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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일반

풍수지리(風水地理)란?

오늘날 조선의 궁궐과 4대 문을 살펴보자

 



(대한뉴스 윤병하 기자)= 우리나라의 전통적 지리 사상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전통적 지리 사상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 않고 함께 하는 자연 환경적이다. 풍수지리 사상은 전통적 지리 사상의 일부이며 음양론(陰陽論) 오행설(五 行說)을 기초하는 주역의 논리로 보아야 한다. 또한, 풍수지리 사상은 논리 정연한 학문적 체계로 이해하는 것이고, 산의 배치와 물의 흐름. 지형과 방위. 하늘과 땅의 기운 등을 보는 것을 기준으로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질지(明堂)에 집을 지어 건강하고 행복 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며. 조상을 길지(明堂)에 모셔 후손이 번창하고 가문의 발복을 위해 자손들이 행 하는 의례요 조상숭배 의식 일부이다.

 

오늘날 풍수지리 사상은 삼국시대 때 도입되어 신라 말 승려 도선국사에 의하여 계승발전 되었다. 고려(高 麗)가 개성(開城), 조선(朝鮮)이 한양(漢陽)을 도읍지로 선정한 바와 같이 풍수지리 사상 입장에서는 거의 완벽한 명당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 국가를 창업하는 과정에 있어서 도읍을 선정하는데 풍수지리 사상이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지형적 환경과 전통적인 농경 취락이 입지 형태인 배산임수(背山 臨水) 유형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흔히 풍수지리 하면 묏자리를 잡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음택풍수(陰宅風水,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영향을 준다는 전제하에 묘지를 선정한다.),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오늘날은 어쩌면 양택풍수(陽宅風水)를 더 선호할 것 이다. 명당(明堂)에 전원주택을 짓고 동사택(東舍宅) 서 사택(西舍宅) 방위 관찰하고 가구. 침대. 책상 배치 등 모든 건물의 배산임수(背山臨水)를 관찰하는 것이 바로 생활풍수지리(生活風水地理)일 것이다.

 

오늘날 조선의 궁궐과 4대 문을 살펴보자 1394(太祖 3) 태조는 무악을 살피다 돌아오는 길에 옛 고려의 이궁(離宮)이 있는 남경(南京) 한양의 옛 행궁에 머물면서 그곳을 새로운 수도의 터를 잡고 개경으로 돌아와 신도궁궐도감(新都宮闕都監)이란 임시 기구를 설치하여 궁궐 조성 임무를 권중화. 정도전. 하륜. 심덕부. 김주 등, 풍수지리에 권위가 있는 신하들을 임명하여 궁궐과 宗廟社稷(종묘사직)이 들어설 자리를 정하게 하였다.

 

서울의 외사산(外四山) 북한산(北漢山)() 관악산( 冠岳山)() 아차산(峨嵯山) () 덕양산(德陽山)()을 감싸고 내사산(內四山) 主山인 북쪽의(白岳) 안산인 남쪽의 木覓(남산) 좌청룡(左靑龍) 동쪽의 酡酪(낙산) 우백호(右白虎) 서쪽의 인왕산(仁王山)을 감싸고, 여기에 조선왕조 법궁(法宮)인 경복궁(景福宮)이 창건하게 되었다. 4대 문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기초하여 동(), (), (), () 중앙() 당시 유명 지리 학자들에 의해 궁궐을 드나드는 4대 문과 4소 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동대문(東大門)

흥인지문(興仁之門) 동쪽에 위치하여 낙산 좌청룡(左 靑龍)에 해당하지만 동쪽의 기운이 약해 지() 자를 넣어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부르고 있다. 1396(태조 5) 건립되었으나 중간에 소실되어 지금 있는 문은 1869(고종 6)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 옆면 2. 2층 건물로 앞에서 보면 사다리 꼴 모양의 우진각(隅閣) 지붕이다.

 

서대문(西大門)

 

돈의문(敦義門)은 서쪽에 위치하여 인왕산 우백호 (右白虎)에 해당하고 중국 사신들이 이곳으로 들어와서 의리를 지키고 상호 관계를 돈독히 하라는 뜻에서 돈의문(敦義門)이라 명명하였다. 1396(태조 5 )에 지어 1413년 폐쇄되어 사용치 않고 있다가 세 종 때 성문을 쌓고, 돈의문(敦義門)이라 하였다. 단층 우진각(隅閣) 지붕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그 후 일제강점기인 1915년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남대문(南大門)

 

숭례문(崇禮門)은 남쪽에 위치하여 남주작(南朱雀) 木覓山(남산)에 해당하며 많은 인파와 전차가 드나들던 관문(關門)이고 관악산(火山)의 화기(火氣)가 솟아 현판을 세로로 만들었다고 한다. 1398(태조 7)에 완성되어 1479(성종 10) 대규모 보수 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621220일 국보 제 1호로 지정된 남대문은 2008210일 화재로 2층 문루(門樓)가 소실 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그 후 3년여간 복구 공사하여 201354일 복구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평양의 대동문 개성의 남대문처럼 (팔각지붕(八閣)으로 지었다.

 

북대문(北大門)

 

숙정문(肅靖門)은 북쪽에 위치하여 북현무(北玄武) 북악산에 해당하며 원래는 숙청문(肅淸門)이라고 불렀 다. (), (), (), (), ()에 해당 꾀()자를 써서 숙정문(肅靖門)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후 숙 정문은 풍수지리 음양오행설에 수()에 해당하여 음기(陰氣)가 강해서 수 백 년 동안 문을 닫아 놓았다고 한다. 1413년 풍수지리학자 최양선(崔楊善)은 임금께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중앙(普信閣)

 

음양오행설에 중앙(中央)에 해당하여 음양오행에 중앙()을 보신각(普信閣)이라 명칭 하였다. 조선 한양의 보신각종은 1398(태조 7) 청운교에 걸었다가 임진왜란 때 종루가 소실되고, 그 후 1619(광해군 11 ) 종각을 짓고 다시 종을 걸었다 한다.

그 후, 6.25 전쟁으로 소실되고 1953년에 중건되어 지금의 보신각(普信閣)이다. 매년 종을 치는데 당시 통행금지제도로 저녁 10시경(2)을 인정(人定)이라 하여 28번 종을 치는데 이는 우주의 일월성신께 28 숙에게 밤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고, 새벽 4시경(5)33번 종을 치는데 이는 파루(罷漏)라고 하여 제석천(帝釋天) (불교의 수호신)이 이끄는 하늘의 33 천에게 국태민안 (國泰民安)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위와 같이 풍수지리는 자연과 인간이 서로 상생하는 자연환경이라고 말한다. 풍수지리는 터를 잡는 술법이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터 잡기)와 같은 뜻으로 입지선정(立地選定)이라는 말을 쓴다. 주로 도시 계획을 수립하면 사용하는 용어이다. 입지선정은 입지 주체와 입지장소가 천차만별이다.

 

장풍득수요 배산임수란 말을 많이 듣는다. 지형. 지질, 기후(바람·온도) 용수 등, 자연적 조건과 교통. 시장. 노동력. 용지 상태 원료공급, 전력 등,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맞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풍수지리는 장풍 득수(藏風得水),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한다. 길지 (明堂)에 집을 짓고. 길지(明堂)에 조상을 잘 모시는 것이 어쩌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효도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현대인들에게는 집안에서 침대 자리, 가구 자리, 책상 자리, 전등 자리 등에도 풍수지리의 근본을 주입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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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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