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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한국외교협회 정태익 회장

외교와의 인연

[인터넷 대한뉴스]글 김준호 기자 / 사진 한국외교협회

 

 

 

 

 

정태익 회장이 외교관을 꿈꾸게 된 것은 경복고등학교 영자신문기자로 활동하는 가운데 주한 대사들을 인터뷰하는 등 우리나라와 외국의 관계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되면서부터다. 61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대에 진학해 오랜 전통의 국제법학회에서 활동하다 새로 합쳐진 국제법외교학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회장을 맡게 되었다.

그 후 전국 단위의 국제학생협회(ISA) 창립멤버로 참여하면서 1963년과 1964년 일본 국제학생협회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정 회장은 두 번째 방문 때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그때 당시에는 한일수교 전이라 한·일 양국에서 상당히 큰 주목을 받고 화젯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국제학생협회 회장이 되면서 당시 김종필 안기부장을 만나 국제적 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학생들이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등 국내정치에 너무 치우쳐 있음으로 학생들의 국제적인 감각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국제적인 시야와 안목을 높이기 위해 국제대회에 자주 참여해서 경험을 쌓아야 했는데, 가난한 나라 형편으로는 해외에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에 국내에서 국제대회를 유치하는 게 현명한 처사라고 주장하였다. 그 말이 주효하여 김 부장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1964년 아시아학생대회가 최초로 서울에서 개최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렇게 외교, 국제적인 활동을 하면서 차츰 외무고시에 관심을 두고 외교관을 꿈꾸게 됐다.

하지만 1962년 5.16군사쿠데타로 인해 군 장교들이 외교관을 대신하는 바람에 1962년부터 6년 동안 외무고시제도가 폐지되었다. 정 회장은 할 수 없이 공군장교로 입대해 공군사관학교 법학교관으로 군 복무 중 1968년 고시제도가 부활된 소식을 접하고 1969년 제2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1970년 군 제대와 동시에 외교부에 입부해서 외교관으로서 인생을 걷게 되었다.

 

외교관으로서 활동

 

정 회장은 외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복배수적(腹背受敵: 앞뒤로 적을 만남)의 형국으로, 일본과 중국, 미국과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생존을 위해 이를 외교적으로 잘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고려시대 서희의 외교술로 인해 전쟁위기에서 오히려 강동 6주를 얻어낸 것처럼 우리나라는 주변국의 흥망성쇠에 따라 새로운 질서가 형성될 때 마다 위기가 찾아왔기 때문에 국민이 외교의 중요성을 더욱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남북이 분단되어 있기 때문에 정 회장이 주로 활동한 시기는 남북한 대결의 시대였다. 북한과의 외교는 많은 변환과정을 겪었다. 특히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경제적 기반 등의 여건들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고, 북한은 차츰 고립되는 추세로 변화되었다.

첫 번째 부임지는 뉴욕총영사관이었다. 그 당시 외교관이라면 누구나 다 미국에 가고 싶어 했는데, 그 중에서도 워싱턴은 가장 가고 싶은 곳이었다. 뉴욕총영사관에서 근무하면서 교민활동을 담당했는데, 그 당시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반정부인사들이 뉴욕을 무대로 많이 활동했다. 반정부인사 중 임창영 박사는 장면 정부시절 유엔대사를 지낸 사람으로 군사혁명정부 수립 이후 반정부활동을 앞장서서 전개 한 기억이 있다.

유엔대표부 활동도 지원했는데, 1975년 11월 유엔총회에서 남한 지지국가들의 결의안과 북한 지지국가들의 결의안이 동시에 채택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모순된 유엔 결의안 채택 문제로 당시 외교부 장관이던 김동조 장관이 교체가 되고, 유엔대사로 있던 박동진 씨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유엔결의안 불상정 원칙을 건의하면서 동시에 외교부 장관이 되었다.

당시까지 외교는 유엔에서 정통성을 인정받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중점을 두어왔다. 유엔 결의에 의해 선거를 통해서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으므로 우리나라는 유엔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유엔에서 우리의 정통성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매년 통과시켜왔는데 그 효용성이 떨어진 것이다. 그때 사건은 남북한이 유엔에 가입하기 전의 일이었다.

