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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수사의 한 분야인 필적감정과

역사를 뒤바꾼 문서위조 사건들

[인터넷 대한뉴스] 글 오종호 기자  | 사진 안지형 기자

1991년 6월 24일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 유서대필 혐의로 수배받아오던 강기훈 (오른쪽에서 두번째) 씨가 명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한 후 자진해서 조사를 받기 위해 어머니와 대책위 관계자들과 함께 성당을 나서고 있다

 

 

90년 대 초 운동권의 분신, 투신 등 자살이 이어지던 정국 속에서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며 핵심이슈로 떠올랐던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당시 최종심에서 유죄판결이 났으나, 강기훈 씨의 재심청구로 현재에도 법원의 판결이 마무리되지 않았다.

 

위조사건 밝히는 데 과학적 필적감정 중요


고주홍 중앙인영필적감정원장은 유서와 강기훈 씨의 필적감정 결과 빈도수가 높은 9개의 자음 획수와의 대조에서 사망한 김기설 씨와는 6개, 강기훈 씨와는 2개 항목에서 일치의 결과가 나왔다고 밝혔다. 지난 11월 7일부터 이틀간 서울대학교 글로벌공학교육센터에서 열린 ‘제1회 한국포렌식연합회 공동학술대회’에서는 과학수사가 사법적 판단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에 관한 내용이 다양하게 다뤄졌다.


특히 ‘미지의 세계 속으로’라는 섹션에서 진행된 고 원장의 ‘필적감정의 과학적 접근’에서 발표된 내용은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비롯해 역사적인 문서조작 사건에 대한 흥미진진한 사례를 통해 필적감정이 사건의 판결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발표에서 고 원장은 필적감정의 방법으로 △기하학적 접근 △통계적 접근 △패턴인식기술과 같은 공학기술의 이용 등이 있으며, 이러한 방법 등을 통해 필순의 일관성(항상성),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특징(희소성), 필기 대상이나 상황, 필기구의 종류 등에 따라 나타나는 차이(변화성)를 파악해 분석한 결과로 감정을 한다고 구체적인 감정과정을 설명했다.


고 원장은 지난해 대법원이 재심청구를 받아들여 공판이 진행되고 있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대해서는 “재심에서는 유서와 강기훈 씨의 필적을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유서와 사망자의 평소 필적으로 제시된 일기와 낙서장이 사망자의 필적이 맞는지 여부를 가리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재심판결 이전에 견해를 밝히는 것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이에 고 원장의 설명 등을 바탕으로 역사적인 문서위조 사건들을 정리해 본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1991년 4월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이에 대한 항의로 여러 명의 대학생이 분신 등의 방법으로 자살하는 ‘분신정국’이 계속됐고, 5월 8일에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가 서강대학교 건물옥상에서 유서를 남기고 분신해 숨졌다.


그런데 서울지검이 7월 12일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 씨가 유서를 대필했다며 자살방조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이를 계기로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이들이 유서까지 대신 써주며 분신을 종용했다”고 몰아갔다.


강기훈 씨는 유서대필을 부인했으나 서울형사지법은 유죄를 인정해 징역 3년을 선고했고, 이에 강 씨가 항소했으나 서울고법은 기각했다. 대법원도 1992년 7월 강 씨의 상고를 기각해 징역 3년이 확정됐다. 강 씨는 형기를 다 채우고 1994년 8월 17일 만기 출소했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던 이 사건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2007년 11월 국가에 재심을 권고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진실화해위는 “분신 자살한 김기설 씨의 필적이 담긴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노트’와 ‘낙서장’을 새로 발견해, 검찰과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사건 자료·증거물과 함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및 7개 사설 감정기관에 필적 감정을 의뢰했다.

 

모든 기관에서 유서의 필적은 유서대필 혐의를 받았던 강기훈 씨의 필적과 상이하고 김기설 씨 본인의 필적이라는 감정 결과를 통보받았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또 1991년 수사 당시 국과수가 필적감정을 문서감정인 한 명에게만 맡기고도 여러 명이 공동으로 감정한 것처럼 법정에서 허위로 증언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2009년 서울고법은 진실화해위의 조사 내용을 근거로 한 강 씨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고 검찰은 “새로 발견된 전대협 노트 등은 김 씨 사후에 강기훈 씨 등이 조작했을 것”이라며 146쪽의 항고이유서를 대법원에 제출해 재심 결정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2012년 10월 19일 3년간의 ‘검토’ 끝에 대법원이 재심을 개시했으며,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상태다. 강기훈 씨는 올해 5월 간암 수술을 받기도 했는데, 재심 판결보다 당시 검찰과 재판부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드레퓌스 사건


1895년 1월 5일 유대인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앵발리드 기념관(옛 파리의 상이군인병원)의 마당에서 불명예스럽게 군직을 박탈당한 후에 기아나 ‘악마의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독일 스파이라는 혐의로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은 수십 년간 프랑스의 정치를 혼란에 빠뜨렸다.

