들, 딸이며 이 나라의 주인공'들에게 “우리 모두 마음속의 적을 몰아내는데 앞장서는 용감한 국민, 선인(善人)이 되도록 노력하자”고 외치며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강조, 애국애족(愛國愛族)을 주창했다.

 

이러한 사고(思考) 속에서 진실한 사회와 정의로운 사회가 이룩될 때, 비로소 행복한 국가와 행복한 국민이 탄생한다고 믿는 그는 “자아발견(自我發見)을 바르게 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참되고 바르게 사는 우리가 되자”라는 참된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는다. 그의 칼럼들과 수필들은 주로 북쪽에 두고 온 산하와 어린 시절 추억을 되살리는 고향의 노래와 교직생활을 통해 얻은 사제 간의 인간애, 일상생활의 창변에서 얻은 사회문화비평 등으로 응축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 그릇된 세태를 안타까워하며 세상살이의 지계(地界)를 담아낸 김만봉 선생의 수필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족하다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황폐하고 감정적으로 메마른 후세(後世)들의 가슴에 아로새길만한 제언들로 인생을 아름답고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혜를 배우게 한다.


우리 사회의 교육에 대한 화두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으시던 선생은 “내 자랑은 쓰지 마”라고 손사래를 치며 한사코 만류했지만 기자는 그의 바른 삶의 일화가 우리 사회 거울이 되어 주길 바라며 소개한다. 


“선생이라면 성실하고,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서 사회의 모범이 돼야 해. 이것이 내 신조네.” 


김만봉 선생은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드는 첫 걸음은 서로 신뢰성을 회복하고, 교육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교감으로 재직하던 시절, 어떤 이가 교사면접을 잘 부탁한다며 인사 청탁을 해왔다.


“사과상자를 열어보니 250만원이 들어있더군. 당시에는 그 돈이면 고급 승용차를 한 대 사고도 남을 정도로 큰 돈이었지.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내가 부끄러울 짓을 하면 되겠나 싶은 생각이 먼저 들더군. 그래서 당사자를 불러다가 호되게 야단을 쳤지.”


지금도 명절 때면 오징어나 사과 봉지를 사들고 찾아오는 그 교사는 그 때를 회상하며 고마움을 표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확고하고 바른 소신은 교사생활 내내 변함이 없었다.

 


배움의 열정과 삶의 대한 사랑을 닮다


옛말에 각자무치(角者無齒)란 말이 있지 않은가. 한 사람이 여러 가지 복이나 재주를 갖출 수는 없음을 이른다. 그런데 이러한 순리(純理)가 김만봉 선생에게는 예외로 비껴간 듯하다. 그는 여러 가지로 다복(多福)하다 할 수 있는 요건들을 두루 갖추고 있기 때문.


그(아호(石山), 본관(安山))는 1934년 황해도 황주 신라 경순왕의 후손 김긍필을 시조로 하는 명문 안산 가문의 부친 김영복 공과 모친 이일복 여사 사이에 태어났다. 평양의학전문학교 2학년 재학 중 전쟁이 터져 학업이 중단된 상태였지만 피란시절 전란의 와중에도 양키시장에서 화장품이나 커피 장사를 하며 한국 예술대학의 원형으로 1951년 10월 마해송(초대원장), 조지훈, 최인욱 등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상고예술학원에 입학, 배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상고(尙古)'는 상화와 고월의 아호를 딴 것으로 박종화·박영준·구상·양주동·장만영 등 90여 명의 문인들이 발기인으로 참여, 3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 시절 그 곳은 우리 문화예술의 요람으로 전란의 여파와 가난의 질곡에도 낭만이 있었고, 피폐와 절망 속에서도 술이 익고 음악이 흘렀다. 낮에는 장사를 하고 밤에는 학업에 열중하기를 2년, 그렇게 상고문화예술학원 문예창작과 1회 졸업장을 받고 이어 고려대학교 문리학과를 졸업, 서울대학원에서 환경위생학을 전공한 후 교육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 서울 숭문중·고등학교에서 교사(1957.3)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형편이 넉넉지 않아 학비를 내지 못하는 제자들이 있으면 남몰래 도와주기를 수차례, 그때 그 제자들은 현직 국회의원들도 많고 교사와 의사, 한의사, 변호사 등 사회 곳곳에서 성공의 길을 걷고 있다. 김만봉 선생은 경조사마다 찾아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제자들에 대한 보람과 칭찬을 잊지 않았다. 훌륭하게 성장해 나라에 이바지하는 역군들이라며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갈등과 번민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인성의 숨결을 불어넣고 야망을 키운 것. ‘행복은 바른 삶에 있다'는 경구는 김만봉 선생의 삶의 지표를 대변, 젊은이들의 자의식을 깨우고 자아실현의 목표를 심어준 그의 공로들은 수치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최일선에서 국가의 미래를 짊어진 청소년의 지식배양과 인격함양에 젊음을 바친 교육자의 열정을 배우게 된다.


그는 현재 가나안농군학교 125기 동창회장과 황주군민회 회장으로, 초·중·고·대학생들의 장학사업을 전개, 수많은 학생들에게 혜택을 주었고 한국문인협회, 국제팬클럽, 현대수필문학회 등 여러 단체에서 왕성한 활동, 향토사업과 사회사업에 뜻을 두어 청소년 지도사업 및 교육의 발전을 위해 많은 기여를 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한국 사학(私學)의 산 증인으로, 그 시절의 이야기들을 가슴으로 쏟아내며 교사의 사명감과 헌신에 대한 자세와 당부를 잊지 않는 80수를 바라보는 노장의 얼굴에는 아직도 교육에 대한 식지 않은 열정과 정직한 신념이 배어 있었다. 그에게서 올곧은 심지와 바른 교육으로 평생 사학(私學)을 지켜 낸 자부와 긍지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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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0년 1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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