 

한국·이집트 수교로 중동외교의 거점을 마련한 장본인

 

정 회장이 정년퇴임까지의 가장 큰 성과로 카이로 총영사로 부임하여 김영삼 정부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이집트와의 수교를 성사시킨 것을 꼽았다. 남북한 경쟁시대에 이집트는 중동의 맹주국가로 매우 중요시 되었다. 그때는 사다트 정부가 사회주의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북한과는 수교를 하고, 우리와는 수교하지 않은 채 영사관계만 맺고 있어 대사관계로 수교를 하는 것이 최대 외교 현안이었다. 이집트와의 수교는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외교의 돌파구가 필요한 주요지역으로 전임자들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 회장이 1993년에 부임해 1995년에 끝내 이집트와 수교를 맺게 되는데, 기라성 같은 외교관들이 풀지 못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고민하다 미수교의 핵심원인을 ‘이집트와 북한의 특수관계'에서 찾았다고 한다. 이집트와 북한은 4차 중동전쟁에서 영욕을 같이 한 사이다.

소수에 불과했지만 4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의 영공을 지켜주다 조종사가 죽는 바람에 북한과 이집트는 혈맹관계로 발전했다. 이 전쟁의 영웅이자 나중에 사다트 암살 후 대통령에 오른 무바라크 당시 총리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주석이 “한반도가 통일될 때까지 남한과 수교를 절대하지 말라”고 요청했고, 무바라크가 이를 약속했다.

이 두 나라의 공조를 깨기 위해 정 회장은 먼저 비밀라인을 통해 솔레이만 정보부장과 자주 만나 이야기하면서 “북한과의 관계를 유지하되, 한국을 ‘새로운 친구'로 맞이하는 것이 이집트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고 설득했다. 다음 단계로 솔레이만 부장의 한국 비밀방문을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1994년 갑작스럽게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양국관계는 예전의 특수관계가 아닌 일반적인 수준의 관계로 전환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정 회장은 활발한 문화외교를 통해 먼저 수교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1994년 솔레이만 부장이 비밀리에 우리나라를 방문해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을 만나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눈 뒤 귀국해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방한 결과를 보고하고 우리나라와의 정식 수교를 수용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였다.

북한과의 특수관계를 정립한 당사자인 무바라크 대통령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주핀란드 이집트대사관으로부터 이스라엘이 북한의 대중동 미사일 판매를 막기 위해 높은 가격에 모두 구매하겠다고 헬싱키에서 북한의 김평일 대사와 협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렵게 평형을 유지하던 무바라크 대통령도 이스라엘과 북한의 미사일 협상은 북한과의 혈맹관계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것이라고 판단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1995년 3월 30일 무바라크 대통령은 한국·이집트 수교방침 문서에 서명하고, 같은 해 4월 12일에 역사적 수교가 이루어졌다. 한국·이집트 수교는 김영삼 정부의 외교분야 최대성과로서 중동·아프리카에 전략적 외교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다.

수교 이후 한·이집트 양국은 정상방문을 통해 한국이 그간의 남북대결 외교전에서 열세를 만회하고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또한, 에너지의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중동지역에서 우리의 영향력을 확대하여 국익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다.

김대중 정부에서의 일화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첫 출근한 2001년 10월 7일 허바드 주한 미 대사로부터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다는 통보를 밤 12시가 넘어서 받았다. “앞으로 2시간 후에 미국은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 본부가 소재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합니다.

