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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올림픽은 4년마다 열리는 지구촌 스포츠 축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제32회 2020도쿄올림픽

 

32회 도쿄 올림픽은 2020년 개최 예정이었지만, 코로나 시대에 직면해 일본 국민 대다수가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는 가운데 일본 정부가 강행하여 5년 만에 열리게 되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돈 때문이다. 또한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은 역설적이게도 나라를 알리는 브랜드가 되어왔다.



올림픽 역사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 올림피아 제전에서 유래되었다. 기원전 776년부터 서기 393년까지 약 1,200년 동안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4년마다 한 번씩 열렸으나 그리스를 정복한 로마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 후 1,500여 년이 지나 프랑스의 쿠베르탱이 올림픽의 부활을 제창하면서 18946월에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조직되었다. 1896년에는 그리스 아테네에서 '보다 빨리, 보다 높이, 보다 튼튼히' 라는 표어 아래 제1회 대회가 열렸다. 참가한 나라는 13개국이었다. 이후 올림픽은 제1·2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된 6·12·13회 대회를 제외하고는 고대 올림픽처럼 4년마다 한 번씩 열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대회부터 참가하였고,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양정고보 학생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땄다.마라톤이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2시간 30분 기록보다 앞선 2시간 2919초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는 일제강점기여서 시상식 게양대에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 국가가 연주되었다.

 

대한민국은 광복 후 1947년에 국제 올림픽 위원회에 가입하고, 1948년 제14회 때부터 정식으로 참가하였다. 1988년에는 서울에서 제24회 대회를 개최하였다. 1964년에 아시아 최초로 일본에서 열린 올림픽에 이어 두 번째, 세계에서는 16번째로 열린 역사적 순간이었다. 역대 최다 국가인 159개국에서 8,391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이념 분쟁과 인종 차별을 넘어섰다.

 

태릉국가대표선수촌에서 진천국가대표선수촌으로 이전 

올림픽이나 세계 대회에서 스포츠 선수는 자기 나라 국기를 달고 국가를 대표한다. 따라서 국가는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선수촌을 만들어 훈련시킨다. 한국의 국가 대표 선수들은 그동안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있는 태릉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훈련했다. 대한체육회가 1966630일에 센터를 설립했다.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요람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국내 최고의 선수들을 모아 집중적으로 훈련시키고 국제 대회에서 메달을 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태릉선수촌은 세월이 흘러 시설이 노후화되고 인근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왕릉이 있어 시설 확충이 어렵자 새로운 선수촌 설립이 필요했다.

 

진천선수촌은 충청북도 진천군 광혜원면에서 지난 200921단계 사업 공사를 시작하고, 20111027일 준공식, 20179월에 문을 열었다. 규모는 태릉선수촌의 약 3배에 달한다. 부지면적은 1,594,870, 훈련 가능 종목은 35 종목이다. 1단계 11종목에는 사격, 카누, 조정, 테니스, 소프트테니스, 농구, 배구, 수영, 육상, 야구, 소프트볼. 2단계 24 종목은 복싱, 카라데, 태권도, 우슈, 유도, 역도, 볼링, 펜싱, 레슬링, 체조, 세팍타크로, 스쿼시, 탁구, 핸드볼, 배드민턴, 자전거, 하키, 양궁, 럭비, 컬링, 아이스하키, 빙상(쇼트트랙), 철인3, 근대5. 선수 수용 규모는 약 1,150여 명이다.

 

올림픽 마케팅, 스포츠는 국가를 대표하는 브랜드 

올림픽 세계 최고의 선수, 수백만의 팬과 관광객, 수십억 명의 전 세계 텔레비전 시청자를 끌어 모은다. 이러한 올림픽 마케팅은 사마란치 위원장이 IOC를 최고 수준의 스포츠 사업 선두주자로 만든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IOC 스포츠 마케팅 에이전시인 ISL(International Sports & Leisure)의 도움과 IOC 위원인 리처드 파운드의 지도력에 힘입어 마케팅 자산에 대한 통제권을 갖게 되었다. 코카콜라, 비자, 삼성 등과 같은 다국적 기업과 계약을 진행하며, 방송사의 유일한 협상권자가 되어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스포츠 마케팅을 운영하는 주체가 되었다.

 

1984LA올림픽은 역사상 처음으로 민간 기업에 의해 모든 경기가 조직되고 관리되며, 이를 위한 재정이 마련되었다. 방송중계권과 스폰서는 올림픽 경기를 지원하는 두 개의 대들보가 되었다. LA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는 기업의 수요에 걸맞은 전략을 개발하고 광고업계와 스폰서십 프로그램을 제휴했다. 기업은 이미지 제고, 제품 인지도 증가, 직원 충성도 강화, 해당 제품 카테고리의 독점권으로 매출 증대로 이어졌다. 이러한 올림픽 브랜드는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 브랜드에도 영향을 미친다. 일본 정부는 도쿄올림픽 유치를 통해 올림픽 특수를 기대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해외 관광객도 받지 않고 일본 국내 관중도 제한해 올림픽 개최로 인한 경제적 이익은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대한민국 국가브랜드 88 서울올림픽 이후 상승돼 

