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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김원모 발행인의 아름다운 인연 - 20 김재천 회장

김재천 (사)세계한민족평화통일협의회 총재와 발행인과의 일화

[인터넷 대한뉴스] 글 김윤옥 기자  | 사진 엄명하 기자


발행인의 아름다운 사람들 20번째 인연은 대한민국 역사상 사회적·경제적으로 가장 급변기였던 20세기 후반으로 거슬러간다. 김재천 총재와의 만남은 한 시대를 건너오면서 문·무 양면에서 활약했던 사나이 세계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발행인은 1989년 KBS2에서 방영됐던 드라마 ‘무풍지대’에 나오는 별칭 낙화유수, 김두한의 후계자 조일환 씨 등과 계파는 달라도 호형호제하며 가깝게 지냈는데 그중 김 총재도 있었다. 한 때는 같은 세계에서 우정을 다졌지만 세월 따라 가는 길은 달랐다. 발행인은 언론계에서, 김 총재는 남북평화통일 기반을 다지는 일에 힘을 쏟았다.


  만남

 

드라마 ‘무풍지대’는 격변기 시대 정치와 주먹 세계의 실화를 극화해 인기를 끌었다. 김두한, 시라소니, 이정재, 유지광 등 협객 사나이들 이야기는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게 했다. 일본 야쿠자 세력에 맞서 싸운 지역 가운데 남은 곳은 종로와 명동이었다. 김두한은 종로거리를 넘보는 하야시와 대립했고, 명동은 김 총재가 가장 존경하는 신 상사(본명 신상현, 군에서 상사로 예편하여 얻은 별명)와 그의 동료가 지키고 있었다. 김 총재는 신 상사의 최측근이었다.

 

일제시대 야쿠자에게 무너져가는 상인들을 지키고 보호한 것은 바로 협객들이었다. 그 당시 협객은 요즘 건달이나 깡패와 달리 도리를 알고 나라를 생각했다. 약한 자는 건들지 않으며 누구와 힘겨루기 주먹다짐이 있으면 도전장을 띄우고 양쪽이 허락된 곳에서 도끼나 칼과 같은 무기 없이 맞대결을 펼친다. 승부에서 지면 깨끗하게 무릎 꿇고 승복한다. 떠날 때 떠날 줄 알고 의리 있고 재정도 튼튼했다. 김 총재는 명동, 발행인은 전국구로 있으며 도자기나 그림이 필요할 때면 김 총재에게 부탁하곤 했다

 

김재천 총재는

 

1987년 6.29선언 직전 각종 시위가 절정에 이르러 민주화라는 미명 아래 각종 폭력시위가 난무하고 소비와 향락 풍조가 극에 달했다. 김 총재는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대한민주수호총연맹을 만들어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사)세계한민족평화통일협의회(1991년 통일부 산하 법인 인가 받음, 이하 한평통)의 전신이다.

 

25년 넘게, 있는 사비 다 들여 통일포럼을 열고 국내뿐 아니라 미국, 일본, 브라질, 중국, 러시아의 한인들과 각국에서 민족공동체통일 방안에 관한 세미나 개최 등 일찍부터 분단된 조국에 대한 아픔을 토로하며 통일을 꿈꾼 협객이면서 사업가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카슨 시장으로부터는 명예시민증을, 중국 연변대학에서는 명예교수를, 카자흐스탄공화국 국립여자사범대학에서는 명예교수 겸 명예 인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브라질문화원으로부터는 사회지도자상을 수여했으며 여러 곳에서 수많은 공로상을 받았다. 선배에게 인정받고 후배에게는 존경받는 그런 세월을 살아온 사람이다. 발행인과 서로 계보는 달라도 청년시절부터 형과 아우 사이로 발행인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김 총재는 서울 시내에서 세 개의 화랑을 운영하고 있어 도자기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문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영화 신성일, 문희 주연 ‘허무한 마음’과 신성일, 남정임 주연 ‘야성녀’ 등을 제작했으며 스포츠 분야에서 복싱계 한국의 어머니로 불리는 심영자씨와 함께 88체육관을 창설하여 문성길, 김철호 등 복싱 세계챔피언을 키워낸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라 사랑 정신이 남다르다. 일찍이 안보를 철저히 생각하고 남북평화통일을 염원했다. 1991년 그의 분신과 같은 한평통을 발족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는 사이 사나이들 가는 길이 달라 만남에는 잠시 공백 기간도 있었다.

