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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한국 대중음악의 대부 조동산 시인, 작곡가와 발행인의 인연



“가난했기에 부지런할 수밖에 없었고 외로웠기에 정직할 수밖에 없었다”는 김원모 대한뉴스 발행인. 그런 그의 지난 세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중하고 귀한 인연에 대한 실화 30화를 본지에 게재하고 주변의 요청으로 책 <가난과 외로움이 나의 재산이었다> 가 2014년 초판 인쇄 후 3쇄를 발행하는 등 독자들, 특히 군부대 장교와 장병들이 독후감을 보내는 등 남다른 관심을 받았습니다.


제1편을 본 독자들이 아직 인연이 많다고 들었는데, 다음 이야기는 언제 시작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또한, 주변 지인들은 왜! 나는 그 대상이 되지 않았는지 등 아쉬움 섞인 소감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많이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독자들이 보고 가르침을 주시면 스승의 말처럼 따를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인연 실화 제2편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은행에 이자는 원금이 없으면 나오지 않지만, 상대에게 무엇을 바라지 않고 무엇을 줄까 하는 마음으로 인연을 맺는다면 그 정성에 대한 이자는 인생의 노을이 다할 때까지 나온다고 체험 섞인 말을 합니다. 실화의 전개는 인연을 찾아가 이야기를 듣고 그 내용을 토대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받침 하나라도 틀린다면 모든 인생이 거짓일 것입니다.



조동산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조동산 시인 겸 작곡가다. 조동산 시인을 그의 사무실 앞에서 만나 식사 먼저 하자고 했으나, 먹는 게 뭐 그리 중요하냐며 이야기부터 하자고 했다. 그래서 인터뷰는 차 안에서 시작됐다. 점심시간을 훌쩍 넘긴 식사자리, 차 한 잔 마시며 이어진 이야기는 저녁 식사를 끝내고 다시 그의 사무실로 돌아가는 밤 9시가 지나서까지 계속됐다.


기자는 조동산 시인이 그 시간에 작품을 쓰고 관계자들을 만나면 돈이 얼마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동산 시인은 말했다. “발행인과 20여년이 후쩍 넘도록 지냈어도 몇 달에 한 번 몇 년에 한 번 만나면 반갑기는 해도 몇 시간씩 앉아서 인생과 가요를 말하고 진의를 알 시간이 없었어요.”라고.


조동산 시인 소개
1944년 부산 송도 출생. ‘한국대중음반’ 하면 떠오르는 오아시스레코드 부산 출장소장으로 근무하면서 가요계와 인연을 맺었다. 지금은 한국대중음악 역사의 산증인이자 고급스러운 가사로 대중가요의 위상을 한 단계 높인 전문 예술인이며, 스타 작사가 겸 작곡가, 시인으로 유명하다. 송대관의 ‘차표 한 장’, ‘고향이 남쪽이랬지’, 남진의 ‘내 영혼의 히로인’, 김상배의 ‘몇 미터 앞에다 두고’, 이태호의 ‘미스고’, 문희옥 ‘성은 김이요’, 한혜진의 ‘너는 내 남자’ 등 히트된 노래가 수백곡에 이를 정도로 셀 수 없이 많다.


특히, 우리나라 톱가수 나훈아를 무명가수에서 스타로 만든 장본인이다. 나훈아는 “조동산 시인과 인연이 되어 스타가 되기까지 선생님의 노고를 잊을 수가 없다”고 종종 말한다고 한다. 몇 천만 곡 가운데 신곡 하나가 탄생하고, 그것을 대중이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되면 행운이다. 가요계에서는 조동산 시인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발행인과는 언제 어떻게 만나셨나요?


20여년전, M레코드사(‘천년을 빌려준다면’의 박진석, ‘무효’의 신웅, ‘립스틱 짙게 바르고’의 임주리, 메들리 여왕 김난영 등 많은 가수가 소속돼 있던 곳) 사장이 김원모 발행인과 함께 곤지암 집으로 왔어요. 그땐 대한뉴스 국장이었죠.



첫인상이 어땠는지 기억나세요?


보통 첫인사는 악수를 하지 않습니까. 굉장히 예의가 발랐습니다. 윗사람 대하는 법, 화법, 앉아 있는 자세 등 뭐랄까 수평·수직관계가 정확하더군요. 짧은 시간이지만, 인간적으로 사람을 흡입하는 멋이 느껴졌습니다.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갑습니다. 만나서 행복했습니다.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라며 겸손해했습니다.



인간적인 멋과 정을 느끼셨나 봅니다. 그런데 아들 주례를 부탁하셨다고요? 선생님 주변에는 유명한 분들도 많았을 텐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발행인은 농담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아 네,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작곡가 박춘석, 작사가 겸 가수 반야월, 3사 방송국 중역들, 그 외 교수, 박사 등 주례 설 만한 유명한 분들이 많았지요. 그런데 살면서 겪어보니 가장 진실하고 절실한 주례는 무엇일까 생각하게 됐어요. 결혼하는 첫날 아들 부부에게 덕담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딱 보면 된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머리 터지고 상처 나면 된장을 발랐거든요. 난 창작을 하는 사람이라 감각적으로 ‘딱 김원모’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사람 냄새 나는 주례였습니다.



