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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방

대한뉴스 특집 인터뷰-인천국제공항 건설 초석 다진 불굴의 주역 장영배 건축본부장

바다 매립 항공 강국의 새 역사 쓴
유일무이한 초대형 공항건설 첫 건축총괄책임자
2001년 3월 29일 개항 세계 최고 수준의 동북아 허브공항


오늘날 인천국제공항은 대한민국의 상징이며 대표 브랜드이다. 2001329일 개항 이래 23주년을 지나며 지난날 성공적인 개항을 향한 건설을 위해 열정과 투지를 불사른 건설인을 재조명해 본다. 화제의 주인공은 장영배 와이비와사람들(YBNP) 대표다.


인터뷰를 요청하다

 

기자는 우연한 기회에 주변 지인으로부터 인천공항 건설의 상징적인 인물이며, 그의 업적과 의지는 개항 23년이 흐른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주인공은 바로 장영배 건축본부장이었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여는 인천공항 건설의 주역을 만나게 되자 기자에게 취재 본능이 살아났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역사가 궁금하다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인천공항의 성공은 많은 참여자들의 땀으로 이루어진 산물로서 자신에 대한 조명은 부담된다며 한사코 사양했다. 설득한 지 한 계절을 넘겨서야 어렵사리 인터뷰에 응했다. 기자단 일행은 지난 329일 그가 머무르고 있는 평창 마랑재를 찾았다. 신기하게도 개항날과 일치했다.

 

