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25 (일)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월간구독신청

사회일반

김원모 발행인의 아름다운 인연 - 17 김혜근 씨

법보다 주먹이 가까웠던 시절 김혜근 씨와 발행인의 일화

[인터넷 대한뉴스]  글 김윤옥 기자  | 사진 홍성준 기자

 

 

 

빠른 경제 성장만큼이나 사회상도 급속도로 변화했다. 요즘 대학생들이 불과 30~40년 전 장발이나 미니스커트 단속에 걸려 ‘새끼줄 친 가로수’ 안에 갇혀 있어야 했던 부모들의 젊은 시절을 이해할 수 있을까.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를 외치며 격동기 박탈적 소외감으로 자신들의 범법 행위보다는 사회적 병리를 외치며 목숨까지 저버렸던 범죄자들.

 

1980년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각종 사회악을 단시일 내에 효과적으로 정화, 사회개혁을 이룬다는 명분으로 삼청교육대를 신설했지만 정권이 바뀌고는 위법이라는 판정을 받는다. 이런 혼란기 와중인 1980년대 후반 6.29선언으로 정국이 좀 안정이 되나 싶었지만 헌법개정, 대선 등 정치가 혼란스러워 민생은 뒷전이요 무법천지인 곳이 있었으니 바로 왕십리 사거리 클럽 일대였다.

 

경제발전에 따른 접대가 늘어나며 지역마다 번쩍이는 네온사인 간판이 늘고 유흥가가 호황을 누렸으나 그 이면에는 그에 기생하여 남을 괴롭히는 조폭들이 기세를 누렸던 그때의 이야기다.


당시 김혜근 씨는 100여 명의 종업원이 있는 전풍나이트클럽의 20대 젊은 투자자로, 매일 건달들이 드나들며 돈을 뜯어가거나 행패를 부리는 것에 그저 당할 수밖에 없었다. 공권력에 도움을 청하면 형식적으로 잠시 둘러보다 가고, 조폭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보복을 했다.

 

유흥가의 뒷면은 모른 채 사업성만 생각하고 거금을 투자해 놓은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조폭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발행인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때 맺어진 인연이 뜸하게 이어지다 ‘선묵 혜자 스님과 마음으로 찾아가는 108산사 순례’에서 우연한 만남을 하게 된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김혜근 씨는 발행인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으니 그 마음 또한 가상(嘉尙)하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호칭은 발행인과 김혜근 씨는 보살로 통일한다.

만남

 

보살의 집안 형부가 발행인의 친구다. 친구가 사업이 잘될 때는 발행인을 2~3차례 도와주어 평소 고마움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발행인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그간 사업도 부도나고 교통사고로 성동구치소에 있으니 면회를 와달라는 것이다. 발행인이 면회 갔을 때 우연히 보살도 찾아와 함께 자리했다.

 

그때 친구는 발행인에게 보살의 아버지와 그녀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첫 만남 후 30여 년이 흘러 ‘인연’ 취재 차 토요일 오전 대한뉴스 사무실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어찌 요즘 들어 부처님 도량에서 자주 만나는 일이 생기냐며 옛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기억나세요? 친정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똥구덩이에 빠지셨던 거.

 

포천시 이동 군부대 옆 외딴집에서 돼지 기르시던 아버지 문상오시다 거름으로 쓰려고 인분과 돼지 오물 모아 놓은 커다란 구덩이에 차가 빠졌잖아요. 발행인과 친구 분은 차에서 나오려다 온 몸에 똥칠하시고 야밤 불빛도 없는데서 경운기 동원해 차 끌어내느라 초상 치르던 동네 분들이 전부 그리로 달려갔죠.” “아 난 잊고 있었는데 생각나네요. 그 냄새 어찌나 지독하던지 아무리 씻고 닦아도 냄새가 며칠 가서 아주 고생했죠.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요.” “밖이 소란스러워 나가보니 발행인께서 엉망인 모습으로 있어 깜짝 놀랐는데 아버지 상은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친구가 그 때 그러지 않았나요. 양돈하는 보살 아버지께 군부대에서 나오는 짬밥 좀 돼지사료로 가져갈 수 있게 해달라고. 그래서 아버지 찾아뵙고 연락처를 놓고 왔더니 그 번호를 보고 누군가 연락한 거지요.” 친구가 잘나갈 때면 모를까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하는 부탁이라 더 귀담아 들었다는 발행인. 보살과의 일을 살펴보자. 

