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것을 경계해온 유엔 반기문 사무총장이 사실상 대권 출마를 강력히 시사했다. 방 한 전부터 반 총장의 이번 행보에 관심이 쏠린 가운데 방한 첫날인 5월 25일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간 담회에서 유엔 사무총장 임기 종료 후 역할론을 거론하며 대선 도전 가능성을 강력히 밝힌 것이다. 비록 다음 날 곧바로 과잉, 확대 해석을 경계해 달라는 말로 한발 물러섰지만, 김종필 전 총리와 고건 전 총리 등 각계 정 치원로와 만나고 자문을 구했다. 하필 박근혜 대통령의 해외 순방일정과 맞물리면서 작심한 듯 광폭행보를 보 여 미리 청와대와 사전교감을 짐작케 했다. 둘의 일정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 것은 사전에 미리 계획되지 않는 한 어렵기 때문이다. 반 총장의 이번 방문과 대권 출마시사가 ‘신의 한 수’로 불릴 정도로 절묘했다. 총선 참패로 잠룡들이 전멸한 데다 야권에 끌려다니기만 하던 새누리당이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고, 여권의 차기 대권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본인을 확실히 각인시키기 때문이다. 애초 반 총장은 연말까지 검증을 피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였지만, 이미 정치권은 대선정국으로 접어들었다. 국내정치와 거리를 둔 반 총장이 내년 초 귀 국해서 공식 출마선언을 할지, 온전한 새누리당의 대선후보로 안착할지, 고건 전 총리의 전철을 밟지 않을지, 새 국면으로 접어든 정치권을 들여다봤다.
글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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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폭행보로 대선 출마 알린 반 총장
반 총장의 이번 5박 6일 방한은 처음부터 작심한 걸 로 봐도 무방하다. 첫 일정인 관훈클럽 간담회에서 “내 년 1월 1일이면 한국사람이 된다. 임기 마친 뒤 역할 고민하고 결심할 것”이라며, “정치 지도자들은 국가 통 합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고 밝혔다. 또, “북 측과 계속 대화해왔다. 계속 고위 간에 대화채널 열고 있다. 남북간 대화채널 유지해온 것은 제가 유일한 게 아닌가 생각하고 기회가 되면 계속 노력하겠다고 생각 한다.”고 말해 사실상 퇴임 후 원로로서의 역할이 아 닌 대권주자로서의 뜻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즉, 임기 중 방북 가능성과 함께 북한과의 대화 필요성을 적극 적으로 제기함으로써 대선 주자로서의 차별화에 나선 것이다. 특히, 이날 올해 72세 나이를 문제 삼자, “1년 에 하루도 아파서 결근하거나 감기에 걸려 쉰 적이 없 다.”고 즉각 반박하고 나섰다. 이날 반 총장의 발언이 특히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건 방한 후 첫 공식일정이 자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간담회였다는 점이 다. 현직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 는 자리였지만, 미리 준비한 듯 거침이 없었다. 다음 날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주포럼 참석 국내 외 인사들과의 오찬에서 자신의 발언이 ‘본뜻보다 앞 서 나가고 있다.’며 곤혹스럽다는 기색을 표하며 한발 물러서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28일에는 충청대망론의 중심에 있는 김종필 전 총재를 방문해 비밀대화를 나눴고, 노 신영 전 총리, 이현재 전 총리, 고건 전 총리, 신경식 헌정회장,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 등을 만났다. 특히, 고건 전 총리는 노무현 정부 때 대권행보에 나섰다가 초반 높은 지지를 받으며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했으 나, 노무현 대통령과의 대립으로 중도 사퇴한 경험이 있다. 반 총장의 행보에는 정치원로뿐만 있는 게 아니 었다. 황교안 국무총리, 홍용표 통일부장관, 원희룡 제 주지사, 나경원 전 외교통일위원장, 김관용 경북지사,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 김광림 정책위의장 등 여 권 핵심인사들과 잇달아 만나는 한편, 자신을 유엔 사 무총장으로 만들어준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에는 방문 하지 않는 등 야권 인사들과의 만남에는 선을 그었다. 