작은 거인 장영배 건축본부장은

1952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공대 건축학 학사, 동 대학원 건설관리 석사, 동 대학원 건설경영 박사 수료. 그는 원래 법대를 지망했으나 인생 항로를 변경해 건축에 있어서는 불가능을 모르는 건축 사나이가 되었다. 주변에서는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IMF를 위기가 아닌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오늘날 인천공항이 세계적인 공항으로 우뚝 서게 한 일등공신이다. 43세 젊은 나이에 유일무이한 초대형 공항 건설에 첫 건축본부장을 맡아 임무를 완수한 사람은 세상에 그밖에 없다. 특히 강동석·오명·이정무 세 장관이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책임을 완수하는 성품인지 엿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의 손으로 2~3조에 달하는 금액을 결재해 IMF 때 경제가 돌았다는 사실도 놀랍다. 한진, 금호, 삼성, 대우, 현대 등 건설업체 간 서로 선의의 경쟁을 붙여 품질은 물론 약속 일정을 맞췄다니 여기에서 그의 지도력이 엿보인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더니 현재는 삼육서울병원과 부산병원 그리고 수원 한빛교회 설계와 사업관리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한다. 기회가 되면 후배들을 도와 그동안 축적해 온 노하우와 국내외에 구축해 온 네트워크를 집합하여 해외에 공항 건설기술의 수출에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Q 신공항 건설에 건축과 이에 수반되는 설비, 전기 등을 총괄하는 첫 건축본부장이었습니다. 건축 총 사령관으로 선정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공영토건에서 15년간 이라크·사우디 등 해외건축부 TF팀장 및 현 예금보험공사 서울 사옥과 대전 사옥 건축을 총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강동석 초대 사장(전 건설교통부 장관)께서 건축본부장으로 저를 지목하셨다는 것을 955월에 후배를 통해 전해 듣고 만나 뵈었더니 언제 올 수 있느냐고 하셔서 하던 일이 있기 때문에 연말까지 갈 수 있다고 답을 드렸더니 서둘러 달라 하셨습니다. 집에 와 식구를 어렵게 설득하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 5월에 이어 7월에 또 보자고 하셨습니다. 뵈러 갔더니 이 사람아, 언제 올 거냐고 재촉하시는 겁니다. 현장 사정상 바로는 갈 수가 없어 포기하고 있었는데 추천했던 후배가 오실 준비하고 계시지요?”라는 겁니다. 그래서 후배에게 그 일 끝난 거 아니야라고 하자 후배가 말하기를 강동석 이사장님은 인사에 신중하신 분입니다. 마음에 드시면 끝까지 기다리십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헤어져 잊고 있었는데 9월 중순경 또 보자고 하셔서 찾아뵈었더니 이 사람아, 언제 올 거야. 건축을 총괄할 본부장이 설계부터 봐야 하는 것 아니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설계는 이미 끝나지 않았습니까?”라고 강동석 이사장님께 반문했지요. 강 이사장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아니야 다 새로 해야 돼라는 겁니다. 때마침 현장도 어느 정도 준비가 되어 부담 없이 곧바로 자리를 옮길 수 있어 21세기 첫 공항이 될 인천공항 건설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Q 강동석 이사장님의 재촉으로 199510월 첫 부임하셨습니다. 그날 소감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부임 인사차 찾아뵈었을 때 첫 말씀이 의외로 건축본부장, 이 일이 되기는 되는 일이야?”라고 저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순간 내 보스에게 확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한치의 주저 없이 , 가능합니다!”라며 “1년 이내에 신문의 논조를 바꿔 놓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요라고 대답한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던 대형 공항의 건설을 총괄하는 책임자로서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행주대교,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특히 국책사업인 경부고속도 지연문제 등으로 연일 인천공항 건설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가 넘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Q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특별한 계획이 있었습니까?(조직개편, 건축물 관련 부서는 건축본부로 몰고, 건축물 시공입찰은 일괄해 입찰을 요구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당시 제가 어떻게 그렇게 당돌하게 행동했는지 이해는 안 됩니다만, 어쨌든 곧바로 부서로 가 현안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2가지 중요한 사항에 대한 즉석 서명을 한 기억이 납니다. 설계변경비 증액과 개항일정 준수지침인데 우선 기존 여객터미널 설계비 78억을 235억으로 증액하는 사안입니다. 기안일이 3개월 전인데 아직 시행되고 있지 않은 것 같아 시행 여부를 물었더니 주저주저하는 겁니다. 금액이 너무 크고 오해도 받을까 우려해 결재 자체를 올리지 못한 것 같아서 다시 담당자에게 물었지요. “이 금액 검토는 했는가? 주어야 되는가?”라고 확인하자 그렇다라고 말해 그 자리에서 결재하면서 곧바로 시행하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여객터미널의 시공사 선정을 위한 국제입찰 건입니다. 당시 빈번한 대형건설 사고로 인해 국내 기술능력을 고려해 국제입찰 방침으로 정해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보고받은 1999년 말 준공을 늦춰야겠다고 말하자 안 됩니다. 1999년 말 준공은 대통령의 대국민 약속입니다라고 대답해 그렇다면 내 경험상 외국사 시공 기준으로는 준공일을 맞출 수 없으니 국제입찰방침을 바꿔야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안 됩니다. 국제입찰은 이사장님 철학입니다라는 겁니다. 분위기를 파악하고 다른 방도를 생각했습니다. 국제입찰로 시행하되 단순 시공 등 많은 물동량 투입이 필요한 하드웨어 공종은 국내사가 담당하고, 수하물처리시설 등 공항특수 설비의 엔지니어링 설계 등 소프트웨어는 해외사가 담당하는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조건을 붙였습니다. 국제입찰을 하되 컨소시엄 주간사는 시공에 전적인 책임을 지고, 해외사의 기술 노하우 전수가 용이하도록 국내사가 담당한다는 방침을 세워 시행토록 했습니다. 인천공항의 개항 일정 준수는 물론 해외사로부터 전수받은 특수기술 및 운영 노하우와 우리가 쌓은 시공기술을 바탕으로 향후 해외공항 건설 수출에 실질적인 기반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결단했던 것입니다.

 

Q 공항 건설에 투입된 자재 등 공사 현황이 궁금합니다.