 

 김재천 총재 신문사 인수로 언론사에서 만남 그러나 곧 결별

 

김원모 발행인이 모 신문사 취재부장으로 있었을 때인 20여 년 전의 일이다. 언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김 총재가 그 신문사를 인수하여 발행인 겸 회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김원모 취재부장은 ‘형님은 언론과는 맞지 않습니다. 형님께서 아름답게 살아온 길을 희석시킬 수 도 있으니 언론을 그만두십시오. 여기에 머무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당시 김 회장은 ‘어차피 인수했는데 지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지 않은가. 아우님이 도와주면 좋겠는데…’라고 했다. 그러나 김원모 취재부장은 일주일 만에 신문사를 떠났다.

 

- 왜 일주일 만에 그만두신 것인지.


“제가 근무하던 신문사 경영진이 바뀌며 당시 부사장으로 변 씨(발행인과는 전부터 알고 지내며 따르던 주먹세계의 아우다)가 왔습니다. 언론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발을 들여놓고 벤츠를 타고 출근하는 것이었습니다. 언론사는 고급 외제차를 타고 와서 폼 잡는 곳이 아닙니다. 언론사가 세상 밖에서 보는 것과는 많이 다르더군요.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 배려, 의리… 이런 것들이 별로 없었어요. 떠날 때가 되었구나 생각하고 떠났죠.” 그 후 부사장과 동료들은 발행인을 설득하려 했다. 변 부사장은 발행인에게 ‘형님, 제가 잘 모실테니 도와주십시오’라고 했지만 이미 본인이 있을 곳이 아니란 판단이 선 발행인은 어떤 조건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정통 언론사 몇 곳을 제하고는 사이비 언론인들이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활개치던 때였다. 이 일로 두 분의 관계는 소원해졌으며 김 총재도 얼마 안가 신문사를 넘겼다.

 

발행인 김 총재에게 다짜고짜 전화 걸어 다시 찾은 우정

 

발행인이 서울지방경찰청 출입기자 시절이다. 쁘렝땅백화점(을지로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짐)에 한창문 도예가의 도자기 전시회를 주선했다. 그곳은 아무나 전시회를 열어주지 않는 곳인데 이름이 알려진 도예가라 가능했다. 한창문 도예가가 누구인가는 2012년 12월 발행인의 아름다운 사람들 14번째 인연 ‘한기옥 도예가’편에서 잠시 언급되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때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한창문 도예가는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교에 도예과를 설립한 분이다. 그가 작품을 만들면 얼마나 정교한지 골동품으로 밀거래되어 조사받을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났다. 육영수 여사가 일본에 갔을 때 한창문 도예가의 사발을 귀히 여기는 일본 정부 관료를 보고 한국에 돌아와 수소문해서 찾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 왜 전시회를 주선하셨죠.


“훌륭한 도예가가 너무 고지식해 생활이 참 어려웠습니다. 쌀독에 쌀이 있으면 작품만 하던 5대째 내려오는 도예가의 집안이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앞섰죠. 경험도 없이 단순한 생각으로 한창문 도예가는 인정받고 유능한 도예가니 전시회를 열면 언론인과 문화인 등 많은 사람이 찾아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일주일 내내 한 작품도 판매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몰랐습니다. 카탈로그가 나오기 전 이미 작품의 50%는 판매가 이뤄져야 하는데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큰일이다 싶었죠.”
- 전화 한 통으로 전시작품을 완판했다면서요.