 

스파이 혐의가 있는 문제의 편지와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체포된 드레퓌스는 극구 피의 사실을 부인했고, 그의 가족들 역시 재심을 청구하여 이 사건은 전국적인 물의를 일으킬 정도로 확대되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그래서 이 사건은 반유대 감정과 관련이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사건 처리과정에서 드레퓌스 지지자들은 인권과 평화론, 민주주의, 세속주의를 옹호하는 공화파였고, 반대자들은 군대와 성직자, 민족주의, 반유대주의적인 왕당파였기 때문에 프랑스는 이 사건을 놓고 좌파와 우파로 분열되었다. 프랑스는 1789년의 대혁명을 계승하려는 좌파와 그것을 거부하려는 우파로 나뉘었다.


1898년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공개장에서 드레퓌스를 옹호한 소설가 에밀 졸라가 좌파 가운데 가장 유명했다. 졸라는 진짜 범인인 에스테라지(Esterhazy) 소령을 보호하려는 군 장성들의 책략과 군부를 중심으로 한 여러 가지 부정부패를 철저하게 공격했다. 마침내 드레퓌스는 10년간의 우여곡절 끝에 승리하여 사면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공화파와 사회주의 세력은 공동전선을 형성하게 되는 등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빌헬름 황제의 회담 내용 위조


독일(프러시아) 통일운동이 무르익어 가던 1870년 프러시아 황제 빌헬름 1세는 프랑스 대사와의 회담 진행내용을 비스마르크에게 통보했다. 독일 통일을 위해 프랑스와의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전쟁의 구실을 찾던 비스마르크는 황제에게 받은 회담내용문서를 살짝 변조했다. 마치 빌헬름 황제가 프랑스 대사에게 대단히 모욕적인 태도를  취한 것처럼 내용을 만든 뒤 이를 언론에 공개했다. 이를 사실로 여긴 프랑스는 자존심이 상해 7월 19일 먼저 선전포고를 하고 보불(프로이센-프랑스)전쟁을 일으켰으나,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며, 결국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프러시아는 전쟁의 승리로 독일 통일을 완수하게 된다.


콘스탄틴 황제의 허위문서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이 점차 강성해지기 시작하던 8세기, 로마교회가 자칫 비잔틴제국에 종속될지 모른다고 우려한 교황 스테판 2세는 754년 ‘콘스탄틴 황제의 기증’이라는 문서를 공개했다. 이 문서에는 324년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를 떠나 비잔티움으로 가기 전에 모든 제국과 교회의 통치권을 당시의 교황 실베스터 1세에게 이양했으나 실베스터 1세가 이를 사양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결국, 이 문서로 인해 후세의 로마교황은 언제라도 제국의 황제를 겸할 수 있고, 비잔틴제국의 정통성도 로마교황청에서 나온다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 더구나 로마교황의 권위를 받쳐주는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15세기에 쿠사와 발라라는 두 학자가 이 문서에 쓰인 언어가 4세기의 라틴어와 다르다는 점을 밝혀 위조된 것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됐다.


시온장로 의정서


1903년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한 신문은 유대교 최고 지도자들이 은밀히 모여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했다며 그 내용이 담긴 ‘시온장로들의 의정서’라는 극비문서를 공개했다. 그 내용은 가정파괴, 종교기피, 사치와 쾌락 조장, 세균주사, 국가 간 증오심 유발, 세계 경제파탄 등을 통해 모든 부를 유대인에게 집중시킨다는 황당한 내용이었으나, 신문은 이들이 언제 어디서 모였는지, 문서의 입수 경위는 어떠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일절 밝히지 않았다.


이 사건은 러시아 경찰이 ‘진보주의자들이 유대인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국제적인 반유대 정서에 편승해 ‘국제 유대인’이라는 책으로 러시아, 독일 등에서 발간되어 수십만 부가 팔렸다. 미국 의회는 1964년에 의정서 내용이 ‘조잡하고 사악한 난센스’라고 규정했다. 


본 기사의 전문은 대한뉴스 2013년 12월호(www.daehannews.kr)에 자세히 나와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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