 

공항건설 자료집에 의하면 인천국제공항 1단계 건설은 199211~ 20013월까지 공사기간 84개월, 101개월이 걸렸습니다. 공항부지 총면적은 여의도 면적의 18배에 이르는 1,700만평입니다. 부지를 매립한 토양은 15톤 트럭 1,800만대 분량이 투입되었습니다. 건설장비는 253만대가 투입되었으며 총 건설비용은 56천억원이 소요되었습니다. 건설에 참여한 연인원은 1,400만 명이며 하루 최고 16,800명에 달합니다. 여기까지가 1단계 건설사업 진행 사항입니다.

 

Q 21세기 항공 강국을 건설하는 중책을 맡아 책무가 무거웠을텐데 현장에서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IMF를 맞아 전화위복 교훈으로 삼다)

 

어느 날 강동석 사장님께서 급히 찾기에 갔더니 건축본부장 큰일났다. 우리나라에 IMF가 왔단다. 그럼 여기 공항 건설은 어떻게 되지?”라고 걱정하셨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잘 됐습니다. 전화위복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공항 건설현장은 초대형 규모로 자재와 장비, 인력 등 많은 물동량이 소요되는데 연결 다리가 없어 바지선에 의존해야 했고, 현장 여건도 모래바람으로 작업하기 어려워 인력 조달도 어려웠을 때입니다. 육지에 일이 없어지면 인력 조달이나 엄청난 양의 자재나 장비 조달에 숨통이 트일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Q 중요한 시기에 갈 길은 바쁜데 불청객 IMF는 어떻게 헤쳐 나갔습니까?(현금을 풀어 돌파구를 마련하다)

 

IMF가 인천공항 건설현장에도 찾아 와 우려와 긴장감이 계속되자 무언가 돌파구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방법은 '돈을 풀자!'였습니다. 아주 예민한 문제였지만 기성금 지급방식 개선을 검토하라고 지시하자, 감독자는 물론 당시 감리단장도 찾아와 과잉기성으로 감사원 감사 대상이 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당시 난제를 넘어 21세기 첫 개항을 위한 유일한 해답이라는 확신에 계획을 접지 않고 현장에서 감독하는 직원들부터 설득했습니다. 당시 관행에서 이와 같은 지시에도 무리는 있었지요. 부지가 섬에 위치해 있고 거대 물동량의 반입이 필요했던 현장의 특성상 거의 공장 조립 후 반입하여 장비로 설치하는 공법이었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여 제작 공장에 직접 찾아가 쌓아 놓은 자재부터 확인해 사진 찍어 기성금을 지급하고, 주위에 미리 선 제작해 쌓아놓은 조립품들도 사진 찍어 지급하고, 현장에 반입되면 80%까지 지급하자고 했습니다. 과잉기성 문제는 감사관이 현장 도착 전에 서둘러 시공해 두면 될 것 아닌가, 특히 돈 풀게 되면 현장소장들이 능동적으로 해결해 줄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우리가 시공사 소장님들보다 더 나은 게 뭐가 있냐? 발주자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돈 잘 주는 것 아니냐?”라며 설득하여 실행한 결과 현장에 현금이 넘치도록 돌았습니다. 나아가 우리 경제 곳곳에도 활력을 줌으로써 인천공항이 IMF를 이기고 온 국민들의 하나 된 성원 속에서 21세기 세계 첫 공항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Q 현장에서는 팀원 간의 또는 업체 간의 긴밀한 협업이 중요할텐데 그와 관련된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한진, 금호, 삼성, 대우, 현대 등 서로 경쟁하며 협업하다)

 

개항 일정상 공기가 촉박했던 초대형 단일 건물로 길이가 1.000m가 넘는 여객터미널 건축공사에 구획을 나누어 복수의 건설업체를 참여시키되 공동이행방식이 아닌 단독이행방식을 도입했습니다. 한진, 금호, 삼성, 대우 등 건설업체 간 선의의 경쟁을 붙였더니 품질확보는 물론 서로 잘하려고 하루가 25시간일 정도로 밤늦게까지 골조공사가 올라가고, 약속한 일정에 맞출 수 있었습니다. 또 공사판에서 관행으로 여겨지던 반말과 막말을 못 쓰게 하니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그러나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연구하고 또 연구했습니다. 외국의 공항 건설 사례를 거울삼아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어야 했습니다.