 

다급한 전화

 

“제가 전화를 드렸죠. 조폭들에게 일을 당하고 나자 바로 며칠 전 형부 면회장에서 만난 발행인이 생각났어요. 겨우 한 번 뵈었을 뿐인데…. 조폭들이 다녀가고 나면 종업원들이 무서워서 도저히 장사를 못하겠다는 거예요. 수시로 찾아와 돈을 달라던지 아니면 아가씨들을 마음대로 끌고 나가니 조폭이 업장에 나타나면 여종업원은 숨기 바쁘고 손님들은 분위기 험악해서 그냥 나갔죠. 인테리어도 새롭게 하느라 비용을 많이 들여 사업을 시작했는데 큰일이다 싶대요.

 

며칠 가게에 있어보니 행패가 너무 심해 경찰에 신고해 봐도 소용없었어요. 신고한 날은 어찌나 보복이 심하던지 기물을 부수며 더 소란스럽게 난리였죠. 젊어서인지 전 그때 진짜 멋모르고 그들을 상대했어요. 지금 같으면 무서워서 그런 사업할 엄두도 못 냈을 텐데 말이죠. 어느 날 조폭들이 무더기로 찾아왔어요. 저를 비롯한 종업원이 항변하다 그들의 폭력에 몇 명이 맞고 쓰러지는 사고가 있었어요. 그간 대들거나 반항을 못하다 이대로는 정말 안 되겠다 싶어 악을 쓰며 붙었다가 너무 무서워 바닥에 쓰러져 혼절한 척 했죠.  조폭들이 언제 또 들이닥칠지 몰라 걱정이 되는데 발행인이 생각나는 거예요. 전화 드리니 바로 오셨어요. 조폭들이 너무 못살게 구니 도와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40대 조폭 두목이 무릎을 꿇고

 

“며칠 후 발행인이 용두동 백조다방으로 나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다방으로 들어가려니 입구에 조폭 일당이 서성거리고 있고 그 안에 발행인과 두목이 앉아있는 거예요.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너무 무서워 오금이 저리는데 발행인이 저를 보시고는 들어오라고 해서 간신히 발걸음을 떼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장정들도 감히 못 말리는, 성동구 일대를 휘어잡는 조폭들에게 제가 그렇게 반항을 하고 소리치며 욕을 했으니. 또 언제 와서 제게 행패를 부릴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얼굴이 마주치니 얼마나 놀랐겠어요. ‘저 조폭들이 여기 어쩐 일로, 웬일이야’하며 겨우 자리에 가서 앉았죠. 발행인께서 ‘용서를 빌어’하시자 저보다 연륜이 훨씬 많은 그 두목이 부하들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어린 제게 사과를 하는 거예요. 지난 일은 정말 잘못했다고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 절대 없을 것이라고.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데 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벌벌 떨었어요. 그날 이후 영업하는 데 조폭 때문에 애먹는 일은 없었고 도리어 보호를 받았어요. 전에는 괴롭히던 그들이 업소를 찾아와서는 어려운 일 없냐고 자기네들이 해결해주겠다고 했죠. 하물며 추석 때는 두목이 찾아왔다기에 놀라서 가게로 나가니 떡값이라며 5만 원이 들어있는 돈 봉투를 줘요. 발행인께서 도대체 무슨 조치를 취하신 것인지.”


친구와 협객

 

발행인은 말한다. “친구가 아주 어려울 때였어요. 친구가 잘 나가고 구치소에 있지 않았으면 그리 개입을 안 했을 건데 제게 부탁했잖아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도와주라고.” 당시 성동구 일대 두목이었으면 세력이 막강했을 텐데 어떻게 어린 여자한테 자존심을 버리고 사죄하게 했는지 기자는 궁금해서 물었다. “법이 아무리 강해도 주먹이 가까울 때가 있고 주먹이 아무리 세도 사람 마음이 더 가까울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죠. 조직을 해산시키든가 전풍나이트를 보호하든가. 그들은 깡패였지만 제 말을 들었어요. 여자 손대고 아무 데나 주먹 쓰고 부당하게 갈취하고, 상대 배려라는 것은 전혀 없이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깡패는 3류 인생입니다. 그러나 협객은 그러지 않아요.