발행인은 아들 결혼식 주례를 선 후 뒤풀이에서 노래를 불렀다는데 평을 해주신다면?


노래할 때 표정, 눈빛, 제스처 삼박자가 잘 갖춰져야 스타덤에 오르는 것입니다. 같은 시도 누가 낭독하느냐에 따라 감동이 다르듯 말입니다. 난 상대의 목소리를 들으면 한눈에 그 사람의 18번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김원모 발행인은 성장과정이 어땠는지 영혼 세계가 그런 것인지 웃으며 노래해도 눈물이 글썽이며 슬프고 외로워 보였습니다.



발행인이 ‘키스 같은 여자’로 데뷔해 MBC, 교통방송 등 방송에 출연할 때 선생님께서 동행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송대관, 문희옥, 남진 등 유명한 가수들, 기자들이 부탁해도 언론사나 방송에 안 나가기로 유명하신데, 발행인에겐 왜 남다르셨는지요?


신인 때 신인을 쫓아다니는 법은 없지요. 인간관계 때문에 갔지요. 발행인이 언론인으로서 언론매체에서는 아는 사람도 많고, 어떤지 몰라도 가요계 생리는 잘 모르죠. 가요계에서 의식주를 해결해보지 않은 사람은 가요계, 방송계 인간관계에 대해서 잘 알 수가 없지요. 저 아우가 마음의 상처 입고 다치지 않을까 보호심리도 있었고, 동행하면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설명도 해주고 곁에 있어 주고 싶었습니다. TV프로그램 출연도 시키려고 많이 애썼지요. 어떤 사람이 자기가 인터뷰하는데 나보고 같이 있어 달라고 하면 ‘노! ’라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발행인이 ‘형님! 토크 프로에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하면 난 그의 인품과 인격을 아니까 무조건 ‘예스’입니다.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지요.



인품이란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지는 품격이나 됨됨이인데요. 조금 더 이야기해주세요.


발행인은 내가 소개한 남봉룡 선생과도 ‘형님, 아우’하며 잘 지냈지요. 얼마 전 남 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그 뒷바라지를 다 했더군요. 보통은 죽으면 끝 아닙니까. 난 다혈질이고 직설적이라 어떤 일에 있어서 그게 아닌데 하는 심정이 들면 다시는 상종을 안 하거든. 지난날 발행인과 약간 묘한 시기도 있었지만, 가끔 전화해서 “형님~별일 없어요?” 안부를 묻고 끝까지 하잖아요. 나이가 적고 많고를 떠나 품에 안는 처세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흡입력이 있어요. 그게 남자 세계에서는 의리거든. ‘키스 같은 여자’가 시에 가까운 그런 가사가 드물어요. 몇 년 전 어떤 작곡가가 가사가 너무 아까우니까 멜로디를 새로 쓰게 해 달라고 해서 한 번 준 적은 있지만, 발행인에게 의리 지킨다고 누구나 1년이 지나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지만 주지 않았어요. 지금도 히트시킬 요소는 충분합니다.



선생님께서 보실 때 발행인의 노래실력은 어느 정도이고 창법은 어떤가요?


작품 선택과 가사를 보면 향토적이고 멜로디도 흘러간 노래의 리듬에 익숙해 있으며, 그걸 근본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아요. 자기 기호가 확실해. 아~ 처음 만날 때도 지금처럼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음반자켓에 모자쓰고 있는 7집 ‘불후의 명곡’ 그 음반이 몇 년 동안 내 머리맡에 항상 있습니다. 집에서건 사무실에서건 잠이 오지 않을 때는 김원모 메들리만 듣고 잡니다. 일류 가수 나훈아처럼 어마어마하게 잘 불러서도 아니고, 테크닉이 좋아서도 아니고, 사람을 아주 그냥 편안하게, 감상하게 합니다. 여자가수 중엔 김난영이가 메들리에선 가히 최고로 편하게 들을 수 있도록 노래를 잘하는 것처럼 말이지.



발행인이 가수의 길을 걸었다면 라고 짐작해보신다면? 그리고 지금도 늦지는 않았는지요?


취미에 가까운 노래가 아니고 처음부터 죽으나 사나 본격적으로 프로로 가수 할거라고 했으면 ‘키스 같은 여자’ 편곡도 하고 판도가 바뀌었지요. ‘차표 한 장’ 노래도 편곡만 일곱 번 한 겁니다. 프로는 돈이 크든 작든 무대에 서고, 행사에 나가고, 라이브도 하고,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데뷔 때 방송하려고 하는 의지는 있었지만, 내 생각에 노래를 좋아하고 사랑할 뿐이지, 프로가 되겠다고 표현한 일은 없었습니다. 지금도 회사에 가보면 자기 사무실에 자그마하게 오디오시설과 무대를 갖춰놓고 있는데, 얼마나 노래가 좋으면 그러겠습니까. 좌우간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야.


