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뉴스 조선영 기자)=민족 국가의옛날 백두산에서 활동하던 백봉 중심의 단군 교단은 봄가을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제사 시기로 언급되는 봄가을은 단군이 승천한 날, 즉 3월 15일인 어천절과 10월 3일로 추정된다. 이 단군교는 우리에게 익숙한 종교로 바뀌게 되는데 바로 나철의 ‘대종교’다.
대종교는 단군민족주의 인식과 민간종교사상을 결합한 교리를 가지고 시작하였는데, 창립 후 교단의 의례를 정하면서부터 ‘개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종교에서는 단군이 강림한 날인 강세일과 개국일이 모두 10월 3일이므로, 둘을 개천절이라는 이름으로 합칭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대종교는 음력을 고수했다.
이후 개천절은 1919년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부 주최의 경축행사를 개최하면서 위상이 높여지고, 1949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서 정식으로 국경일로 자리 잡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는데 사실 임시정부가 개천절에 정부 차원의 기념식을 진행한 것은 개천절이 정식 국경일로 지정되는 과정에서 매우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개천절 .더욱 보급되었고, 특정 종교를 넘어서 민족적인 기념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최남선, 안재홍, 정인보, 조소앙 등은 개천절에 관련한 논설을 자주 발표하며 단군 건국의 역사를 연구하고 개천절이 가지는 민족적 의의를 강조하여 계몽하였는데 특히 고대의 제천행사 풍습이나 민간의 추수감사 풍습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면서 우리 민족의 생활과 문화 탄생일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일제시대 탄압 대상이 되었다.
광복을 맞이한 후의 개천절은 단군의 자손이라는 민족의식의 통일과 결속을 뜻하는 날로 부활해 홍익인간이 교육 이념으로 제정되고 각종 언론을 통해 단기연호가 확산됐다. 또한 광복직후인 1946년의 개천절 기념행사는 임정요인과 해외 독립운동 세력, 대종교단 등이 귀국하며 더욱 성대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개천절은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국회를 통해 ‘국가에 경사로운 날’ 4일 중 하나로 지정됨으로써 정식으로 국경일이 되었는데 날짜는 보편화된 양력으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채택되어 현재의 양력 10월 3일이 개천절로 지정되었다.(자료 출처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공식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