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대한뉴스]글 이선아 기자 | 사진 연합뉴스
북한이 개성공단을 폐쇄하면서 남북 관계가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 이전으로 돌아갔다. 42년간 지속됐던 남북간 연락망이 사실상 단절된 것이다. 개성공단이 문을 닫고 북한의 위협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63주년을 맞는 6·25전쟁은 그 의미가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기까지 3여 년의 시간 동안 6·25전쟁이 남기고 간 참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현재 등록된 이산가족 신청자는 총 12만8,700여 명. 지난 3월까지 전체 이산가족의 58.0%인 7만5,000여 명이 생존한 상태였다.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사망률은 평균 2.9%로 사망자수가 연간 약 3,800명에 이르며 현재까지의 누적 사망자 비율은 42.0%에 달한다. 결국 이들은 전쟁으로 어쩔 수 없이 헤어진 가족들을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이다.
서울 돌아오려 밀도강(密渡江) 중 참사
1950년 6월 25일 당시 인민군은 전쟁 하루만인 26일 의정부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했다. 한국군은 28일 오전 2시 30분경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 이후 1953년까지 38선 부근에서 피나는 싸움은 계속됐다. 서울 탈환과 점령이 몇 차례 이뤄지면서 서울을 떠난 피난민들은 몇 년 동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다가 몰래 한강을 건너기도 했지만 열악한 환경 탓에 결국 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당시 미 8군사령부에서는 군 작전상의 이유로 한강의 도강을 제한했기 때문에 ‘도강증’ 소지자 외에 일부 인사만 왕래를 할 수 있었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 혹은 고향을 찾아 서울로 돌아가려 했던 시민들은 죽음을 맞는 불상사까지 감수하며 몰래 강을 건너야 했다. 경향신문에서 1952년 1월 22일 결빙한 한강을 넘어 서울로 가려다가 숨진 피난민에 대해 쓴 기사를 보면 이러하다.
‘남하피난민들의 마음의 고향 ‘서울’에 돌아가려는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강이 얼어들고 3월 귀향설과 더불어 더욱 자극을 받아 날로 높아가고 있는데 서울 경찰국경비계에서 지난 10일부터 16일까지 6일간에 걸쳐 적발 취급한 소위 밀동강자의 수는 123명에 달한다 한다. 불법도강 하려다가 일가족 3명이 익사한 사건도 있었다.
수원 이남으로 피난 갔던 박기홍 씨는 서울에 복귀하고 아내 이선옥, 장녀 옥희, 장남 규진을 데리고 영등포에 머물러 있으면서 밀도강할 기회를 노리던 중 후퇴 당시 같이 피난을 나갔던 황흥관 씨를 만나게 되어 밀도강할 것을 의론한 끝에 지난 17일 하오 9시 경 황씨 가족 칠 명과 밤섬(율도)을 떠나 얼음을 타고 마포강뚝을 향하여 강 중간 지점 살얼음 지대에 이르러 불행히도 빠져 죽었다 한다.’
한강 도강 제한은 1953년 8월 15일에 이르러서야 풀린다. 그토록 바라던 서울로 돌아온 피난민들의 마음은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에, 턱없이 비싼 물가에 또 한 번 좌절해야 했다. 1953년 당시 서울의 방세는 3개월에 4,000환. 보증금이 월세의 3, 4개월분 이상이었다. 주택의 매매가격은 도심지대에서는 매간(賣間) 4~5만 환에서 7~8만 환까지 호가했다.
이는 새롭게 집을 짓는 것보다도 비싼 가격이었다. 당시 서울로 올라온 인구수가 급격하게 늘면서 주택난은 극에 달했고 가옥 분쟁, 땅 분쟁도 심각했다. 폭격 때문에 전차와 버스가 턱없이 부족해 만원전차, 만원버스를 타며 피난민들은 또 다른 ‘전쟁’을 실감해야 했다.
피난길에 잃은 엄마를 찾다
휴전한 1953년 당시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만 10만여 명에 달했다. 아이들은 길에서 구걸과 구두닦이 등을 하며 어렵게 목숨을 이어갔다. 배가 고프다 못해 먹을거리를 훔치는 고아도 많았는데, 가게 주인에게 걸려 맞아서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들은 워낙 먹지 못한 탓에 몸이 쇠약했기 때문이다.
기적 같이 모자가 상봉하는 일도 있었다. 6·25전쟁 피난길에 엇갈린 후 생사를 모르던 아들이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한걸음에 달려간 안오순씨. 6세였던 아들이 18세 늠름한 청년이 된 모습에 맞는지 아닌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1962년 5월 21일 ‘기적의 모자상봉’이란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살펴본다.