일본의 경우 60~70세에 스타가 된 사람도 많은데 발행인이 만약 프로 가수로 전향해 음이 처지지 않고 목소리가 가지 않는다면 가능성은 80%로 봅니다. ‘천년을 빌려준다면’의 박진석은 50대 중반에 그 노래 한 곡으로 히트했고, ‘미스 고’의 이태호는 8년 무명가수로 있다가 한 번에 히트했잖아요.


발행인이 젊은 시절 꿈이 가수였는데 88세가 되어서라도 해보겠다면 이제는 많이 다를 겁니다. 형, 동생으로 좋다~좋다~ 하고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이태호의 중성 목소리를 통소리로 나오게 만드는 데 6개월 걸렸어요. 성격이 싫으면 싫다고 말하고 나쁘면 나쁘다고 하는데, 작품세계도 마찬가지거든요. 발행인이 못 견딜 정도로 화법(발음) 등 훈련을 시킬 겁니다.



발행인이 선생님 창작에 도움이 될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라는데 알고 계셨나요?


네, ‘빨간 립스틱’ 그 노래가 그렇습니다. 어느 날 녹음을 마치고 발행인과 이리저리 소재거리를 찾아다니고 있었어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저녁시간인데, 누군가를 기다리는 한 여인을 보며 주제를 찾고 타이틀을 바로 붙였지요.



발행인이 본 조동산 선생님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가요계에서는 조동산 선생님의 작품을 받으면 60~70% 성공을 거둔다고 소문이 자자했어요. 그런데 그분을 만나러 간다고 하니 어떤 모습일까 마음자리는 어떨까 많이 궁금했지요. M 레코드사 사장으로부터 소개를 받아 인사를 하고 제 나름대로 상대를 보게 되었습니다. 잘생긴 얼굴에 고지식함이 엿보였고 사람 대하는 눈빛이 날카로우면서 카리스마가 있어 보였지만, 푸근함도 느껴졌습니다.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나를 주례로 세운 것입니다. ‘조동산’ 이름 석 자에 서로가 차 한잔하고 어울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주변의 훌륭하신 분, 큰 직위에 권력 있는 분들도 많은데, 너무나 보잘것없는 나를 주례로 세우다니… 개인적으로 영광이지만, 우리나라 기라성 같은 대형가수가 손님이고, 글 좀 쓴다는 시인 작사가 작곡가, 가수 등 많은 사람이 자리를 메운 그곳에서 주례를 선다는 것은 40대였던 그당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주례를 맡긴 것에 대한 답례는 정성과 최선이라 여기며 모시 한복을 처음 지어서 입고 나갔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가수 김부자 누이가 “동생 너무 떤다” 하며 청심환 2알을 줘서 먹었는데, 약에 취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저는 주례사도 그렇고 연설이나 강연할 때도 원고준비 없이 그때 상황에 따라 보고 느낀 것, 주변과 미래를 생각하며 말하거든요.



조동산 시인은 어떤 분이신가요? “형님은 남달랐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작품 하는 분들은 대접받는 입장이지, 대접하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형님은 달랐습니다. 주변에 어려운 지인이 있으면 한 시간이 넘는 거리라도 그곳에 찾아가서 현금으로 팔아주고, 가수로서 노래가 뜨지 못해 기가 빠진 후배나 지인들에겐 밥과 술을 사주며 용기를 주고, 집에 불러 늘 식구처럼 생활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유명가수도 함께 어울려 소박한 상차림의 정을 나누는 모습에 ‘저렇게 할 수도 있구나’ 했습니다. 형수님이 고생 많았지요. 때로는 많은 가수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면 그 많은 사람의 먹거리를 손수 하시며, 힘들어 짜증 낼만도 한데 형수께서는 늘 큰 누님 같은 미소로 지혜롭게 넘기는 모습이 참 존경스러웠습니다.



때와 장소에 맞게 말을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본 그분은 천재였다.


사람들은 담소할 때 서로의 직업에 따라 이야기의 소재거리가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작사가들은 필요한 낱말을 추구할 것이고, 기자들은 특종거리, 기업인들은 경제상황이나 기업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할 것이다. 서로가 상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덕담을 했을 때 그 시간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자리나 상관없이, 모임의 취지와 전혀 다른, 내가 하고 싶은 소리만 한다면 듣는 사람도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누구를 만나서 덕담을 들었으면 좋겠는데 하며 만남을 그리워할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형님을 만날 때는 발음도 정확하지 않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거나 엉뚱한 짓을 할 때가 있다. 내가 보는 조동산 형님은 천재다. 절대 상대의 말을 놓치지 않고 몸동작과 눈빛을 보며 가사와 곡을 만드는 뛰어난 감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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