대한민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전쟁 폐허라는 이미지에서 비약적인 산업 발전으로 전환되었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88 서울올림픽의 표어처럼 변화가 많았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편찬한 '서울기획연구2 88 서울올림픽 서울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책를 통해 서울의 변화상을 어떻게 조명했는지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1981867만 명이었던 서울 인구는 올림픽을 치른 직후 1989년에는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예산규모는 2조 원 넘게(132억 원35585억 원) 확대됐다. 도시정비사업이 급물살을 타면서 도심 재개발 지구는 4.5(2193), 아파트 건립도 1.8(17060가구3802가구) 증가했고, 1개 노선(9.5km)에 불과했던 지하철은 4(115.3km) 노선 건설, 한강 주변의 도로를 확보해 올림픽도로와 강변도로를 확충하고, 공원은 1578(188.44)에서 2190(240.89)로 각각 늘어 도시경관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서울 도심 곳곳의 판자촌과 노후화된 건물들이 올림픽 개최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도시 정비를 추진하면서 잠실의 올림픽타운화가 되었다. 88서울올림픽의 특수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어 생활문화도 새롭게 변화했다. 여가문화의 활성화, 대중문화의 성장 등 서울시민 삶 전반을 바꿔놓았다. 또한 경제적 풍요는 소비 확산으로 이어져 부의 상징이었던 자동차가 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품으로 인식되며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과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마이카(My Car)' 시대를 열었다. 88서울올림픽대회방송을 주관하는 기구인 국제방송센터(IBC)가 여의도에 세워져 각종 특수 방송시설들이 마련됐다. 더불어 국내 TV, VTR 시장이 성장해 1981년 가구당 TV 보급률은 0.18%에서 19891.04%로 크게 증가했다. 올림픽 체육 열풍은 직장인체육, 학생체육, 생활체육 등 시민생활 전반에 체육여가문화 정착에 영향을 끼쳤다.

 

스포츠는 국가 브랜드 구축에 있어 핵심 요소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가 조사한 대한민국 국가 이미지 관련 연구에 따르면, 외국인들이 한국의 이미지를 연상할 때 13%가 올림픽을 떠올린다고 보고했다. 우리나라는 2009122일 국가브랜드위원회를 구성했다.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구축·증진하고 한국의 문화와 제품과 국민들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아 이미지를 개선한다. 정부 주도의 전략과 정책을 통해 해외에 있는 한국 사업체와 국민들의 자긍심 고취와 긍정적 이미지 확립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세 가지 주요 기능은 1, 한국 정부의 국가브랜드 관련 사안의 통합 관제탑 역할. 2, 국가 브랜딩 정책과 관련 프로젝트의 효율적 수행. 3, 국가 브랜딩 활동을 촉진하기 위한 국민의 참여 유도와 공공-민간 파트너십의 강화 및 확장이다.

 

올림픽과 정치적 관계 

2008년 베이징올림픽 보이콧 논란이 일었다. 이유는 중국의 인권상황 및 티베트 문제 등과 관련하여 국제사회에서 들고일어났다. 이에 중국정부와 IOC올림픽은 정치행사가 아니니 정치 문제와 연관 짓지 말아 달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스포츠 사회학자 존 호버만은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oreign Policy>July August 2008에 기고한 글에서 올림픽과 정치문제가 별개일 수 없다는 사실은 올림픽의 역사가 반증한다며 반박했다. 그가 언급한 정치적 올림픽의 대표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은 히틀러 정권의 국외 홍보 수단이었으며 올림픽의 아버지피에르 쿠베르탱은 베를린 올림픽을 생애의 역작으로 평가했고, 나치 정부는 그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열흘 앞둔 멕시코 정권은 군부를 동원해 수도 한복판에서 학생시위를 유혈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이 숨졌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극단적인 인종 차별 정책을 지칭하는 아파르 트헤이트는 백색 인종과 유색 인종, 특히 흑인을 격리하는 차별 정책을 말한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 22개 아프리카 국가들은 참가를 거부한 바 있다. 1980년 광주의 유혈사태는 국제사회의 공분을 샀지만, 전두환 군사정권은 88서울올림픽 개최의 영광을 안았으며 당시 IOC는 이에 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미국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때 소련의 아프간 침공을 이유로 올림픽 참가를 보이콧하자 소련도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보복성 보이콧으로 맞섰다.

 

2020 도쿄올림픽은 어떨까. 일본과 IOC는 올림픽 개최를 강행하고 있지만, 코로나 상황에서 부정적인 시선도 많다. 특히 미국과 영국은 이 시국에서 글로벌 행사를 개최한다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을 표명했다. 유명 스포츠 스타들 역시 도쿄올림픽 불참을 선언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대만이 야구 종목의 최종 예선 불참을 선언했으며 IOC 회원국 중 북한은 유일하게 전 종목 불참을 선언했다. 올림픽 헌장에 따르면 IOC 회원국은 올림픽 참가의 의무가 있으며 특별한 이유 없이 국가 단위의 올림픽 불참을 금지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과 독도 영유권 문제로 올림픽 보이콧을 할 경우 제재 대상이다. 대한체육회는 도쿄올림픽 참가와 관련해 정해진 일정에 따라 올림픽 참가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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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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