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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백 창원문화원장에게 듣는 세종대왕의 제갈공명 최윤덕 장상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특정인물을 선정하여 그의 사상과 활동 그리고 역사적 배경을 밝혀내는 인물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매우 필요하고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창원문화원 박동백 원장이 ‘세종대왕의 제갈공명 최윤덕 장상’ 이란 제목으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날 기념회에 참석해 박 원장으로부터 최윤덕 장상의 이야기를 듣고 대한민국 효충의 상징인 인물을 더욱 가까이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가 최윤덕 장상에 대해서 되새겨야 하는 이유가 우리나라 동북아를 둘러싼 정세 속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인지, 한 국가의 주권의 개념으로 봐야 하는 것인지 등에 대해 박동백 원장으로부터 들어봤다.

 

   
박동백 창원문화원장

 

한 명의 인물이나 역사적인 사건을 다룰 때 그 시의에 따라 부각이 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국민들이 최윤덕 장상에 대해 뒤돌아봐야 할 것이 있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평화시대 이면에 남북대치 등 불안 속에 살고 있다. 조선조 제4대 세종시대를 문명시대라고 하면서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만주의 여진족은 틈만 있으면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일본의 왜구는 하삼도(충청, 경상, 전라도)를 노략질하여 내륙 깊숙이 침략을 일삼고 있었다. 최윤덕 장상은 방비책의 일환으로 축성을 주장하였으나 당시의 문신들은 이를 반대하였다. 오늘의 세계 각국들은 한국을 화약고인 양 보고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 같아 이 시대에 최 장상과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이 많아 유비무환의 교훈을 갖게 해 주었으면 한다.

 

최윤덕 장상은 흔히 우리 역사에서 4군과 대마도 정벌로 출장입상인 인물인 만큼 장상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데, 활약한 대표적인 일화나 역사적 기록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다면?

 

압록강에 근거지를 둔 올량합이 두만강을 넘어 조선의 부락을 침략하고 나오자 경성 병마사로 부임한 최윤덕이 말을 달려 화살하나로 추장의 모자에 꽂았다. 충분히 그를 죽일 수도 있었는데 이로 인해 추장 올량합은 군사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넘어갔다. 이와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만주에 세력을 갖고 있었던 동맹가첩목아는 부하들에게 “그 장수가 있는 동안은 두만강을 넘어가지 말라”고 하였다. 세종은 평안도절제사 최윤덕에게 1만5천의 군사를 주어 한반도 침략을 일삼는 추장 이만주 일당을 정벌하여 4군 개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로써 후일 압록강과 두만강이 경계인 우리나라 북방 경계선은 창원출신의 최윤덕장군의 기초 작업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후 이수광의 지봉유설 등 많은 기록에 대마도 정벌은 최윤덕의 공으로 기록하고 있다. 세종은 동자갑선을 만들어 우의정 최윤덕에게 자문을 구하자 속도는 다소 느려도 전함으로써 높이 평가되어 동자갑선과 왕자갑선의 설계도를 전국포구에 보내어 참고하게 하였다. 갑(甲)이란 뚜껑 덮을 갑자이기에 전함에 뚜껑을 덮었다는 말은 곧 귀선(거북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철갑선하면 곧 거북선을 말한다.

 

2015년 을미년 최윤덕 장상을 통해 우리가 돌아봐야하는 충과 효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세종16년 2월 5일우의정 최윤덕 장상은 변방의 수비에 문제가 없음을 인식하고 세종에게 사직소를 올리면서 “무신은 음양의 조화에 관여할 수 없으며, 국토의 안의를 위해 전력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하였더니 세종은 “한나라의 제갈량도 진(鎭)의 책임을 맡은 바도 있었다. 경은 외진의 방어를 경륜하여 마땅히 나의 부족한 점을 보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우리나라의 무장으로써 이와 같은 인물이 또 있겠는가? 세종은 최 장상을 무관이었지만 그를 항상“나의 제갈공명”이라 하였다. 최 장상은 6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성장하여 무인으로써 서울과 변방에 있으면서 벼슬이 승차할 때 마다 어머니 묘소를 참배하고 상석 문인석등에 다녀갔음을 기록하였다. 서울에서 창원까지 11일이 소요된다. 어머니 묘소 관리를 위해 북면 내곡리 사실마을(정승골)에 집을 지어 (속칭 정승집) 오늘날까지도 그의 효심(孝心)을 전하고 있다.

   
최윤덕 장상의 묘소

 

우리나라는 역사적 사료나 인물의 유적지 등 역사적 가치에 비해 관리가 소홀하거나 훼손의 사각지대에 있는데, 최윤덕 장상의 경우에도 비슷하다고 판단이 되는데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신다면

 

최윤덕 장상의 생가지, 정승집터 그리고 그의 묘소 등이 남아 있으나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최 장상이 서출이라고 잘못 알려졌다. 일제 강점기까지 향교에서 춘추향사를 지내주어 일반인들은 최 장상이 창원출신임을 알지 못했고, 그의 묘소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창원도호부에서 북 5리 지점이라 하였다. 실록에 나라에서 장사 지내주었다 하였으니 당시 국장을 하였기에 방형묘로 석물 등이 대단하였다고 추리되는데 만부석은 그대로 있는데 그 외의 석물은 훼손되고 파괴된 흔적이 뚜렷하다. 전언에 의하면 대마도외인들이 임난때 세종원년 대마도 정벌 때의 원한을 갚고자 묘소를 훼손했다고 한다. 필자가 경남문화재위원으로 있을 때 경상남도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하였고, 생가지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동백 원장과 안승일 기자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취재후기

최윤덕 장상의 묘소는 창원부사가 대대적으로 손질 하였으나 사당조차도 없이 도시개발로 푸대접을 받고 있다. 본지 취재기자가 창원시 북면 대산리 사리실 마을 뒷산에 자리 잡은 경상남도 기념물 제121호인 최 장상의 묘소를 둘러본바 마을에서 묘소가 있는 100m지점 부터는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길이여서 여차하면 차가 빠질 지경 이였다. 또, 석물등이 훼손 방치되어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에 우리 정부의 대우가 아쉽고 이에 대한 예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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