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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연변뉴스

조선족 첫 사찰

[인터넷 대한뉴스]

       그리고 悟得스님

 

 

가을바람이 산들산들한 지난 9월 초에 도문시 일광산 화엄사를 찾았다. 화엄사의 오득스님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나를 맞았다. 오득스님은 스님이기에 앞서 가까운 친구사이였다.

 

요즘도 노고가 큽니다.” 내가 인사를 하자 스님은 “모두 보살의 복입니다”하고 받아넘긴다. 오득스님은 그간 변화된 사찰을 보여주려고 차를 마실 틈도 주지 않고 손목부터 잡아끌었다. 사찰을 건설하던 때만 해도 오득스님은 승려가 아닌 이평림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작년에 중국불교협회 부주석 명생스님으로부터 계를 받고 화엄사의 상주스님으로 계신다. “이 자리가 첫 삽을 박던 자리입니다. 첫 삽을 뜨면서 서러움에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그때가 어제 일 같습니다.” 오득스님이 식지로 정초식을 했던 자리를 가리키며 말문을 열었다.


부처님의 계시


2008년 6월 21일, 일광산은 아직도 찬 기운이 돌았다. 오득스님은 흑룡강성 쌍청현에서 온 50여 명의 공사시공자들을 거느리고 일광산에 올랐다. 북소리, 폭죽소리도 없고 축하해줄 사람 하나 없는 일광산의 고요함 속에서 오득스님은 홀로 첫 삽을 떴다. 좋은 일에는 불청객도 많은 법인데 사찰 정초식에는 그 누구도 오지 않았다. 와 주십사고 초청장을 돌렸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오득스님이 일광산에 사찰을 짓는다고 하니 아무도 믿지 않아서였다.


“그게 어디 아이들 장난인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네.” 사찰이 없는 데다 그마저 지어보지도 못한 작은 시가지에서 사찰을 짓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고 웬만한 돈줄과 뒷심이 없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왜 하필이면 절을 짓나? 절을 지어 탈이 없을까?” 사상을 해방시키지 못한 관리들과 시민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친척이나 친구들마저도 무서워했다. “불교의 ‘불’자도 쓸 줄 모르는 무식쟁이가 사찰을 짓다니 환장한 거겠지”라고 빈정대는 사람도 있었다. 사면초가의 여건에서 스님은 서러움을 참아가며 묵묵히 정초식을 했다.

 

오득스님은 건설일꾼들과 함께 숙식하며 일했다. 머리를 깎을 사이도 수염을 밀 사이도 없었다. 이슬을 맞고 공사장에 나가 달을 보고 돌아왔다. 일이라곤 해본 적 없는 스님인지라 부딪치고 떨어지고 긁혀서 온몸에 상처투성이였다. “짝퉁신발을 샀는지 몇 달 신으니깐 구멍이 풀썩 나고 쭉 찢어지고….” 스님이 투덜거리며 발가락이 쑥 나온 신발을 벗어 던지던 일이 선하다. 스님은 5년 동안 해마다 운동화를 서너 켤레씩 축냈다. 


일광산 화엄사의 투자자금은 오득스님의 주머니에서 나왔고 신실한 불자들이 한 푼 두 푼 모은 돈에서 나왔다. 오득스님은 스님이 되기에 앞서 기업인이었다. 올해 쉰 살인 스님은 일찍 개혁개방의 봄바람을 타고 무역과 상업에 종사했다. 그래서 도합 3,000만 원(인민폐)이라는 자금을 모았다.


“돈을 좀 벌었습니다. 그래서 안정적인 생활을 하려고 빌딩에 세를 주고 작은 커피숍과 식당을 운영했는데, 어느 하루 둘째 누님이 한국 봉은사에 다녀오더니 기둥도 없는 봉은사 대웅전 앞에 돌기둥이 세 개 보이고 기둥벽에 수월스님의 초상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어디 머리가 아픈 게 아니냐?’하고 묻자 누님은 ‘정말이야.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을 보았어. 아주 뚜렷하게 나타난 거야’라고 강조했습니다. 누님은 사찰에 한번 가본 적 없는, 불교와는 거리가 먼 의사였습니다. 그러던 누님이 봉은사에 한 번 가더니 수월스님을 보았다고 합디다. 저는 부처님이 부르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종교는 미신인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후 머릿속에 늘 부처님의 형상과 사찰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던 차에 도문에서 사찰을 건설한다는 정보가 들어왔고 저더러 입찰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저는 그때야 깨달았습니다. ‘아! 부처님의 계시였구나’하고 말입니다.”


수월스님은 대덕 경허의 수제자였다. 그는 1910년대에 일광산에 암자를 짓고 회막골 사람들의 ‘머슴’이 되었다.


부처님의 집만은 거짓 없이 지어야 한다


일광산 화엄사 입찰에 참가한 사람은 여럿이었다. 절강성의 어느 스님은 묵직한 돈주머니를 내놓으면서 입찰권을 먼저 따려고 했다. 인맥으로 경쟁자들을 누르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부처님의 계시였는지 돈도 인맥도 없는 오득스님이 쟁쟁한 사람들을 물리치고 입찰에 성공했다.


“조선족의 사찰이 없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거무튀튀하고 우중충한 중국식 전통사찰보다는 우아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우리 민족의 사찰 양식으로 건설하자는 의지가 반영된 것 같습니다.” 도문시 전임 종교국 국장이었던 김학길 씨의 증언이다.
시작이 절반이라고 첫 삽을 뜬 후 트럭들이 석재를 가득 싣고 속속 공사장에 도착했다.