사실상 앞으로 여당의 대권 후보로 나서겠다는 암시로 풀이된다. 29일부터는 일산과 안동을 거쳐 경주로 광 폭행보를 이어갔다. 특히, TK지역 방문으로 TK-충청 연합론이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안동 하회마을 류성룡 의 고택인 충효당을 방문해 나무 중의 제왕인 주목을 기념 식수했다. 반 총장은 마지막 날 행사에서 아프리 카를 순방중인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공개적인 발언을 해 이번 방문이 사전에 청와대와 긴밀한 교감을 가진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여당, 기사회생이냐 조기 레임덕이냐
이번 반 총장의 방한으로 정치권의 모든 이슈가 반 총장에게 몰렸다. 연일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더민주 문재인 전 대표와 국민의당 안철수 공동대표는 뒷전으 로 밀려나기 시작했고, 여론조사에서도 반 총장이 여 야 전체 1위를 기록할 만큼 반 총장의 방한 효과가 컸 다. 반 총장의 등장에 중도성향 지지층이 겹치는 안철 수 대표와 빛바랜 충청대망론의 안희정 충남도지사, 정치권 새 판 짜기에 나섰던 손학규 상임고문이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전 대표는 반 총장과 지지층이 겹치지도 않아 별 영향을 받지 않지 만, 반 총장의 조기등판을 내심 반기는 분위기다. 대선 출마를 선언한 순간부터 검증에 시달려야 하고, 1년 6 개월 동안 계속 높은 지지율을 유지한다는 보장도 없 기 때문이다. 여권 역시 희비가 엇갈리긴 하지만 대체 로 반기는 분위기다. 반 총장을 대체할 만한 카드가 없 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내 잠룡들이 떨어져 나간 마당에 조기등판론이 제기되며 대선에 나설 채비를 하 던 남경필 도지사와 원희룡 도지사는 반 총장의 등장 으로 힘이 빠진 형국이다. 반면, 김무성 전 대표와 오 세훈 전 서울시장,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는 내년 대선 경선에 주자로 뛰어들 가능성이 커지면서 정치권의 관 심을 받고 있다. 반 총장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서는 경선 흥행효과를 극대화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정치력을 회복할 수도 있고, 당내 기반이 없는 반 총장 을 꺾고 대선 후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반 총장이 전면에 나선다는 것은 박근혜 정부의 조기 레임덕을 불러온다 는 것을 알면서도 반 총장 카드를 내세웠느냐 하는 점 이다. 일단 ‘기름장어’로 알려질 만큼 신중한 반 총장 이 청와대와 사전교감 없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것이 다. 특히, 당내 기반이 전혀 없는 반 총장의 대권 출마 발언은 정권 재창출을 향한 청와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방한일정이 사전에 기 획된 것이라 해도 반 총장은 유력한 대권주자 중 한 명 이다. 그런데 이번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하 면서 여소야대 구도하에서 국정을 운영하자면 레임덕 은 불가피하게 조기에 지펴질 수밖에 없다. 특히 20대 국회 개원을 앞둔 시점에서 새누리당이 전열을 정비하 지 못하고 우왕좌왕한 채 야당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 는 상황에서 확실한 차기 대선주자 한 명 없다는 것은 정말 암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반 총장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미래 권력을 이어가는 것이 낫고, 야당에게 넘어가 있는 주도권을 다시 여당이 선 점하는 한편, 대통령의 강력한 시그널로 당을 일사불 란하게 정비함으로써 20대 국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 면서 국정과제를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 다 당내 지지 기반이 있는 다른 후보들과 달리, 계파 갈등 내지는 반기를 들 가능성이 가장 작은 것도 한 가 지 이유일 수 있다. 실제로, 반 총장의 등장으로 친박 과 비박간의 갈등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새누리당 의 지지율이 다시 1위로 올라서는 등 이번 방한효과가 상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대로 낙관할 수만 있는 상황도 아니다. 