 

일반인들에게는 깡패와 협객이 어떤 면에서는 같아 보일지 모르나 그 둘은 엄연히 다릅니다. 협객은 여자와 남의 자산에 대해 함부로 손대지 않습니다. 힘겨루기 할 때면 도전장을 보내 결투를 신청하고 절대 무기(도끼나 칼 등)를 쓰거나 뒤에서 비겁하게 공격하는 법도 없어요. 결투에서 지면 바로 무릎 꿇고 승복하죠. 남자의 세계입니다. 협객은 의리와 도리를 아주 소중히 여깁니다.”


부탁은 부탁으로 끝나야 한다

 

그간 조폭으로 인해 매일 뒤숭숭하고 안정되지 않았던 것이 정리되자 나이트클럽 사장과 종업원들이 발행인에게 고맙다며 몇 번 초대를 했다. 발행인은 마침 왕십리에서 모임이 있어 손님 5명을 대동하여 업소를 방문했다. 보살과 종업원들은 발행인이 나타나자 저마다 음식을 대접한다고 들고 와서는 인사를 했다. 보살은 말한다.

 

 “발행인께서 나중에 알고 보니 계산을 다하고 나가셨어요. 투자자인 저도 물론이고 종업원들이 얼마나 고마웠겠어요. 감사한 마음에 이 음식 저 음식 갖다 드린 것인데 그걸 다 돈을 내셨으니 후에 제가 전화 드려서 식사 대접을 꼭 하고 싶다고 했는데 한 번도 안 만나 주셨어요. 그런 분이세요. 몇 번을 요청해도 다 거절하셨죠. 그러다 15년이 흘러 소문에 언론사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는 수소문해서 대한뉴스 서초동 사무실로 친구들과 찾아가서 식사를 처음 했습니다. 결혼 후에는 제가 남편에게 발행인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했던지 남편이 꼭 만나 뵙고 싶다고 해서 대한뉴스 사무실이 어린이회관에 있을 때 같이 찾아갔었죠.” 


마음의 선물

 

기자는 발행인에게 물었다. “그 정도 봐주셨으면 식사 대접 충분히 받을 만 하신 거 아닌가요?” “글쎄요 만약 업소에 갔다면 술 접대와 봉투 하나 받고 아가씨와 2차 가지 않았을까요. 그러면 도와준 마음은 간 곳이 없고 대가를 바라고 한 것뿐이 더 되겠습니까? 친구대신 도운 것입니다. 친구에게 마음의 선물이나마 주고 싶었죠. 친구를 봐서 보살을 도와준 것이기 때문에 대접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108산사 순례길에

 

도선사 선묵 혜자 스님을 21세기 움직이는 생불이라고 말하는 발행인은 취재 차 스님과 동행했다가 6년 동안 108산사 순례길에 참여한 보살을 우연히 만났다. 자연이 자신의 종교라고 하는 발행인은 30여 년 종교 담당기자로서 종교를 가리지 않고 연이 닿으면 기사화하는데 순례길에서 보살과 몇 번 마주친 것이다. “죄짓고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또 깨달았습니다. 만약 그 때 내가 안 좋은 행동을 했다면 지금과 같은 만남이 되겠습니까. 부처님 도량에서 만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언제부터 불자였어요?” 보살은 “친정 큰아버지가 스님이셔서 불가와는 인연이 깊습니다. 지금 시댁도 불자 집안이구요. 절에 열심히 다녀요. 이 세상에 태어나 제 평생 가장 큰 선물을 받은 것은 지금의 남편 만난 것과 선묵 혜자 스님과 인연이 되어 마음으로 찾아가는 108산사 순례 회원이 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취재 후기

 

우리는 어느 자리에서 옛 인연을 다시 만날지 모른다. 만약 그 인연이 아름다웠다면 그 간의 기다림, 그리움, 아쉬움으로 가슴 벅찰 것이고 만약 악연이었다면 많이 불편할 것이다.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이어지는 이 인연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소설 같다. 만날 사람은 꼭 다시 만난다더니 만남을 의도적으로 피했어도 세월이 지나 중년이 되어 부처님 도량에서 다시 만나 옛날이야기하며 담소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발행인은 직원이나 지인들에게 인연이 다해 헤어질 때는 미운 사람이라도 꼭 음식이나 차 대접을 하라고 한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친구의 부탁을 모른 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귀한 선물을 주었던 발행인의 실화. 남자의 참된 우정은 어떤 것인지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 보기 쉬운 뉴스 인터넷대한뉴스(www.idhn.co.kr) -

- 저작권자 인터넷대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