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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을 있게 한 어머니

안중근 의사 순국 105주기(3월 26일)

 

   
▲ 서울대 명예교수, 안중근의사기념관장

배천 조 씨 마리아(1862~1927)는 안태훈과 혼인해 1879년 9월 2일 배에 북두칠성 모양의 점이 있는 건장한 아들을 낳았다. 그가 바로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해 일제 침략의 상징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쓰러뜨린 위대한 영웅 안중근(安重根)이다. 안태훈은 재주가 뛰어나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일가를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으로 이주했다. 조 마리아는 여섯 살 된 아들 중근을 데리고 청계동에서 살림을 새로 시작해 대소사를 도맡으며 가정을 건사했다. 그러나 장남 안중근을 따라 진남포로 이주한 후에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여성도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리고 자신이 갖고 있던 패물을 선뜻 출연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으로 고종이 폐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안중근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가족들을 뒤로 한 채 국외로 망명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 사이를 빠져나가 방아쇠를 당겼다.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를 깨뜨리는 장본인 이토를 쓰러뜨린 안중근은 체포된 뒤 이내 뤼순 감옥으로 옮겨졌다. 감옥과 법정에서 안중근의 당당한 태도는 바로 어머니 조 마리아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조 마리아는 아들이 집안을 돌보지 않고 객지에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오히려 격려했고 이를 떳떳이 여겼다.

 1910년 2월 14일 일제는 안중근에게 사형을 언도했으나 안중근은 항소를 포기했다. 이런 결심에는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의 뜻이 크게 작용했다. 조 마리아는 아들에게 사형이 구형됐다는 소식을 듣고 두 아들 정근·공근을 급히 뤼순으로 보내 당신의 뜻을 전했다.“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大義)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뜻과 함께 하얀 두루마기 수의를 보냈다.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한매일신보와 일본의 아사히신문도 이 소식을 듣고‘시모시자(是母是子·그 어머니에 그 아들)’라고 보도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영웅 안중근은 어머니 조 마리아의 지극한 사랑을 입은 채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평화로이 숨을 거뒀다.

 안중근이 순국한 후 유족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하자 조 마리아는 연해주를 거쳐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망명한 뒤 애국지사들의 편의를 돌봐주면서 의연한 어머니의 삶을 살았다. 조 마리아는 1927년 7월 15일에 상해에서 향년 66세로 별세했다. 장례는 프랑스 조계 천주교당에서 상해 교민장으로 치렀고 프랑스 조계 안남인 묘지에 안장했는데, 이후 묘지 터가 개발되고 건물들이 들어서서 무덤을 찾을 수 없게 됐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지난 2월 14일은 재판장이 안중근에게 사형을 선고한 날이다. 반면 젊은이들은 이날을 연인들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밸런타인데이로 인식한다. 상술이 만연한 시대에 안중근 의사에게 항소하지 말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을 전한 조 마리아 여사를 기려 2월 14일을‘대한 어머니의 날’로 정하자는 제안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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