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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눈빛·표현·몸동작에서 시어를 찾아내는 천재 작사·작곡가 조동산 선생


트로트계에 회자되는 말이 있다. 히트곡이 한 곡이냐, 두 곡이냐, 세 곡이냐에 따라 가수의 인생이 결정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집을 지을 때 가장 기본이 되는 뼈대가 중요하듯, 히트곡 탄생은 작사라는 뼈대에 작곡의 혼, 가수의 창법 그리고 시대의 환경과 문화가 일치 되어야 한다. 나훈아, 남진, 송대관, 이태호, 문희옥, 한혜진 등 많은 가수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고 한국대중음악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창작의 대가가 바로 조동산 작사가다. 그는 인터뷰 안 하기로 유명하다. 잘 아는 지인과 만나는 자리에 동석하는 귀한 기회를 얻어 인터뷰하는 행운을 얻었다.



인터뷰 왜 안 하세요?
“인위적으로 포장하고 그러는 게 나는 싫더라고요. 괴팍하고 직설적이라 싫으면 싫다, 나쁘면 나쁘다고 말합
다”라며 심리적으로 부담 안 되는 인터뷰가 진짜 인터뷰라고 말했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선 예외인 경우도 있었다. 교통방송국 심사위원으로 나가지 않으면 해당 프로가 펑크 날 수밖에 없어서 심사위원을 맡았다. 한번은 이태호의 ‘미스 고’ 송대관의 ‘차표 한 장’이 히트하고 문희옥의 ‘성은 김이요’가 막 히트하기 시작할 때 기자들이 찾아와도 전화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작품실로 새벽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집에서 온 다급한 전화인 줄 알고 받았더니 동아일보 기자였다. 그 기자는 “저도 자존심이 있는데 왜 인터뷰 안 하십니까?”라며 약간 열 받아 했고 그 말에 조동산 선생이 대꾸했다. “내가 잠결에 전화를 받아서 혀가 굳어서 말이 잘 안 되니까 조금 후에 다시 통화합시다.”라고 했다. “진짜 진짜 전화 꼭 받아야 합니다.”라고 신신당부해서 전화 인터뷰한 일이 있다.





가수의 색깔 스타일 노래와 잘 맞는지 판단하는 직감적 능력 탁월


기자회견을 끝으로 팬들 곁을 떠난 나훈아.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노래 참 맛있게 부른다며 어서 빨리 무대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다린다. 톱가수 나훈아를 무명가수에서 스타로 만든 장본인이 조동산 작사가다. 미국에서 10년만에 돌아온 송대관은 ‘차표 한 장’ 들고 신인으로 데뷔하기보다 더 어렵다는 재기에 성공했고 각 방송사 가수왕을 휩쓸며 전성기를 누렸다. 이태호는 중성의 목소리를 통소리로 바꾸기까지 육개월가량 혹독한 훈련 끝에 ‘미스 고’를 불렀고 그 노래 한 곡으로 8년 무명을 벗어나 스타가 됐다. 김상배 역시 ‘몇미터 앞에 두고’ 라는 곡으로 16년 무명을 벗어났다.


메들리 가수였던 문희옥은 ‘성은 김이요’로 대중에게 기억됐다. 남진의 ‘내 영혼의 히로인’, 한혜진의 ‘너는 내 남자’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이 히트됐다. 그 외 박진석이 어느 날 집으로 찾아와 작품을 달라고 간곡히 졸랐다. ‘천 년을 빌려준다면’ 곡은 원래 다른 신인가수를 주려고 했던 것인데 작품을 받기로 한 그 사람에게 물었더니 흔쾌히 알았다고 하여 박진석이 부르게 됐다. 그동안 쭉 노래해 왔지만 50세가 넘어 실력 있는 가수로 인정을 받았다.



송대관 가수의 작품 부탁에 작품 경쟁하자고 하셨다는데 무슨 뜻이죠?


“수천개 넥타이가 걸려 있어도 사람마다 컬러, 디자인 선택이 다 다를 수밖에 없어요. 똑같은 것 안 가져갑니다. 작품도 수천곡 가운데 타이틀로 올라가는 것은 딱 한 곡이죠. 작품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가수도 자기 색깔과 선호도가 다 다르거든요.”라며 얼마 전 송대관씨 초대로 덕적도에 낚시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사색하며 낚시를 즐깁니다. 한참 낚시 끝에 송대관이 형님! 작품 하나 주시죠 라고 하더군요.” 10년 넘도록 작품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조동산 선생은 흔쾌히 주겠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 작품도 받아보고 내 작품과 경쟁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러자 송대관이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은 자기 것만 써달라고 하는데 아따 참 이상한 형이고 이상한 사람이요.”라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조동산 선생의 남다른 창작 철학을 들어보자. 수백곡 작품 가운데 타이틀은 한 곡인데 그렇다고 맨 밑에 깔린 작품이 결코 나빠서는 아니다. 실력은 있지만 아직 알리지 못한 작곡가, 가수가 조동산 선생에게 조언을 요청하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는 배려심이 남다르다. 한편, 자신은 히트곡이 조금 있으니 다른 사람도 가요계에서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무심코 내뱉은 말에서 작품 경쟁의 속뜻이 깊게 느껴진다.





