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큰 나무는 세상의 역사다. 조선의 세조임금이 벼슬을 내린 정이품송 소나무, 세종임금이 당상관이란 품계를 내린 용문사의 은행나무,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나무 등 오랜 나무들은 때로는 정신적인 가르침을 준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오대산 월정사 회주 연암현해 대종사가 회고록 ‘오대산 노송’을 펴냈다. 대종사는 스님에게 부여되는 최고 법계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타인들에게 그늘이나 좋은 쉼터를 주지 못했다며 마치 구부러진 오대산의 병든 노송(老松)과 같아서 ‘오대산 노송’이다. 그 노송에 깃든 정신과 원력은 오늘날 한국불교를 이어가는 뿌리다. 들려주는 주옥같은 한마디가 독자의 마음을 적셔줄 것이다.
《법화경》 내 상불경보살 정신에 주목
현해 큰스님의 회고록 출간은 작년의 일로 불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읽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제야 큰스님을 찾아 특별 인터뷰를 청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자서전은 자기 자신을 주제로 삼지만, 회고록은 저자를 비롯해 시대와 역사가 담겨 있어 사회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다. 미처 책을 보지 못한 불자와 일반인에게 한 성직자가 토로하는 솔직한 삶의 모습, 치열한 수행 생활에서 얻은 체험담과 정진을 소개하여 인생의 좋은 길잡이로 삼기 위해서다. 이 책을 한번 잡으면 놓기가 싫을 정도다.
책장을 넘기자 서문에 앞서 이런 문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나는 《법화경》을 읽을 때마다 상불경보살에 주목하곤 한다. 상불경보살은 만나는 사람마다 합장한 뒤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당신은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항상 존경합니다. 법화경은 주요한 3대 사상 ‘개권현실’, ‘구원실성’, ‘보살행’이 있다. 상불경보살은 보살행에 나오는 약왕보살, 묘음보살, 관세음보살과 함께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을 위해 사바세계에 나투어 자비행을 펼치는 보살이다.
현해 큰스님은 종단의 제1기 종비생으로 1964년 동국대 불교학교 입학, 1968년 졸업했다. 1973년에는 일본 고마자와대학 초청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0년 간 유학하며 법화경과 천태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평생을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이하 법화경) 연구와 강의에 몰두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대승불교의 최고봉이라 일컫는 《화엄경》은 대중이 읽고 이해하기에 다소 난해하다. 그런데 법화경은 대중적이다.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해도 대중과 호흡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다. 특히 ‘절묘한 방편과 비유의 극치’라는 특색과 함께 부처님의 자비가 교묘하게 시현되고 있어 읽는 사람에게 종교적 희열을 느끼게 해준다고 설명했다.
1996년 <법화경요품강의>를 펴냈으며, 2006년에는 산스크리트본, 한문번역본, 영문번역본, 한글번역본 등 4개 국어 대조본 <묘법연화경>을 3권으로 완간했다. 불교계에서는 자료 조사 3년, 번역만 7년에 걸쳐 이룩한 4개 국어 대조본 묘법연화경의 출간을 획기적인 작업으로 평가하고 있다.
큰스님은 올해로 승납 63년, 세납 87세다. 오대산 월정사 서울포교원 법종사에서 2004년부터 주석하며 대중들과 만나고 있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여전히 구도 정진하며 지혜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종교를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온다. 어느 날 서울대 출신 철학자이며 기독교 목사인 한 사람이 큰 스님 뵙기를 청했다. ‘오대산 노송’을 읽고 감동받았다는 것이다.
인연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법연(法然)의 이치
그 목사는 큰스님의 가계사가 모든 형제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속가 조카 중 4명이 목사라는 점이 반가웠을까. 아니면 기독교 가문에서 어떻게 현대 한국불교의 살아 있는 큰 스승이 탄생했는지 종교적 물음이 더 컸을까. 불가의 인연법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법연(法然)의 이치를 잠시 소개한다. 먼저 탄생과 유년 시절 이야기다.
