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14 (금)

  • 맑음동두천 2.0℃
  • 맑음강릉 6.3℃
  • 맑음서울 5.8℃
  • 구름조금대전 6.4℃
  • 흐림대구 5.0℃
  • 구름많음울산 4.7℃
  • 흐림광주 8.2℃
  • 구름많음부산 8.0℃
  • 흐림고창 5.8℃
  • 흐림제주 11.4℃
  • 맑음강화 3.7℃
  • 구름조금보은 2.1℃
  • 구름많음금산 2.4℃
  • 흐림강진군 5.0℃
  • 구름많음경주시 1.1℃
  • 구름많음거제 5.6℃
기상청 제공
월간구독신청

문화

임금의 아내 왕비는 과연 행복했을까!

왕비가 되는 순간 가족들의 안위 장담 못해

역사는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것도, 한 개인이 만드는 것도 아니다. 일상생활 속 여러 가지 총체적인 사건과 모습들이 어울려져 만들어낸 시간의 산물이다.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세상의 모습은 어땠을까! 이런 게 있었나? 싶은 역사 토막상식을 살펴봤다. 최근 화제의 드라마 ‘원경’은 남편 태종 이방원과 함께 권력을 쟁취한 원경왕후가 왕과 왕비,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왕비가 되자 정치적 개입을 못 하게 하려는 이유로 친정 동생들이 처형됐다. 드라마 인기를 계기로 왕비의 모습이 화려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떠했을지 들여다보자.

 

왕비로 살지 못한 첫 국모 신의왕후 한씨

신의왕후는 조선의 건국을 지켜보지 못했지만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이라는 점을 인정받아 건국 직후 절비로 추존되고 능호를 제릉이라 했다. 제릉은 현재 개성에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조선 왕릉 42기 중 정종과 정안왕후의 후릉과 함께 북한에 소재하고 있다. 신의왕후는 고려 동북면 영흥 풍류산 아래 금리에서 아버지 한경과 어머니 삭녕 신씨의 딸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맑고 의젓하며 부덕은 유순하고 정숙하였다. 그녀가 태어날 때 가까이에 청학산이 있었는데 하늘에서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뒷산에는 오색 영롱한 구름이 감도는 등 3년 동안 풍류 소리가 끊이지 않아 풍류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이성계와 혼인한 것은 그녀의 나이 15세였다. 1354년 맏아들 방우를 낳고 그 후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의 6남, 경신, 경선 2녀를 두었다. 그녀가 자식들을 키우던 그때는 고려가 계속해서 북쪽의 홍건적과 여진족, 남쪽의 왜구들의 침입을 받았던 격동의 시기였다. 이성계는 압록강으로 쳐들어온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동북면 병마사로서 여진족의 토벌에도 큰 공을 세웠다. 이성계는 점차 입지를 든튼하게 다져나갔다. 그러던 중 1388년 이성계는 물론이고 그녀의 삶에도 가장 큰 사건인 위화도 회군이 일어났다. 회군의 성공을 장담하지 못한 이성계는 포천 제벽동 농장에 있던 그녀를 동북면으로 피신시키기도 했다. 위화도 회군의 성공은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서막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조선이 건국되기 1년 전인 1391년 9월 55세의 나이로 생을 마치고 만다.

 

사망 후 그녀의 무덤은 개성 남쪽 해풍군 치속촌 언덕에 조성되었다. 태종 때 세운 신의왕후의 비문에는 ‘후는 낳아서부터 현숙하고 완순하며, 총명하고 슬기로워 범상한 사람과 달랐다. 태상왕(태조)께서 처음 장상(장수와 재상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 되어 수십 년 동안을 전쟁에 참여하여 편안한 해가 없었는데, 후가 능히 힘을 다하여 집안을 다스려서 성공하도록 하였다. 또 성품이 투기하지 않아서 첩실을 예로 대접하였으며, 많은 아들이 있어 의리로 가르치셨다“라며 왕비의 성품과 내조를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가 전쟁에 나가 집안을 돌보기가 힘든 상황이었지만, 신의왕후는 6남 2녀를 잘 키워냈다. 특히 이들 중 정종(방과)과 태종(방원) 2명의 왕이 배출되었으니 조선의 첫 국모라는 칭호를 사용해도 좋을 것 같다.

 

최고령 왕비 최초의 대비 정안왕후 김씨

정안왕후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조차 생소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녀의 남편 정종의 존재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안왕후는 1398년 9월 1일 세자빈으로 덕빈에 봉해졌다가 9월 5일 정종이 왕이 되자 덕비라 칭해졌다. 11월 18일 44세 때 왕비에 책봉되면서 받은 책문에는, “오직 김씨는 단일성장(단정하고 정성스러운 모습)하고 유한정정(그윽하고 한가하며 곧고 정숙함)하였다. 일찍이 규문(부녀자가 거처하는 곳)의 도리를 세워 그 집안사람에게 화합하였으며, 장성해서는 부인의 예의를 닦아 우리 종사(무반 잡직의 종8품 벼슬)를 받들었다. 서자인 방석의 난리를 선동할 때를 당하여 내조를 다 해서 위태함을 구제하였다”고 하여 덕과 내조를 기록하고 있다.

 

정종은 재위 2년 만에 상왕이 되었고 그러자 정안왕후는 조선의 첫 대비가 되는 기록을 세운다. 58세 승하할 때까지 정종과 40년 가까이 해로했지만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정종이 9명의 후궁 사이에서 17남 8녀를 둔 상황을 고려할 때 왕비는 인고의 세월을 어떻게 담담하게 견뎠을지 궁금해진다.

 

자료 참조 : 왕비로 산다는 것

프로필 사진
박혜숙 기자

'정직,정론, 정필'의 대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