 

Q 해외 우수공항 벤치마킹도 했다고 들었는데 이를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인가요?

 

공사 초창기 국내에는 대형 공항을 건설해 본 기술이 없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국가별·공항별 사례 등을 수집 조사하기 위하여 일본 하네다공항, 파리 샤를드골공항, 싱가포르 창이공항, 영국 런던 히드로공항, 네덜란드 스키폴공항 등 해외 우수공항을 벤치마킹하러 TF팀을 꾸려 돌아다녔습니다. 당시 김포공항은 비행기만 뜨고 내렸지 물건 살 곳도 볼 것도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네다공항에 내렸는데 백화점과 같은 엄청난 규모의 쇼핑 시설과 면세점, 상점이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바로 이거다! 상가와 편의시설이 필요하고 수익시설이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공항을 어떻게 운영하면 될지 노하우를 몸소 깨닫는 순간들이었습니다.

 

Q 처음 계획한 여객터미널 건축 규모를 두 배로 늘렸고 그 결과 10년 계획으로 갚아 나갈 빚을 단기간 내에 다 갚았다고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제1여객터미널 처음 계획은 체크인 카운터, 출국장, 입국장 등 시설을 위한 면적을 약 27m2에서 53m2 규모로 두 배 늘렸습니다. 왜냐하면 총사업비 가운데 정부 국고 지원이 40%였고 나머지 60%는 차관이었습니다. 그 많은 빚을 언제 다 갚을 수 있을까요. 빨리 갚으려면 편의·수익 시설 규모를 늘려야 했습니다. 물론 정부의 승인을 받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주 감독기관과 주변에서는 왜 규모를 확장하느냐?, 설계변경 해주고 얼마 받았느냐? 라는 시선의 따가운 눈총도 보냈고, 국회로 불려 나가 감사 청문회도 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옳은 일에 정직하려고 했고 동료 직원들과 함께 21세기 세계 최고의 공항을 건설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항상 떳떳했기에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인천공항은 이·착륙 관련 항공 수익보다 외국에서 돌아오거나 외국으로 나가면서 공항 내에서 모든 쇼핑 등이 가능한 비항공 수익이 70~80%가량으로 절대적으로 많습니다. 그 결과 단기간에 총사업비 60%에 해당하는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Q 생각해 보니 아찔했던 순간이 있었다고 했는데? (수하물처리시설 입찰 선정 관련)

 

공항시설에서 수하물처리시스템은 여객의 서비스 만족도를 높이는 바로미터입니다. 수하물처리시설 업체 선정을 최저가 입찰 대신에 PQ 20, 기술제안 30, 가격 30점 기준으로 가격 기술 종합평가제를 도입했습니다. 분야별 전문가들로 TF팀을 구성하여 평가한 결과 1위팀의 가격이 1,340억원 대이고, 2위팀이 650억원으로 가격 차가 너무 커 평가팀에서 주관 본부장이었던 저의 의견을 묻더군요. 잠시 고민 후 정해진 기준에 따라 합시다라고 중요한 시스템과 업체를 선정함에 있어 가격과 원칙 사이에서 숨가쁜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만약 그때 기준을 무시하고 반대로 가격에 따라 낮은 금액을 쓴 곳으로 결정했다면 인천공항의 서비스 수준이 세계 최고가 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Q 기억에 남는 고마운 분이 있습니까? (강동석·오명·이정무 장관과 조중훈 회장, 프랑스 빌모트 팀)

 

