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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김원모 발행인의 아름다운 인연 - 4 백선동 사장

“제게는 평생 은인이죠”

[인터넷 대한뉴스]글 김윤옥 | 사진 이동현 기자

 

편집기획책임자으로서 발행인에 관하여 글을 쓰는 것에 대해 여러 달을 고민했다. 고민 끝에 9월호부터 연재하기로 한 것은 발행인과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수많은 인물과 관련이 있다. 일화를 입증하는 인물들이 생존해 계실 때 글과 동영상으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도리, 사람의 정, 행복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본지 발행인이 걸어온 길을 보면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배려하며 살아야 행복한 사회가 될지에 대한 길이 보인다. “내가 말과 행동이 다르다면 언제든지 지적해주소”라고 말하는 본지 발행인이다.

직원들만 듣고 지나기에는 너무 귀한 인연들, 특별한 시선으로 다시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사람은 누구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인생의 나락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김원모 발행인은 최고의 자리에서 최하의 자리, 다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경험을 했다. 무슨 말인가. VIP 대접을 받던 고객이 그 업장의 직원이 되었다가, 사장으로 다시 지금은 친구로 지낸다. 그의 인연을 따라가 보면 인생이란 것이 180도로 변화되고 또 달라지는 흔치 않은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김원모 발행인과 백선동(현재 종로구 낙원동 마산 아구찜 사장겸 낙원동 현 상가번영회장) 씨와의 27년 여에 걸친 크고 작은 일을 돌이켜본다. 그 속에는 인생의 목표가 뚜렷하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고, 무엇보다 상대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면 섭섭할 것도 없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고객에서 직원으로, 다시 사장에서 친구가 되기까지


백선동 씨는 1980년 대 초 종로구 낙원동 파고다 극장 옆에 ‘샘밭'이라는 룸살롱을 크게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는 볼펜만 있으면 단골 술집에서 외상 사인 한번 안 해본 이는 없었던 시절, 김원모 발행인은 고객 중에서도 VIP 고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종업원으로 일을 할 수 있느냐며 백 씨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는데 몇 번을 찾아오길래 진짜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손님이 외상을 못 갚으면 담당 웨이터가 갚아야 하기 때문에 재정보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재정보증을 가져오더니 상세한 것은 묻지 말라며 일 년만 일을 하겠단다. 상무라는 직함을 가지고 웨이터 일을 시작했다. 친구, 선배, 후배 등을 고객으로 불렀고, 지인이든 손님이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이것저것 궁금증이 커졌다. 때로는 내색은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우는 모습도 느낄 수 있었다.


1년2개월 후, 돌연 그가 그만두겠다는 것이었다. 손님일 때도 최고였고 직원으로서도 최고인데 막상 나간다니 어찌나 서운하던지. 술집에 한번 발을 디디면 손님의 외상값이 깔리기 마련이고 그것을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되갚는 방식으로 다른 술집으로 팔려가기도 한다. 김원모 발행인은 외상값 4,500만 원 가운데 4,000만 원을 정리하고 500만 원은 열심히 일한 것을 감안하여 보너스로 삭감을 받았다.

 

술장사를 계속하면 돈을 받을 텐데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 그 자리에서 약 5,000만 원어치의 외상 장부를 다 소각했다. 다시 몇 개월 후, 백씨는 ‘합동뉴스'라는 언론사 대표가 된 김원모 발행인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때 백선동 씨는 ‘합동뉴스'의 차장 명함을 얻는다. 김원모 발행인의 말처럼 발행인 자신이 백선동 씨의 사장이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친구다.


아무 말 없이 나의 형님(백기완)을 거두다


백선동 씨는 쌍둥이다. 위의 형님 한 분이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와 뇌성마비를 앓아 장애 1급이다. 혼자서 거동은 물론 말도 못하고 대소변도 못 가렸다. 방바닥에 똥을 발라대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와 식구들의 고통이 심했다. 당시에는 돈을 줘도 위탁할 만한 시설이 없었다. 어머니는 형님과 같이 죽자며 약을 먹었지만, 인명은 재천이었다.

 

하루는 시골집을 다녀오다 우울한 마음으로 김원모 발행인을 찾았다. 몹시 우울해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냐고 묻길래 집안 사정을 털어놓았다. 가만히 듣더니 아무 말 없이 자기한테 형님을 보내라는 것이다. 가족조차도 힘든데 어떻게 남이…듣는 귀를 의심해 절대 믿지 않았다. 차에 타라고 하더니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어떤 비닐하우스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30여 명의 장애인이 생활하고 있었다. 지금의 부활교회다. 그는 김갑순 전도사라는 분이 장애인을 돌보고, 김원모 발행인이 개미처럼 먹을 것을 물어 나르며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눈빛으로 말하는 장애우와의 대화


백선동 씨의 형님이 부활교회로 들어간 것이 43세 때의 일이다. 그곳에서 23년을 지내다 2010년 경기도 여주로 옮겨 큰 누님과 잘 살고 있다. 현재는 66세다. 백선동 씨는 그의 형님이 입소한 지 3개월 후, 대소변을 가린다는 말을 들었다. 형님의 정신연령이 2~3세  아기인 줄 알았는데 절대 믿기지가 않았다. 정말 형님이 달라졌다. 웃음을 모르고 살던 사람이 24시간 웃고 있어 미스터 스마일로 불렸다. 어찌 된 일인가.


김원모 발행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의 눈빛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형님과 단둘이 눈을 마주하니 눈동자를 피하는 것이 부끄러움이 있다고 느껴졌다. 그것은 말은 못해도 생각은 있는 것이다. 발행인은 형님에게 솔직하게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했다. 형님 곁에서 계속 있을 수도 없고, 왔다갔다해야 하는데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온 곳으로 다시 가야 된다고 나직이 말했다.