대가의 감수성, 창작습관은 이론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 있다


그의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눈물, 사랑, 이별, 고향, 그리움 등은 물론이고 때로는 독특하고 새로운 예외적인 표현들을 보면 무언가 이론을 뛰어넘는 남다른 감수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차표 한 장’의 원제는 ‘따로따로’였다. 그런데 인생을 달리는 기차에 빗대 절대 고독을 표현했다. 사람이 태어나 살다 세상을 떠나는 것이 어쩌면 예정된 시간표대로 운행되는 기차와 같다는 의미가 함축돼있다.


‘미스 고’의 ‘계곡처럼 깊이 팬 그리움만 남긴 너’라는 기막힌 가사도 세월 속에 어머니 주름처럼 그 사랑도 얼마나 가슴에 아렸으면 그런 표현이 나왔을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창작이다. 그런데 신체 일부의 표현이라는 그릇된 시각으로 방송 불가판정을 받기도 했다. 가사 하나 때문에 그런 시절도 있었다. ‘성은 김이요’ 곡명이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삼김시대 대선과 맞물려 주목받기도 했다.


그는 창작에 들어가면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은 채 몰입하는 성격이다. 때로는 환경에 따라 10분만에 작품이 탄생하기도 하지만, 테크닉 위주로 가사를 쓰지는 않는다. 뻔한 사랑, 우정 이런 것과 연관된 표현일지라도 한두 달 걸려 가슴과 혼으로 쓰기 때문에 얼굴빛이 납색으로 변하는 등 환자처럼 된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단어가 있으면 주변에 있는 달력을 찢어서라도 메모를 한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노래 제목을 찾아내기도 한다. 인터뷰 도중 메모한 것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불룩한 주머니를 뒤져서 이것저것 꺼내는 작은 종이에서 그만의 창작습관을 엿볼수 있었다.


여담 한마디. 트로트는 3분 노래 속에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은 3분 예술이라고 했다. 송대관의 ‘당신은 내여자’ 곡은 조동산 선생이 부인을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한다. 가사를 음미해보면 ‘백년이 지나 또 태어나도 당신은 내 여자, 바람같이 떠돌던 내 영혼 그 가슴에 끌어안고, 죽어도 내가 사랑할 당신은 내 여자요’ 등 이 같은 표현 속에서 평소 ‘사랑한다’는 말에 투박했을 부산 사나이가 노래 속에서는 진정으로 부인을 위하는 측은지심과 섬세한 황혼의 로맨스가 농축돼 있어 공감된다.





조동산, 훗날 대중음악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1944년 부산 송도 출생. 한때 배우가 될 생각으로 지원한 곳에서 카메라 테스트에 합격했다. 아담한 키에 반듯한 얼굴 날카로운 눈빛 무엇보다 카메라 앵글에 잡힌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배우 했어도 됐겠다 싶다. 운명의 화살은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한국대중음반’ 하면 떠오르는 오아시스레코드 부산 출장소장으로 근무하면서 가요계와 인연을 맺었다. 그의 부모님이 일대에서 꽤 알아주는 소리꾼이었다는데 그 영향도 있었다. 어려서부터 글짓기 대회에 나가면 크고 작은 상을 휩쓸었다니 다방면으로 타고난 천부적 재질이 참 많다.


엔카가 조곤조곤 속삭이는 듯하다면 쿵짝 쿵짝 하는 트로트는 활기찬 남성적 기질이 엿보이고 소리가 쭉쭉 뻗어 나가며 맛있게 들린다고 표현한다. 화가가 느낌을 색채적인 묘사를 통해 감각적으로 표현하듯 조동산 선생은 맛있는 트로트에 우아하고 세련된 낭만풍 시적 표현을 입혀 자신만의 창작 스타일이 뚜렷하다. 트로트 장르 분야에 그가 남긴 커다란 족적이 아직 진행형이지만, 또 어떤 노래가 나와 신인을 스타로 만들고 그 노래가 대중들에게 어떤 여운을 줄지 그리고 훗날 대중음악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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