약관 43세의 젊은 기술자였던 저를 발탁해 이끌어 주시고 끝까지 믿어주셨던 강동석 이사장님께 먼저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길고 크신 혜안 덕분에 국제 경쟁력을 갖춘 오늘의 인천공항 특히 여객터미널이 탄생할 수 있게 해 주신 오명 장관님, 바다 한가운데 공항 건설 발상을 해 주신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님, 대형 공항건설 주무장관이셨던 이정무 장관님은 당시 건설업체 사주라는 소문에 낙하산 업체 걱정 많이 했는데 재임 중 일절 내려보내지 않은 고마우신 분입니다. 그리고 공항시설 색채와 디자인 통합을 도와주신 프랑스 빌모트 팀, 대한민국 관문이며 21세기 첫 공항인 우리 공항을 정말 멋있게 잘 만들어 보자고 다짐했던 임직원 동료들 그리고 우리도 최고의 공항을 갖게 된다는 자부심으로 뜨겁게 성원해 주셨던 협력사 임직원들과 모든 국민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이 땅에 이분들과 더불어 태어났다는 사실이 정말 영광스럽게까지 느껴집니다.

 

Q 또 생각나는 분이 또 있습니까?(은사 이광노 교수)

여의도 국회의사당 기본설계에 참여한 1세대 건축가 이광노 교수(서울대 건축과)님이 은사님이십니다. 한번은 교수님께서 공항 준공 무렵 영종도 현장을 방문하시어 제 어깨를 두드리시며 장군! 고맙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객터미널 국제현상설계 심사위원장으로 당선안을 선정하였는데 원안이 훼손되지 않고 도리어 더 업그레이드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선정한 많은 공공건축물이 준공 때 초청해 가 보면 원안이 거의 변질되어 있어 마음이 아프셨다며 속내를 밝히셨습니다.

 

Q 후배 건설인들에게 당부의 말씀이 있습니까?

어떤 건축물이든 그냥 딱딱한 무기체가 아니라 그 속에서는 많은 활동이 이루어지고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인격과 정서가 담겨 있는 유기체라고 생각합니다. 건설인은 이러한 개념을 잘 정립해서 첫 번째 갖춰야 할 정신이 바로 내 집을 짓는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살 집인데 이왕이면 아름답고 돈도 적게 들고 자재도 좋은 것 고르잖아요. 실제로 개인 건축물이든 공공 건축물이든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집같이 짓는다는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하인드 스토리 정리하여 소개하다

 

유력 일간지와 유력 방송사 항의 방문하다 장 본부장은 유력 일간지 1면 톱기사로 여객터미널 붕괴 우려라는 내용이 보도된다는 것을 홍보실장을 통해 알게 되었다. 취재차 찾아온 기자들을 만나 취재 계획에 대해 듣고 잘못된 정보라며 설명해 줬다. 그런데 기자들끼리 이거 생각보다 적어지겠네라고 했다. 그것은 비판적 기사를 내보내겠다는 은어였다. 부랴부랴 마지막 배를 타고 육지로 나가 언론사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제지당했으나 담당 기자에게 취재 자료를 전해주려고 한다는 기지를 발휘해 무사히 편집국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담당 기자는 장영배 건축본부장을 보더니 깜짝 놀라 기사 원고를 뒤로 숨겼다. 보여주기를 거절해 언성이 높아졌다. “현장에서 생고생하고 있는 기술자들의 자존심을 짓밟고 뭐 하는 거냐? 이런 자극적인 기사를 보면 국민들께서 얼마나 걱정하겠느냐!”라고 했다. 그런 난리를 치고 나서 기사가 올바르게 수정되었다. 한 줄의 글이 날카로운 칼보다 더 무섭게 사람들을 해칠 수도 있다. 장 본부장이 기지를 발휘해 언론 태풍도 비껴간 이야기였다.

