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베트남전 종전 45년을 맞았다. 당시 밥 먹고 살기가 힘들어 이국 만리 베트남전에 참전해야 했던 파월장병들의 고엽제 피해와 전후의 상처가 너무도 깊어 정신적 육체적으로 앓고 있는 그들의 아픔과 고통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베트남전 피해자 가족들이 ‘파월한국군이 베트남전에 참전해 민간 학살을 했다’는 근거를 제시하며 ‘한국정부에 사과를 원 한다’는 목마름의 기자회견에 필자의 관심이 쏠렸다.
종전일(1975년 4월 30일) 45주년을 맞아 '베트남 전쟁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시민사회 넷)의 기자회견에서 베트남피해가족들은 한국군의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앞서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피해자와 유족 103명은 지난해 4월 한-베 평화재단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통해 대한민국 청와대에 민간인학살 진상 조사에 나서달라는 청원을 낸바 있다.
이에 지난해 9월 국방부는 청원인들에게 보낸 답변에서 ‘한국군 전투사료 등에서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내용이 확인되지 않고, 한국-베트남 정부 간 공동조사 여건은 아직 조성되지 못한 상황’이라했다고 시민사회 넷은 밝혔다.
본지는 베트남인과의 언론 인터뷰 내용을 발췌했다.
▷ 베트남인 팜티프엉- 집으로 들이닥친 한국군이 방공호에 있던 내 가족을 끌어내고 수류탄을 던지며 총을 난사했다. 나는 왼쪽 다리와 팔을 다쳤고 왼쪽 눈마저 잃었다.
▷ 베트남인 쯔엉티쑤옌- 한국군의 총탄에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지면서 나와 딸아이가 맨 밑바닥에 깔렸다. 아무리 고개를 곧추세워도 귓구멍, 콧구멍, 입으로 핏물이 스며들었다. 아직도 피비린내가 사라지지 않는다.
28일, 구수정 한-베 평화재단 상임이사가 ‘서울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유족들의 사연을 구슬프게 읊었다’는 내용이다.
시민사회 넷은 “예의를 갖춘 여러 표현에도 불구하고 우리정부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 이었다”며 “그것은 청원 인들에게 있어 극히 실망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가 이 문제를 마주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피해자들의 억울한 호소에만 있지 않다”며 “베트남전쟁참전의 역사를 통해 가해의 역사를 성찰하고 우리도 언제든 타인에게 부당하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베트남정부가 전범 국가들에게 피해보상에 대한 말 한마디 하지 않았던 것은 전후 그들의 경제력이 약했기 때문이라 분석됐으나 이제 그들은 세계가 주목할 만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 별국으로 불려지고 있다.
파월장병의 만행이 그들의 역사 속에 살아 있는 한, 학살자 가족친지들이 사과를 원한다 하는 전초의 목소리가 아니라 장차 베트남정부차원의 피해보상책이 우리정부에 던져질 수가 있다고 예상되는 시점이다.
베트남전 파월장병으로부터 학살피해를 당한 그 가족들의 절규는 일제식민시대를 거치며 우리민족이 일본헌병들에게 당해야 했던 수모와 닮았고 6.25 한국전쟁 참화를 겪었던 우리국민의 억울한 죽음에 역사를 담은 절규와도 개연성이 있는 사건이다.
대표적 사례로 미군이 1950년 7월 26일 한국전 당시 충북 영동군 노근리에서 피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처럼 말이다.
미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예하부대가 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도 위 피난길에 오른 한국양민 300여 명에게 기관총을 난사해 200여 명 이상이 숨진 사건이 그것이다. 이 곳 철길 아래 쌍 굴 콘크리트 면벽에는 아직도 기관총탄 자국의 홈이 뿌리 깊게 패어져 있다.
당시 미군측은 이 사건을 부정했으나 지난 1999년 9월 미국연합통신이 발굴한 문서와 참전미군들의 증언으로 미군만행 일체가 알려진 사건이었다.
지난 2001년 1월 사건이 인정을 받으면서 2004년 2월, ‘노근리 사건 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명예회복사업이 추진된바가 있다. 우리정부의 ‘바른 시각의 과거사 청산’은 ‘화해와 사과 말이며 그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아나가는 길이란 것은 주관적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