큰스님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경남 울산의 한 작은 성터가 있는 병영에서 5남 4녀 9남매 중 여덟 번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너는 남방에서 온 아이야”라고 말하곤 했는데 일찍이 남다른 태몽을 꿨다. 꿈에서 부리나케 뛰어서 포구로 신랑 마중을 나갔더니, 파란 두루마기를 입은 청의동자가 배에서 내려 집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상서로운 징조로 장래의 운명을 예견하는 좋은 꿈이었지만, 그의 유년 시절은 병치레가 잦았던 탓에 성격은 짜증을 많이 내는 아이였다. 하루는 숨을 쉬지 않자 죽은 줄 알고 부모님은 이튿날 아침 땅에 묻으려고 옷까지 갈아입혔다. 그런데 목이 타는 갈증에 머리맡의 물그릇을 아주 달게 마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약을 달인 물이었다. 이것을 두고 “삶과 죽음은 호흡 한 번에 달렸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찌감치 체험했다고 털어놨다. 원효 대사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셨는데 그 사실을 다음날에 알고서 헛구역질을 하다가 모든 게 마음에 달렸다는 ‘일체유심조’의 이치를 깨닫게 된 것과 같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때도 “내가 부처님이니 나한테 절해라”라는 일화도 있다. 외할머니의 영향으로 어머니와 형제들은 모두 기독교 신자였는데 이런 상황은 법연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데 출가하기까지 과정을 듣다 보니 그 또한 출가를 위한 수행의 첫걸음이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종교란 무엇인가? 기독교 교리에 회의를 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하지만, 교회에 다니지는 않았다. 그런데 다른 공부는 다 자신 있는데 영어 실력이 조금 부족해서 찾아낸 방편이 이랬다. 영어 성서를 정독하면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된다는 소리를 듣고, 교회 다니는 누나에게 영어 성서를 사달라고 부탁했다. 시작은 영어 공부였는데 4대 복음서를 읽다 보니 기독교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가 부산에서 교회를 다니던 당시는 6·25전쟁 직후여서 미국에서 보내주는 원조 물품인 옥수수가루, 설탕가루, 우유가루, 옷가지 등이 많았다. 그 물품들은 굶주리는 이웃과 나눠야 마땅한데 교회 장로와 집사들이 값나는 것들을 내다 파는 것이 아닌가. 목적은 돈을 마련해서 교회를 확장하고 발전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청년회 회장을 맡고 있던 큰스님은 젊은 혈기에 불의를 보고 분개했다. 학생들과 합심하여 교회 관계자들과 맞섰으나 젊은이가 세상 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기독교 교리에 회의가 들기 시작한 시점이다. 어느 목사에게 불평이 가득한 심정을 밝혔더니 “오대산 월정사에 가서 도인을 만나 보라”고 권했다. 도인은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학승 탄허 스님이었다. 그가 대학생 30여 명을 모아놓고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도인을 찾아 떠날 것을 결심하고 월정사로 향했다.
근기를 증명해주는 일화 한토막 소개
월정사는 1,400년 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으로 얻은 석존 사리와 대장경 일부를 가지고 돌아와서 창건한 문수도량이다. 큰스님은 학교 공부나 교회 성경 공부와는 사뭇 다른 공부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 부풀었다. 때는 1958년 10월 28일, 가을이지만 그 무렵 오대산은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전나무숲을 지나 월정사에 들어섰다. 경내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소된 상황인지라 남은 것이라곤 허름한 함석집과 작은 기와 한 채가 전부였다.
“도인 스님께서 공부를 가르친다고 해서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당시 총무스님인 혜진 스님이 ‘도인’에 대해서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그쳐 물었다. “절에서 살려면 하루에 나무를 일곱 짐씩 지어다 날라야 돼 할 수 있겠어?”, “그 나무로 방마다 불을 지펴야 해, 할 수 있겠어?”, 부엌에 물을 길어다 줘야 해, 할 수 있겠어?” 모든 물음에 “네”라고 대답했다. 짧은 문답을 통해 근기부터 시험을 거치는 게 불가의 전통이다.
고달픈 행자의 하루가 시작됐다. 행자는 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고 가장 늦게 자는 사람이다. 도인스님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군소리 없이 주어진 일들을 부지런히 해나갔다. 주변에서는 “저 사람은 부지런하고 말이 없고 헌신하는 모습이 그냥 행자를 할 사람이 아니다. 뭘 해도 될 사람이다. 보살의 화현이다”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어느 날 경덕 스님이 사찰을 떠나기 전 “계를 받겠느냐”라는 말에 현해 행자는 “계가 뭡니까?”라고 할 정도로 중노릇도 출가라는 것도 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절에 있고 싶었을 뿐이었다.