 

공항 디자인 자연·인간 친화적인 나무··물을 소재로 삼다 1996년 초경으로 기억된다. 남산 자락에 있는 하야트 호텔에서 프랑스 건축가인 빌모트씨를 소개받아 21세기 첫 공항인 인천공항을 잘 건축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라고 자문을 구했다. 그는 뮌헨공항에서 오는 길인데 메탈릭 소재를 주로 써서 차가운 느낌이라며, 인천공항은 따뜻한 느낌의 나무와 돌과 물의 소재를 과감하게 도입하라고 했다. 빌모트씨가 인천공항에 남긴 솜씨는 많다. 우선 그에게 디자인 통합 지침을 요구했다. 건물만 해도 여객터미널, 교통센터, 그리고 관제탑 등 부대건물이 65개동이 넘고 전면고가도로, 가로등, 싸이니지 등 옥외시설물도 많았다. 그래서 참여한 국내외 설계사도 많았다. 우선 정림, 희림, 원도시, 범 국내 빅4가 미국 덴버공항 설계자와 연합하여 여객터미널 국제현상설계에 당선되어 실시설계에 참여하고 있었고 차점자였던 신한, 아키플랜이 프랑스 폴 앙드류씨와 연합하여 부대건물 설계에 참여하고 있었다. 2단계 이후 계획에 있었던 교통센터도 공항 진입의 안전성 확보를 위한 철도노선의 1단계 건설로 방침이 뒤늦게 변경되어 서둘러 국제현상설계을 통해 삼우건축이 영국의 테리파렐과 연합하여 당선되어 교통센터 설계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토목시설 등에서 각자 설계가 진행되어 색채 및 디자인 통합 지침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급히 잔여 예산 53억에 여객터미널 인테리어, 사이니지, 색채계획, CI 등을 대상으로 국제현상에 붙이되 턱없이 부족한 예산문제와 국내사 기술력 배양을 위해 국내사 주간사인 컨소시엄 조건으로 돌파했다. 결과는 프랑스 빌모트팀과 연합한 국내 오리컴 컨소시엄이 당선되어 세세한 디자인 요소를 통합하고 여객터미널 인테리어, 사이니지, 예술조형물, 색채계획, CI 등을 완성시켜 갔다.

 

여객터미널 건물 내부에 나무와 물을 도입하는데 반발이 심했다 - 공공건물 실내 마감은 석재에 익숙해 있는 입장에서 글킴 등 내구성을 걱정하며 목재 도입에 반대가 심했다.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결국에는 검증을 위해 해외 사례조사를 위한 TF팀을 구성해 해외 탐방 후 간신히 목재 도입이 성사됐다. 인천공항이 국제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도 여객터미널의 편리한 평면구성에 있겠지만 이러한 감각적인 세세한 손길에도 있을 것이다. 여객터미널 인테리어는 평면 외주벽이 곡선인데도 내부 칸막이선을 모두 직교로 풀었다. 통행하는 써큘레이션 바닥은 화강석 돌마감이고 머무는 기능 공간은 나무 소재를 도입해 따뜻한 느낌의 공간 창출을 시도했다. 높은 열주에도 목재 질감을 고집했다. 특히 물이 새는 곳이 한 군데라도 있으면 공든탑이 무너진다고 내부 공간에 물을 도입하는데 반대가 많았다. 그러나 1층 도착층에는 중앙부 밀레니엄 홀에 분수대를 도입하고 여행에 지쳐있는 여객들에게 청량감을 주기 위해 내려오는 에스켈러이터가 폰드에 랜딩하는 기발한 안을 제안했는데, 공간이 여유롭지 않아 평면을 세워 벽천으로 바꿔 설치되어 있다.

 

전면고가도로 건설 관련 에피소드 - 전면고가도로는 토목본부 소관이었다. 그런데 이 토목시설물이 여객터미널과 교통센터 중간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전면고가도로가 현장타설이 아닌 PC구조물로 설치된다고 하였다. 주변과 어울리지 않아 설계변경을 요구했더니 담당 토목본부에서 거절하였다. 그렇다면 건축본부에서 하겠다고 했다. 건축본부 내에서는 건축일도 아니고 토목본부에서도 골치 아파하던 중 앓던 이가 빠졌다고 한다며 모두가 반대했다. 비록 우리에게는 어려운 일이지만 잘하는 업체를 선정하면 된다고 설득했다. 교통센터 설계를 담당한 영국의 테리 파렐씨에게 부탁해 여객터미널 전면에 예술품이 탄생하게 되었다. 만약 반대한다고 물러섰더라면 국내 입국자의 첫 인상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표현했다.

