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각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살림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5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안동 고성이씨의 종택이다. 1519년 조선중종 때(조선중기) 이명이 건립했다. 99칸의 기와집 임청각은 안채, 중채, 사랑채, 사당, 행랑채, 별당인 군자정과 정원까지 조성된 조선시대 전형적인 양반가였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 1월 전 재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만주 망명길에 올라 독립운동기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세웠으며, 1925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맡아 독립운동계 분파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망명 직전에는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였다. 또한 선생은 망명 직전 임청각에 있는 사당으로 올라가 신주와 조상 위패를 땅에 묻고 나라가 독립되기 전에는 절대 귀국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도 하였다.
오늘날 임청각은
안동시 법흥동에 위치하며 안동댐 보조댐이 바로 옆에 있고 안동에서 영주로 향하는 중앙선 철로를 끼고 있다. 그래서 임청각의 기와는 눈에 잘 보이는 붉은 기운을 띠고 있다. 이 철도는 일제에 의해 건설되었고 철도가 지나가면서 총 99칸 중 50여 칸을 잃어버렸다. 댐 건설로 인해 유유히 흐르는 물길의 아름다움 또한 찾기가 어렵다. 하지만 고택에 서린 기운은 그곳에 서는 순간 얼마나 나라를 걱정했는지 애국정신이 느껴지는 듯하다.
수모 당했던 역사의 그날
일제는 석주 선생의 생가였던 이곳에 중앙선 철로를 건설했다. 1931년 중·일 전쟁 당시 일본은 물자를 수송하거나 조선의 물자를 일본으로 빼돌리기 위해 중앙선을 건설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임청각에 중앙선이 건설됐다는 것은 당시 항일운동을 활발히 하던 석주 선생과 일제의 악연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제는 철로를 건설하면서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건물을 철거했다. 그러나 이러한 수모를 당한 뒤에도 임청각은 여전히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명가 고택에서 전통을 체험하다
숙박 체험은 명가의 삶 속으로 들어가 우리나라의 소중한 전통을 체험해보는 시간이다. 생활의 지혜를 느낄 수 있는 여러 채의 건물과 조상의 숨결이 살아있는 방에서 잊지 못할 경험을 만들어보자. 조상의 삶 속에서 수백 년 세월에도 바래지 않은 숭고한 역사와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귀한 전통을 체험할 수 있다. 더불어 자연을 담은 집, 한옥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체험도 가능하다.
전통체험은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어 가족과 함께 즐겁게 지낼 수 있다. 그 외 붓글씨를 직접 써보면서 나라사랑 정신을 키우는 붓글씨 쓰기 체험, 해질 무렵 하늘의 푸른빛과 노란 등불, 학생들의 미소가 조화를 이루는 등불 체험 등 다양하다.
그 외 지역 문화 단체인 안동문화지킴이에 따르면 7월 16·17·23·24일과 8월 14·15일 등 총 6일간 매일 오후 7시 30분에 석주 선생 생가인 임청각에서 역사극 '서간도의 바람소리' 공연을 계획했다. 그러나 코로나19 방역지침에 따라 일정이 변경된다고 하니 문의 후 이용해야 한다.
안동에 왔으니 맛있는 음식도 먹어보자
안동 구시장에는 1970년대부터 생닭이나 튀김 통닭을 팔던 통닭골목이 있었다. 그러나 양념치킨이 유행하면서 닭 골목 상인들은 자구책을 찾아야했고, 그때 생긴 퓨전요리가 바로 안동찜닭이다. 갈비찜 양념에 당면과 각종 채소를 넣어 물기가 약간 있게 조리한 양념찜닭이 매콤달콤한 맛과 저렴한 가격, 푸짐한 양으로 전국에 입소문이 나면서 ‘통닭골목’은 ‘찜닭골목’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현재 이곳은 30여 개 점포가 밀집해 주말이면 약 2만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