출가하기로 마음먹다
1959년 12월경 월정사에 신임 주지가 왔다. 만화희찬 스님이다. 현해 행자에게는 절에서 밥을 짓는 공양주 소임이 맡겨졌다. 쌀 한 톨도 버려서는 안 될 정도로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힘든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내가 시끄러워 알아보니 조실스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스님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도인 탄허 스님이었다. 오대산 수도원이 폐쇄된 상황이어서 더 이상 문답을 나눌 길이 없었다. 다시 마음이 정처를 잡지 못해 흔들렸다.
희찬 스님이 “계를 받으라”라는 말에 “계는 왜 받아야 합니까?”라고 응수했고, 《천수경》을 건네도 “이걸 왜 읽어야 합니까?”라며 따지기 일쑤였다. 찰나의 깨달음은 우연히 일어났다. 함께 방을 쓰는 처사가 읊조리는 경전의 한 구절 “삼일수심천재보 三日修心千載寶 백년탐물일조진 百年貪物一朝塵” 이 귓가를 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뜻은 삼일 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되고, 백 년 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의 티끌과 같이 먼지가 된다는 내용이다. 《초발심자경문》 중 《발심수행장》의 한 구절이다. 그 후 천수경을 외우며 연필로 목탁 치는 연습도 시작했다. 입산 후 육체적, 정신적 고행 끝에 출가했다. 만화희찬 스님을 은사로, 탄허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만인의 사표가 된 큰 어른 스승들의 가르침
그동안 수행하는 데 어떤 스승의 가르침이 제일 감명 깊었는지 질문했다. 탄허 대종사를 8일간 시봉하며 병이 난 일을 먼저 꺼냈다. 동국대학교 대학선원장을 역임한 노스님은 당시 60대였는데 밤 12시에 일어나 새벽 예불과 함께 정진을 이어가는 규칙적인 수행 생활을 하고 있었다. 현해 스님은 바로 옆방에서 지냈으므로 노스님이 주무시면 따라 자고 일어나고 하다 보니 30대 젊은 나이에도 노스님의 정진하는 높은 수준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 역시 중생은 중생이고 도인은 도인이구나!”를 깨달았다.
동화사 비로암 한주 범룡 스님은 “적지 않은 나이인데도 울력에 직접 동참하고, 일을 하지 않을 때는 조용히 참선을 하고, 조금도 자기 자랑이 없었다”라며 그런 태도에서 수행자의 참모습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다.
벽안 스님의 휘호 苦海寶筏(고해보벌)은 평생 삶의 지침으로 삼아
인격적으로 감동을 준 사람은 현해 큰스님이 3대 중앙종회 의원으로 활동했을 때 인연 된 중앙종회 의장 벽안 스님이다. 무릇 단체는 어떤 일을 진행하고 마무리를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의를 하고 의결제도 가운데 만장일치가 가장 이상적이다. 그런데 중앙종회(사회 국회에 해당)는 종단의 입법기구임에도 회의 진행은 중구난방이었다. 현해 큰스님은 교회 다니던 시절 청년회장으로서 회의를 주관했기에 절차에 대해 잘 알았다. 30대의 초선의원 현해 스님은 70대의 종단 수장 벽안 스님에게 본의 아니게 맞서 회의 진행 때마다 이의를 제기하였다. 벽안 스님은 “현해 스님, 종단을 바르게 하려는 모습이 보기에 좋아요,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반듯하게 뻗은 길로만 간다고 정법이 실천되는 것은 아닙니다”라며 현해 큰스님을 인격적으로 존중했다. 현해큰스님은 “어른은 저렇게 관대한 마음을 지녀야 하는구나”라는 깨우침을 얻었다.