 

인터뷰에서 못다 밝힌 고마운 분들(지면 관계상 다 게재 못한 분들께 양해하기를 바란다고)

 

여객터미널 설계 때 - 까치건축 이상준 사장님, 정림건축 김정식 회장님과 홍성린 부사장님, 희림건축 이영희 회장님, 원도시건축 윤승중 회장님, 범건축 강응재 회장님. 관제탑 등 부대건물 설계 감리의 신한건축 최경일 사장님, 아키플랜 김우성 사장님. 교통센터 설계 감리의 삼우건축 김창수 회장님, 손명기 사장님. 여객터미널 감리의 혜원까치 서진철 사장님, 한상욱 부사장님. 민간시설 감리의 근정건축 김종문 사장님. 그 외 빌모트씨를 소개해 주신 이종복 사장님과 영원한 총각 임마뉴엘씨. 현장에서 - 한진건설의 김정웅 본부장님, 김광억·이만영·안진규 소장님, 금호건설의 이서형 사장님, 전석한 본부장님, 이원식·이동섭 소장님, 삼성건설의 권상문 본부장님, 이양근·이항복 소장님, 대우건설의 김기동 본부장님, 신동수 소장님, 현대건설의 유원호 소장님. 여러 분야에서 자문해 주신 분들 - 서울대 김문한 교수님, 연세대 이경회 교수님, 서울대 심우갑 교수님.

 

인터뷰를 마치며

 

인천국제공항은 우리 힘과 우리 기술로 이루어낸 불굴의 기적이다. 하지만 환경론자들은 습지에 몰려드는 새들과 비행기가 충돌할 수 있고, 바다를 매립하면 훗날 침하현상이 일어난다며 반대가 심했다.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21세기를 내다보고 어렵게 시작한 인천공항을 아름답고 다시 찾는 편리한 공항으로 만들어 국가의 브렌드 파워를 키우는데 현장 중심에 서서 진두지휘했던 산 증인이 바로 장영배 건축본부장이다. 그가 애초에 법대를 갔더라도 법무부 장관은 능히 지냈을 것이나 대한민국 브랜드와 후손을 생각하면 건축으로 방향을 잘 틀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매사에 대충하지 않는 꼼꼼하고 정확한 성격 탓에 품질을 양보하지 않는 과감한 결단으로 동북아 허브공항의 초석을 다졌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바로 건축의 대통령이 아닐까. 장영배 건축본부장을 비롯해 그동안 건설에 참여한 한 사람 한 사람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마랑재는 자연 속에서 쉬어가기 좋은 펜션

 

기자단 일행이 찾은 마랑재는 해발고도가 높은 청정지역에 위치한 정겨운 펜션이다. 마랑재 명칭은 마을의 형상이 말의 등을 닮았다는 마랑골에서 유래하여 지었다. 위치는 평창 화의계곡 옆이며 네이버에 마랑재를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 사시사철 다녀간 사람들의 칭찬 넘치는 후기가 많다. 일상을 탈출하여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싶다면 마랑재를 찾아가 보자.

 

한편, 마랑재의 유순화 대표는 장영배 건축본부장의 부인이다. 유순화 여사에게 바쁜 남편 때문에 불만은 없었는지 질문했다. 그녀는 이렇게 답변했다. “항 건설 기간 내내 우리 가족에게는 주말도 휴일도 거의 없었다라며 사진이 취미인 점을 고려해 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인 건설현장 내에서 사진을 촬영할 수 있게 해줬다라고 말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그렇게 풀어준 것이다. 당시 공항 건설로 사라진 옛 흔적들이 담겨있는 흑백 사진들은 영원히 남을 기록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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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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