“전시회 마지막 날 고민을 하다 오후에 결심했습니다. 한창문 도예가가 저에 대한 믿음이 컸는데 작품이 한 점도 판매되지 않았으니 그 실망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런 분을 지켜줘야 우리나라 문화사업도 발전할 텐데…. 자존심을 접고 김 총재에게 전화했죠. ‘형님! 3시간밖에 남지 않았어요. 도와주십시오. 돈이 없으면 당좌수표라도 가지고 오십시오. 저를 보고 전시회를 했는데 제가 부끄러워졌으니 좀 와주세요’라고 하자 바로 찾아 온 김 총재는 1억 7,500만 원에 작품 전부를 샀습니다. 당시 3,000만 원이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큰돈인데 따지지도 않고 제 말을 들어주셨습니다. 장부의 체면을 돈하고 바꿀 수야 있겠습니까. 형님께서 제 체면을 살려주셨습니다.” 도자기 전시회를 계기로 두 사람은 옛날 우정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크고 작은 일들을 겪으며 인연은 더욱 깊어졌다. 

 

 김 총재가 보는 발행인

 

- 어떻게 그런 큰돈을 발행인 말만 듣고 쓸 수 있었죠 그것도 갑자기.


“그 당시 우리가 안지 10여 년이 넘었을 때입니다. 고향도 같은 경상도로 의리 있고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 동생이지만 존경했죠. 무슨 일이든지 도를 안 넘고 항상 정도를 걷는 사람이었어요. 당시 정치가나 세도가들은 타락을 많이 하는데 아우는 그런 것을 몰랐어요. 아우의 성품을 잘 알고 웬만해서는 부탁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인데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그대로 따랐죠. 워낙 이것저것 상황을 잘 고려하여 제안을 하기에 아우가 하는 일에는 토를 달 것이 없었습니다.”

 

- 형님께서 아우를 존경한다니 어폐가 있습니다.


“아우는 참 머리 좋고 앞날을 생각해 죽을 때까지 절차를 밟아서 갈 사람입니다. 예전부터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좋아했지만 주변 사람들이 아우를 참 좋아했어요. 저의 뜻이 좋다며 한통협도 행사 때면 후원해주고 격려도 해주고 도움을 많이 받았죠.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대하는 것이 똑같고 바른 생각으로 처세술이 아주 좋았어요. 언론사 참 어려울 텐데 20여 년간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용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월 보내는 모습이 아주 당당해요. 돈이나 권력, 명예 이런 것에 절대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무리 아우라도 존경 안 할 수가 없죠.”

 

취재후기

 

김 총재는 한때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는 것이 주요 일간지에 기사화됐다. 이 사건을 취재했던 기자들이 김 총재가 가벼운 벌금형으로 끝나는 재판을 보고 외국영화 ‘대부’의 주인공처럼 한국에도 대부가 있다며 김 총재를 지칭했었다. 통도 크고 통일을 위한 일념으로 사재를 다 털어가며 (사)세계한민족평화통일협의회를 키웠다.

 

어린이대공원 안에 ‘어린이헌장비’와 경기도 통일동산 옆 까치봉에 통일종도 건립했다. 중국 용정 비암산에는 선구자 기념비와 일제시대 때 없어진 정자를 다시 복원했다. 기능미화원 100쌍 합동결혼식을 올려주고 신부에게는 한복을 지어줬다. 한민족 정신을 일깨우고 통일을 위한 노력을 평생 해 오신 분이다. 일반인이 북한을 가는 것은 꿈도 못 꿀 때 평양 대박산단군릉을 방문하여 귀빈에게만 공개하는 지하까지 갔었다. 그 후 (사)세계단군민족총연합도 설립했다. 총재를 맡아 마지막 소원이 국조단군역사박물관을 건립하여 개천절 행사를 그곳에서 하는 것이다. 김 총재의 마지막 소원이 꼭 이루어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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