평생 삶의 지침으로 삼게 된 苦海寶筏(고해보벌)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일반인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깨우침이 있다.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보배로운 배’라는 의미의 ‘고해보벌’ 휘호는 벽안 스님이 일본 유학길에 오른 현해 스님을 김포공항까지 친히 나와 배웅하며 건넨 격려의 메시지다. 이때 벽안 스님은 특별한 당부의 말을 남겼다. “행정을 잘해서는 종단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현해 스님이 부처님 가르침을 열심히 공부해서 종단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세요”라고 말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조각배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은 아직 무슨 가르침을 얻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벽안스님은 상하를 대할 때 언제나 예(禮)로서 맞이했는데 배울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 유학길에 오른 현해 큰스님은 30대 후반의 학생, 벽안 스님은 동국대 이사장이며 70대였다. 상식적으로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을 먼 길까지 나와 배웅하지는 않는다. 그 외 상하를 대할 때 언제나 예를 갖췄다. 아무리 어린 스님이라고 해도 함부로 ‘야, 자, 저’라고 하지 않고 존중했다.
은사스님 만화희찬 대종사께 배운 점 세가지
만화스님은 평소 신도들에겐 한없이 자비롭지만, 제자들에겐 무섭고 까다롭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혹여 상좌가 은사스님께 항의라도 할라치면 손에 집히는 대로 회초리로 때려 맞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현해 스님은 맞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철없던 어린 시절 속가에서 어머니와 있었던 일화에서 해답을 들었다. 다른 형제들은 잘못했다고 싹싹 빌든지 멀리 도망을 가던지 하여 어머니께 매를 맞지 않았다. 현해 스님은 잘못을 빌지 않아 매를 맞았다. 그때의 경험이 되살아났다. 무조건 “스님 잘못했습니다. 참회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은사스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곤 며칠 뒤 은사스님의 화가 누그러진 뒤에 장삼가사를 갖춰 입고 삼배를 올린 뒤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다. 은사스님이 본인의 스승인 탄허스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가에서 있었던 일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어른은 삼일에 모과 세 덩이를 못 헤아려도 어른은 어른이다”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기억났다. 은사스님은 탄허스님 같은 어른들 덕분에 우리가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했다. 다소 긴 앞의 내용의 요점은 어른을 잘 섬기라는 뜻이다. 다음으로 배울 점은 나는 없고 절과 종단만 생각하는 철저한 공심정신이다. 마지막 덕목은 끼니를 거르며 아무리 힘들고 고단해도 법당을 짓기 위해 매진하는 불사정신이다. 만화스님은 20년 동안 월정사 주지를 역임하며 한국전쟁으로 무너진 월정사를 다시 일으켜 중창 불사했다.
월정사 성보박물관 불사
민족의 문화유산 후대에 이을 기틀 마련
현해 큰스님은 1992년부터 2004년 1월까지 12년 동안 월정사 주지 소임을 맡았다. 재임 기간 중 원칙을 지키며 약 120억 원의 불사를 진행했다. 극락전과 부도전 정비, 상수도 시설을 갖췄다. 평창군 진부면에 부설 유치원 설립, 서울 우이동 북한산 자락에 서울 포교당 ‘법종사’를 건립했다. 무엇보다 뜻깊은 불사는 문수보살의 성지에 건립된 월정사 성보박물관이다. 만화스님이 1974년에 월정사 경내에 진열장과 보관시설을 갖춘 18평 규모의 '보장각(寶藏閣)' 건립 20년 후, 현해 큰스님이 대를 이어 보장각 건립 불사를 구체화 시켜 탄생한 것이 성보박물관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에 속한 약 60여 개의 전통사찰에 봉안된 성보문화재를 안전하게 보존·연구하고 있다.
건립 원력은 이랬다. 불교문화재는 대대손손 물려줘야 할 민족의 문화유산이다. 사찰 문화재를 빼돌려 사유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스님은 선대 조사들이 남긴 문화재를 보존할 의무가 있다. 말사에는 사본을 두고 주요 문화재 진본들은 박물관에서 보관하는 것이 영구적으로 성보들을 보존하는 길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1995년 건립 추진안 결의, 1996년 신축 기공식, 1999년 10월 개관,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되었다. 개관하기까지는 예산문제, 로비 의혹 및 군수와 갈등 등 난항도 겪었지만, 현해 큰스님은 수행자로서 본사 주지 소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범을 보여 ‘스님 중의 스님’이라며 존경을 받았다.