이 번 행보가 꽃가마가 될지 꽃상여가 될지 아무도 모르 기 때문이다. 반 총장이 박 대통령의 차기 대권주자로 낙점이 됐다 하더라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먼저, 퇴 임 후 공직을 제한하는 유엔 결의안에 대한 공방을 포 함해 혹독한 검증이 반 총장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문 제에 대해 결단을 해야 할 대통령의 자리에 국내 정치 의 경험이 없는 반 총장이 적합한지부터 외신들의 반 총장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 대북정책기조, 도덕성 문 제까지 하나도 검증된 것이 없으므로 대선후보로서의 검증이 더 혹독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 최초의 유엔 사 무총장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대중적인 지지를 받 은 것도 사실이지만, 유엔 사무총장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평가가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것도 걸림돌로 작 용할 수 있다. 더욱이 지금까지 꽃가마를 타고 온 여정 과는 확실히 다를 수밖에 없고, 고건 전 총리나 이회창 전 총리처럼 경선 및 본선 중 검증되지 않은 이슈로 정 치적인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 총장이 퇴임 후 공식 출마선언을 한다고 해도 당 내 사정이 만만치 않다. 박 대통령과의 교감으로 당내 경선은 비교적 쉽게 통과할 수 있다고 해도 본선에서 의 경쟁력은 장담할 수 없다. 사실상 친박이 옹립하는 대선 후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권력이 나타나면 계 파 갈등은 없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 정치권에서 흘 러나오고 있지만, 친노 세력의 등장 이후 계파정치가 청산된 적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새누리당의 상황은 이마저도 어둡게 하고 있다. 혁신비대위원회에 김희옥 위원장이 선출됐지만, “당명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공허한 소리로 들리기 때문이다. 전국 위원회는 사실상 주류인 친박이 주도하고 비주류인 비 박이 용인한 대회로, 혁신비대위 역시 전당대회 준비 위원회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선, 새누리당 을 탈당한 유승민, 윤상현 의원의 복당문제가 최대 뇌 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금의 순수집단지도 체제로는 최고위원회에서의 계파갈등을 해소하지 못 한다는 점이다. 즉, 막강한 대표권한을 가지고 있는 당 대표가 없기에 끊임없이 계파갈등이 재연되고, 탈당파 의원들의 복당문제 역시 계파간의 복잡한 계산에 이러 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당내 질서 가 바로 잡히지 않은 가운데 반 총장이 공식 출마선언 을 하게 되면 사실상 친박 후보가 되는 셈이다. 70:50 으로 친박이 당을 장악하고 있다 해도 계속된 계파갈 등이 재연된다면 친박 대표로서 반 총장은 당내 경선 조차 힘겨운 싸움이 될 수 있고, 당의 혼란이 가중되면 대권주자로서 당내 갈등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후 보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뜻밖에 차분한 야당, 속내는
반 총장의 대권 도전에 대해 야당은 차분하면서도 이미 반 총장에 대한 검증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20대 총선이 야권의 승리로 끝나면서 야권은 3자 필패 론이나 반 총장의 대권 승리 가능성에 개의치 않는 분 위기다. 야권은 대선 후보들이 충분한 데다 모두 선거 를 통해 충분한 검증을 받았지만, 반 총장은 아직 검증 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충분히 경쟁력을 갖춘 것으 로 보고 있다. 이미 대선 후보로 출마할 가능성이 컸 기 때문에 놀라울 정치적 이슈도 아니고, 친박이 옹립 하는 대선 후보로 평가 절하하는 분위기다. 그러면서 도 유엔 사무총장의 부적절한 대권 행보와 자질 부족 등을 거론하며 본격적인 검증에 들어간 가운데 문재인 전 대표와 박원순 서울시장이 반 총장의 텃밭인 충북 을 방문하며, 반 총장의 선언에 맞불을 놓았다. 현실정 치에 한 번도 서본 적 없는 반 총장이 언론에 본격적으 로 노출되면 지금까지 가려져 있던 거품이 빠질 것으 로 보고, 야권 잠룡후보들의 대권 행보가 앞으로 더욱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