‘아들을 찾은 기쁨의 주인공은 서울 성동구 상왕십리동에 사는 안오순(35)씨. 안 씨가 장남 최경천(18)군을 잃은 것은 50년 6월 말 괴뢰군이 서울 교외로 밀려와 허둥지둥 몸을 빼쳐 피난하던 때의 일이었다. 경천 군을 잃어버린 날은 6월 말(날짜 미상)낮 11시쯤. 안 씨는 시동생 3명과 장남 경천(당시6세), 이남 경호(당시4세), 장녀 경순(당시2세) 삼남매를 데리고 뚝섬 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그러나 교외에는 괴뢰군이 우글거리고 살곶이 다리가 끊어져 샛강을 건너는 도리밖에 없었다. 리어카에 실었던 피난봇짐을 머리에 이고 몇 번인가 샛강을 건너 짐을 나른 후 막상 아이들을 데려가려고 보니 경천 군이 온 데 간 데 없었다 한다. 포성은 머리 위에서 나고 다리는 떨리고 이런 중에 밤을 새며 부근을 뒤쳤으나 헛수고. 그 후 영영 죽은 자식으로 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왔다.
그런지 12년만인 닷새 전 14일 안 씨와 친히 지내는 이웃 김 씨 할머니(60세가량)가 안 씨 집을 찾아와 대뜸 “아들이 살아 있으니 가보자”는 것. 곧이들리지가 않았으나 안 씨의 시동생과 시누이들이 헐레벌떡 달려가 보았다. 김 씨 할머니가 가리키는 소년은 올해 18세라는 유영호군. 유 씨는 김 씨 할머니 집에 세 들어 있는 성동서 근무 김천흥(40)형사 집에서 4년 동안 친자식처럼 보호를 받아온 고아였다.
18세에 낳아 23세에 잃은 아들이라 안 씨는 얼핏 그 모습이 떠오르지는 않았으나 다른 가족들은 “어릴 때 모습이 틀림없다”고 기뻐했다. 소년의 왼편 눈 위에 어릴 때 자주 앓던 ‘다라키’의 흉터가 지금도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별달리 신체의 특징이나 어릴 때의 사진마저 전쟁 통에 모두 불타버리고 없는 지금 아들이 아니라고 할 만한 점도 없었다. “피를 뽑아보자”는 가족들의 말도 있었지만 안 씨는 ‘틀림없이 내 아들’이라는 믿음이 앞서 소년은 옛 이름 최경천으로 돌아와 19일부터 다시 어머니 품에 안기게 되었다.’
그 시절 한목소리 “6·25를 기억하자”
지난해 정부에서 흥미로운 설문조사를 했다. 성인 남녀와 청소년 2,000명을 대상으로 6·25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물었더니 10명 중 6명이 잘 모르고 있던 것. 가슴 아픈 민족의 비극이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점 잊혀가는 6·25전쟁은 1973년에도 ‘잊지 말아야 할’ 서글픈 우리의 역사였다. 1973년 6월 25일 휴전 30주년을 맞아 경향신문에 기고한 한 주부의 글을 보면 그 절실함이 느껴진다. ‘여름비가 부슬거리던 밤이었다.
시시각각으로 들려오는 소리는 의정부를 지났다고 하고 미아리고개를 넘어서 안국동까지 왔다고도 했다. 재빠른 사람들, 또 고관의 가솔들은 벌써 남쪽을 향해 한강을 건넜다고 떠들었다. 분노와 두려움과 흥분과 초조가 격류 되어서 가슴을 팽배하던 그 밤. 동이 튼 아침 하늘은 구름을 헤집고 맑게 갰으나 땅위엔 온통 붉은색이 넘쳤다. 그 후 숱한 날들을 생사의 분간조차 어려운 고비를 겪고 견디면서 그래도 살았노라고 호흡을 가늠하던 쓰라린 기억들이 생생하다. 이따금 아이들이 6·25를 물어오면 나는 아빠에게, 그 이는 나에게 서로 미루는 버릇이 생기도록 잊고 싶은 일들인데.
그러나 요즘은 6·25를 정말 잊어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까워진다. 남북적십자회담의 무드 속에 통일과 평화를 염원하는 국민의 마음들은 한결 같은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6·25를 잊고 과거의 아픔을 잊는 구민이 될 수야 있겠는가? 오히려 통일이 오고 평화가 찾아든 뒷날까지라도 해마다 6·25만은 옷깃을 여미고 그날의 아픔을 되새겨 새로운 마음가짐을 다짐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우리나라 성인 대부분과 청소년의 절반 이상은 일 년에 단 한 번도 안보와 관련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한다. 관련 행사도 예전 같지 않아 정부의 조촐한 기념행사와 소규모 전시만이 그날을 기억할 뿐이다. 전쟁으로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이들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잃은, 전쟁이란 운명에 어쩔 수 없이 휘려야 세상을 뜬 그분들의 넋을 기리며 다시 한 번 6·25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때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3년 6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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