 

포크레인과 굴삭기의 굉음이 수만 년 동안 잠자던 일광산을 깨웠다. 두만강변에 일광산 화엄사가 세워진다는 정보를 듣고 떨기떨기 꽃송이 같은 마음들이 모였다. 여든에 이른 고령의 김 씨 할머니는 “생전에 부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원이 없겠소”라고 하면서 엽전이 들어 있는 돼지저금통을 내놓았다.

 

엄마 손을 잡고 건설현장에 온 일곱 살 어린이는 기왓장에 이름 석 자를 적어넣었다. 연길시에서 작은 진료소를 경영하는 이경자 씨는 보험금으로 쓰려던 돈을 모금상자에 넣었다. 왜 그랬냐고 묻자 “다음 생을 보험하겠습니다”고 한마디 던질 뿐이었다. 일광산 화엄사는 빠른 속도로 진척이 되어 이듬해 일주문, 산문, 사천왕전, 대웅전, 장경루 등 주체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정부 관리들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혀를 찼다.


오득스님은 설계를 수정하는 일, 허가를 받는 일로 심양과 북경을 오갔다. 한번은 누님과 함께 북경에 갔는데 누님은 “그래도 북경까지 왔으니 좋은 호텔방에서 자보고 싶다”며 곤륜호텔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오득스님은 작은 여관을 찾았다.
오득스님은 사찰을 지으면서 돈고생을 몹시 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동냥’도 했다.

 

연로한 스님의 부친은 평생 일하던 한의원과 집을 팔았다. 당신은 지금 작은 월세집에서 산다. 스님의 두 누님들마저 달마다 나오는 노임을 꼬박꼬박 화엄사에 넣는다. 사람들이 너무 안타까워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화엄사를 처리하라”고 한다. 그러면 오득스님은 “화엄사는 부처님의 집이고 불자들의 안식처요. 나에게는 팔 자격이 없소”라고 하면서 역정을 낸다.  

 
대웅전을 돌아보며 스님이 말한다. “하남성에서 석재를 가져왔는데 질이 나빠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그래서 돈도 더 썼습니다.” 돈을 쓰지 말아야 할 곳에 더 쓴 것이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나는 ‘부처님의 집만은 거짓 없이 지어야 한다’는 스님의 의지를 느낄 수 있어 감동을 받았다.


점안식과 오득스님 


2009년 10월 26일, 마침내 우아한 대웅보전이 세워졌다. 낙성 및 점안식이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1년 4개월 만이었다. 화엄사의 건축면적은 4만㎡로, 조선족 불자들은 화엄사가 동북 3성에서 가장 큰 사찰이고 조선족의 첫 사찰이라고 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화엄사는 중국 당, 송 시기의 사찰 양식과 한국의 고유단청문양, 조선(북한)의 탱화가 서로 어울려 색조와 풍격이 조화롭고 부드럽다.


화엄사 대웅보전낙성 및 삼존불점안법회에 1만여 명의 불자들이 참가했다. 국가종교국 장건영 부국장과 중국불교협회 부회장 명생스님, 길림성 불교협회 회장 성강스님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과 대덕들이 법회에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오득스님은 지위가 높은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왠지 몸집이 왜소해 보이고 몰골이 초라하게 느껴졌는지 몸 둘 바를 몰라했다.

 

“그 장면을 어떻게 넘겼습니까?” 내가 물었다. “처음에는 공연히 죄 지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마디가 생각나더군요. ‘만약 중생이 이 탑에 향촉 하나, 꽃 한 송이를 올려 공양한다면 80억 겁동안 쌓은 생사의 중죄일지라도 모두 한 번에 소멸되느니라’는 부처님의 말씀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향촉 하나, 꽃 한 송이를 올린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라는 큰 탑을 올렸으니 내가 천하를 다 가진 사람처럼 대단해 보입디다.

 

그 후 자연히 가슴이 펴지더군요. 중국 사찰들에서는 문표를 엄청 받아 불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저는 문표를 받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사찰 주위에 우리 민족의 민속문화공원을 조성하여 사람들마다 마음 편하게 즐길 수 있게 하겠습니다.” 오득스님은 산문 앞 공지에서 도문시와 조선(북한)의 남양시를 한참 굽어보다 불쑥 말한다.


나는 오득스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스님은 마음이 여리고 사심이 없었다. 언젠가 대웅전이 완성되기 전 임시 법회소에서 꼬마들이 경배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아이들이 귀엽습니다. 저런 아이들이 부처입니다. 이 아이들을 위해 내가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일광산 화엄사의 밝은 미래


백로가 되자 기온은 뚝 떨어져 아침저녁으로 춥다. 지금의 일광산 화엄사는 공사의 90%를 완성했다. 오득스님은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서리가 금방 내릴 것 같다”며 “할 수 없이 공사를 거두겠다”고 한다.  나는 오득스님이 이끄는 대로 화엄사를 돌아보고 다시 대웅전에 들어섰다. ‘엎딘 김에 절’이라고 온 김에 향 하나를 태우려고 했다. 과거에는 사찰에 왔어도 구경만 했지 향은 태우지 않았다. 스님은 안 하던 짓을 한다는 눈길을 준다.


“스님은 5,000만 원으로 보시했는데 향 하나를 태우지 못하겠습니까?” 내가 스님을 돌아보며 웃자 스님이 말한다. “황금 만 냥으로 보시한들 착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보다 못하다고 했습니다.” 스님의 말에 깊은 뜻이 보이고 일광산 화엄사의 미래가 보였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3년 10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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