박물관 소장품에는 문화재 및 유물이 몇천 점에 이른다. 현해 큰스님은 한암 스님의 발우를 보관하게 된 것이 매우 뜻깊다고 회상했다. 한암 스님은 조계종 초대종정을 지냈으며 근대 한국불교를 이끌었다. 인도불교나 중국 선종사를 보면 초조 보리달마에서 육조 혜능까지 법을 전하면서 가사와 발우는 전법의 표시로 전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발우는 전법을 잇는다는 큰 의미가 담긴 것이다. 그 외 박물관에는 조선 시대 세조 임금이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올라가는 계곡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피부병이 나았다는 전설과 함께 그때 입었던 고름이 묻은 어의가 전시된 적이 있다.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된 세조 어의
전설로만 전해져 오던 세조 임금과 문수보살의 친견이 전설이 아닌 실제임이 KBS 보도를 통해 밝혀져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상원사에서 퇴색된 불상을 다시 금칠하는 불상개금불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불상 안에 든 어의를 500년 만에 발굴하게 되었다. 세조는 상원사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에서 혼자 목욕을 하는데 지나가던 한 동승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부탁했다. 세조가 동승에게 “어디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자 동승이 답변했다. “대왕은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지 마십시오”라며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조가 너무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간 곳이 없고 어느새 몸의 종기는 씻은 듯이 나아 있었다. 그 후 세조는 당시 친견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려고 많은 화공을 불렀으나 잘 그리지 못했다. 하루는 노스님이 와서 설명도 듣지 않은 채 자신이 알아서 그리겠다며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렸다. 놀라고 기쁜 마음에 세조가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라는 물음에 “영산회상(석가가 설법하는 곳)에서 왔습니다”고 말한 후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세조는 문수보살을 두 번 친견했다.
취재후기
인사가 만사, 교직원·학생들이 존경의 박수를 보내다
현해 큰스님에 대해 잘 아는 지인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2004년~2006년 동국대 이사장 재임시의 일이다. 학교 옆 필동 부지를 매입해 영상센터를 이전하고 기숙사 부지를 마련해 학교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외 150여 명의 교수 채용이 있었으나 이사장 추천이 한 건도 없었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 교수 채용 결재를 받으러 가면 그때서야 “아! 이 사람 나한테 부탁했던 사람이야”라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런데 교직원 인사와 관련되어 교수와 학생들이 이사장 퇴진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유는 좋은 보직에서 한직으로 밀려난 측에서 인사이동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는 큰스님에게 시위대가 몰려오니 얼른 자리를 피하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시위대를 피하지 않고 대표 지도자들과 한자리에 모여 심중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무릇 고인 물은 썩기 마련, 뒷배경이 좋다고 좋은 자리에 오래 있어서야 되겠느냐, 백이 없는 사람도 능력이 탁월하면 그것에 맞게 보직이 주어져야 한다 등 원칙적인 논리로 설득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다. 인사권자가 공사 구분이 명확하고 뒷거래를 하지 않는 공정성과 민주성에 교직원과 학생들은 존경과 박수를 보냈다. 2006년은 동국대 개교 100주년이었다. 내용 속에서 한 수행자의 불교정신과 교육이념을 엿볼 수 있었다.
한편, 또 다른 지인은 큰스님께 복전함에 담긴 돈의 의미를 배웠다고 한다. 사찰에서는 불-법-승 삼보에게 음식과 여러 가지 물건을 바치는 공양이 있다. 초기 불교가 성립될 당시 부처님을 포함한 모든 출가수행자는 음식과 의복 이부자리 탕약 등을 재가불자들로부터 공양받았다. 이러한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양물 가운데 복전함에 현금을 공양하는 때도 있다. 큰스님은 불전에 돈을 올리는 사람마다 사연이 있을 텐데 그 돈을 자신의 것처럼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돈이 많든 적든 이 사람 저 사람 사정이 담긴 돈의 가치를 무겁게 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큰스님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회고록 ‘오대산 노송’ 책장을 덮는다.
프로필
1958년 월정사에서 만화희찬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0년 탄허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6년 해인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1964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종비생 1기
1973년 일본 고마자와대 박사과정 유학
조계종 제3,7,10대 종회의원, 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 주지 역임, 동국대 이사장 역임, 현 조계종 원로의원, 현 월정사 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