이 사실을 사전 통보하니 한국의 최고당국자에게 전달해 주십시오”라고 전하고, “미국의 조치에 대해 한국 정부의 이해와 지지를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국 정부를 대표해 연락을 받은 당사자로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대통령에게 알리기 위해 출근 첫날부터 새벽에 전화하여 대통령을 깨웠다. 이것이 신고식이었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에게 있어 미국과의 정상회담이 가장 중요한데, 정 회장이 청와대 수석으로 부임하기 전인 2001년 첫 정상회담을 개최했지만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물론,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겠지만 2월에 있었던 러시아 푸틴과의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의 입장을 옹호하는 내용이 있어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 까닭에 부시 대통령을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청와대 수석으로 부임한 이후 정 회장은 이러한 정황을 알고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고르바초프와의 인연

 

정 회장이 주미대사관 근무를 마치고 노태우 대통령의 외교비서관으로 일하던 시기 북방정책이 추진되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미국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해 한·소 수교의 원칙에 합의하고 수교를 맺게 되었다. 그 후 2002년 김대중 정부 때 주 러시아 대사로 임명되면서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 나호트가 공단건설계획 이행, 양국간 수산협력문제 해결 등의 주요 현안문제를 다루게 된다.

정 회장은 부임 후 러시아의 역사적 인물들이 대부분 묻혀있는 노브데 비치 공동묘지를 참배하고, 특히 고르바초프 서기장 부인 라이사 여사의 묘지를 발견하게 된다. 고르바초프와의 만남에서 라이사 여사의 묘지를 말하자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우리 가족에 대해 그토록 관심을 기울여 주시고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후 “라이사를 잃은 것이 러시아를 잃은 것보다 더 슬프다”는 세계적 사랑 고백의 말을 남겼다.

고르바초프와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을 이야기하면서 친해지게 되어 이후에도 대사관저에 가끔 초청을 하였다. 소련의 개혁, 개방정책의 추진배경을 물었는데, 모스크바대학교 법학과 졸업 후 고향인 코카서스 지방의 조직 책임자로 집단농장업무를 관리하게 됐다고 한다.

하루는 농산물 생산품 운반 트럭기사가 화물이 적재함에서 흘러내리는데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달리기에 그 기사에게 연유를 물었더니, 운반하는 업무만 하면 정해진 급료를 받을 수 있고, 화물적재 여부는 아예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 양이 전체 수확량의 30%로, 고르바초프는 나중에 공산당 서기장이 되면 이런 적폐를 시정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최근의 외교 정세와 한국외교협회 회장으로서 포부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 우리나라와 지정학적 위치가 비슷하고, 문제가 된 크림반도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러시아의 함대가 주둔해 있다. 역사적으로도 절반은 러시아 편에 서거나 절반은 러시아 반대편에서 힘을 겨뤄 왔다.

러시아에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우크라이나는 물론, 유럽도 마찬가지 사정이라서 강력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고, 미국 역시 과거와 달리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정 회장은 러시아가 영토를 편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향력을 확대해 가기 위한 과정으로 보는 것이 좋다고 분석한다.

한반도 정세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가지고 봐야 하는데, 러시아의 북한 영향력 확대는 중국을 의식한 행보이긴 하나 미미한 수준이다. 러시아의 대북 부채가 100억불이지만 받을 수 있는 가능성도 없다. 궁극적으로는 한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반도 전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편으로 남북한 가스관을 연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북한의 김정은은 계속 대외관계를 악화시켜야 내부결속이 강화되기 때문에 체제에 자신감이 붙기 전까지는 당분간 긴장을 고조시킬 전망이다. 따라서 일정한 시기가 지난 후 북한이 개방할 수 있도록 남북관계를 개선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외교협회는 1972년 설립된 비영리 공익법인으로, 국제문제에 대한 이해와 외국과의 교류협력 증진, 회원간의 친목도모를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회원은 외교부 현직 및 퇴직공무원인데 주로 퇴직공무원 위주로 활동이 이루어진다. 협회는 국민의 외교문제인식을 제고하기 위한 공공외교를 강화하고, 학술대회와 국제 우호협력활동 등 많은 공익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정 회장은 지금까지 협회에 산재한 문제를 혁신할 수 있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향후 회원클럽제로 협회를 운영해서 우리나라 여론지도층이 모여 국가 현안을 논의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사교단체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끝으로, 정 회장은 외교관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당부의 말로, 대외관계와 대외무역을 개선시켜 나가는 것이 국익을 증진하고 통일을 준비하는 길이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대외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경험이 많은 분들과 접촉하면서 본인이 성장해 나갈 수 있는 발판과 역량을 키워나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4년 7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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