그러자 워~워~하며 안된다는 몸짓을 보냈다. 맛있는 음식을 먹자고 해도 안 먹었다. 그러면 대변보기 힘들다고 표시했다. 화장실 개조를 서두르고 몇 개월 후, 스스로 용변을 처리하는 놀라운 일이 생긴 것이다. 이제는 장가가야지 하고 말을 건네면 좋아하면서도 자기가 생활력이 없어서 안 된다고 의사 표시를 한다. 속내도 수줍게 표현할 수 있게 된 그를 보며 김원모 발행인은 말했다. 고목나무에도 언젠가 아름다운 꽃이 필 수 있다고. 


도깨비 같은 사람, 고마운 마음 말로써 표현할 길 없어


백선동 씨는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김원모 발행인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보답할 길이 없다고 한다. “저에게는 은인이죠. 부모님도 편안히 눈을 감으셨어요. 그런데 한 번도 생색내지를 않아요. 가끔 들르면 아구찜 값을 받지 않으려고 해도 꼭 밥값을 내는 겁니다. 집으로 초청하면 감사하게 잘 먹겠지만 장삿집이니 돈을 내는 것이 도리라고 말합니다.”


백 씨는 그 외 김원모 발행인과 관련된 몇 가지 일화를 꺼내어 본다. 장애우 중 생활이 문란한 사람이 있어 생각 끝에  12쌍을 결혼시킨 일, 또 산에 텐트를 짓고 노숙자로 생활하는 할머니를 엄마처럼 대하며 같이 밥을 먹고 서로가 기뻐하는 모습 등이 남달랐다.


그는 김원모 발행인을 남들이 생각 못하는 하도 기발한 행동을 많이 해서 ‘도깨비'라고 부른다. 좋은 일에 뚝딱, 힘든 곳에 뚝딱 하고 나타나 도와주는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움직였던 사람, 남의 어려움을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서 하는 사람, 친구지만 많이 배우고 있다고 한다. “제 아내는 김원모 발행인이 부르는 ‘연상의 여인' 노래를 엄청 좋아합니다. 20년 전에 불러준 노래를 아직도 기억하며 언제쯤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으려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은 쉬워도 행동은 어려운 일, 따뜻한 마음을 나누다


짧은 시간 긴 얘기를 어찌 다 들을 수 있을까. 자신도 넉넉하지 못한데 남을 돕는다는 것은 말은 하기 쉬워도 행동은 어려운 일이다. 김원모 발행인에게 어떻게 함께 나누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느냐고 물었다. “글쎄요! 일반적인 사람은 아무리 대접을 잘해줘도 잘 먹었다는 말 한마디로 그때뿐이지만,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들은 평생 잊지 못합니다. 누구나 돕고 도움을 받는 것은 전생에 도움을 받았든가 다음 생에 받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계속해서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김원모 발행인과 장애우들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미안하고 고맙게 생각하는 일 몇 가지를 털어놓는다. 미안한 마음은 무엇일까. 장애우 12쌍의 합동결혼식 때다. 결혼식을 마치면 건강한 사람이 첫날밤을 치르듯이 깨끗한 모텔에서 신혼 첫날밤을 치르게 해준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지키지 못했다. 한두 쌍이면 모르지만 12쌍이 기어 다니면 어떤 손님이 오겠느냐며 모텔 주인들은 손사래를 쳤다. 송파구 올림픽촌에 있던 금강파크라는 곳에서 그나마 방 2개를 내 준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비닐하우스로 돌아와 신방을 차렸다. 정신이 부족한 사람은 자기 자리를 못 찾아서 아우성치는 모습들이 지금도 가슴이 저린다. 고마웠던 일은 무엇일까. 어느 날 사무실에 조기가 배달됐다.

 

누가 보냈는지 출처를 알 수 없었지만, 맛있게 먹었다. 삼 년 후, 김영배 장애우가 보낸 것을 알았다. 그는 시장통에서 수세미 등 생활용품을 팔아 번 돈으로 조기를 사서 보낸 것이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그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

 


윤규영 장애우는 양쪽 팔이 없다.  1.8리터 플라스틱 병을 잘라 양쪽에 갈고리를 끼어 손을 대신해 생활하는 사람이다. 그는 갈고리 손으로 김원모 발행인의 데뷔곡 ‘키스같은 여자'를 연습해 사무실을 찾아와 학생들이 쓰는 멜로디언으로 연주해 들려줬다. 어떻게 배웠냐고 묻자 교회서 유행가를 하면 목사님께 혼이 나서 이불을 덮어쓰고 오랜 시간을 연습했다고 한다. 그때의 가슴 뭉클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 할 수 있을까. 아마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큰 선물이었을 것이다.  


  
진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야   


지면에 다 싣지 못하는 실화가 많다.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장애인시설에도 인간의 사계절이 피고 지며 웃음꽃이 만발한다.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곳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장애인을 돌보는 명목으로 건강한 사람이 먹고 사는 일도 있다고 한다. 진정으로 장애인을 도와야지 생각한다면, 건강한 사람은 옆에서 거들어주는 것에 그치고, 장애인에게 직접 살림을 맡겨 지출도 하고 관리하며 생활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리고 김원모 발행인의 비닐하우스 외의 생활 , 술집 종업원 일등 이런 저런 일들은 때가 되면 ‘종합편'에서 상세하게 밝힐 예정이다. 다음은 어떤 곳에서 어떤 인연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된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1년 12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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